이승환(ㅍㅍㅅㅅ 대표, 이하 리): 왜 굳이 대구에 나오게 되셨어요?
임대윤(대구시장 후보): 대구에 김부겸 장관이 나오지 않는 이상, 제가 대구판을 책임져야 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경선에 나선 두 분 후보도 계시지만, 제 판단엔 제가 가장 파이팅이 넘친다고 생각하거든요. TV 토론에 능한 상대 후보를 상대하려면 저 정도의 행정 경험이나 말빨은 있어야 하지 않나 해요.
리: 김부겸 의원과 대학부터 아셨다고요?
임대윤: 대구는 좁으니까요. 운동권에 있으니 서로 쉽게 알게 되죠. 1977년 겨울인가 알았어요.
리: 흔히 생각하기로 대구경북은 운동이 별로 없는 지역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떻습니까?
임대윤: 아닙니다. 1970년대 후반 기독교를 중심으로 운동이 많이 있었어요. 그때만 해도 기독교가 운동의 주축이었죠. 성경공부를 하면서 의식화 교육을 받았어요. 남미 해방신학도 공부하고요. 학과는 법학과인데도, 사회구성체 이론을 비롯해 사회학 공부를 하며 서울대학교 대학원에 가게 돼요. 대학교 때 저는 교련 거부 투쟁, 집체 교육 반대 투쟁을 하다가 강제징집을 당했어요. 자대 배치를 받으니 많이 갈구더라고요. 정보처리 인가 같은 것도 안 나고.
대학원 때 글 하나로 이미 전국구 스타가 되어 남산으로 끌려가다
리: 대학원에 가서 그 글을 쓰게 되죠? “우리의 국시는 통일이어야 한다”.
임대윤: 1984년도, 영남대 4학년 때 통일에 대한 기초적인 생각을 가다듬었어요. 그 생각을 가다듬으며 반공(反共)이라는 안티테제가 테제가 되어선 안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된 거죠. 이후 유성환 의원이 마지막 대정부 질의 원고를 부탁하셨는데, 30분짜리 대정부 질의는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예요. 5분 분량 정도는 이재오 선배가 쓰고, 나머지 25분 분량은 제가 썼어요. 그런데 유성환 의원이 2년 전 통일국시론을 이재오 의원이 썼다고 하더라고, 하하.
리: 스타가 됨과 동시에 온갖 고생도 시작됐겠네요.
임대윤: 스타가 된 건 아니고, 온갖 고생만 했죠. 서울대 대학원생 임모 군이 원고 작성자다, 도주했다, 이런 기사가 나왔어요. 그해 대학원을 졸업하고 유학을 준비 중이었는데 잠적해야 했죠. 유성환 의원이 구속된 후 한동안 추적이 느슨해졌는데, 전두환 대통령이 ‘원고 쓴 놈 잡았어?’ ‘그놈을 잡아야지, 빨갱이 아니냐’ 한마디 한 것 때문에 어마어마한 압박이 들어오더라고요.
리: 압박이라면 어떤…
임대윤: 검찰, 경찰, 안기부 등이 경계 없이 서로 잡으려고 안달이었어요. 집안 박살 나고, 군홧발로 밟고 나가고. 마누라는 학교 교사였는데, 여교사 가방을 막 열어버리고, 안기부로 잡아가고.
리: 사모님께 잘해주셔야겠어요.
임대윤: 뭐 잘해주겠어요, 선거도 네 번 떨어지고. 하하. 그런데, ㅍㅍㅅㅅ는 뭐죠?
리: 폭풍설사라고도 하고… 폭풍섹스라고도 하고… 다들 알아서 읽습니다.
임대윤: 허허허! 폭풍설사! 하하하!
리: …… 유성환 의원도 그렇고,박찬종 의원도 그렇고 모두 시대의 거인들이잖아요. 어떻게 이런 분들을 만나게 되셨어요?
임대윤: 당시 도망 중 새벽에 박찬종 의원 집에 문을 두드리고 들어갔어요. 이런저런 사정을 설명하며 제가 통일국시론 원고를 썼다고 하니, 박찬종 의원이 다음날 아침 식사를 차려주시더라고요. 그 이후 한 달 가까이, 박찬종 의원 차 뒷좌석에 숨어서 국회 의원회관을 같이 왔다 갔다 했어요. 종일 앉아서 할 일이 없으니 박찬종 의원이 제 생각을 정리해 보라며 묻기도 하시고…
리: 그러다가 자진 출두를 하셨군요.
임대윤: 네. 그때 이건개 씨에게 연락했죠. 박찬종 의원과 함께, 서울대 3학년 때 고시에 합격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안기부가 와서 남산으로 끌려갔죠.
리: 소문으로 듣던 곳에 직접 가니 어떻던가요?
임대윤: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았죠. 맞을 때보다도, 끼익 소리가 나면서 문이 열릴 때, 옆 방에서 고문에 시달리는 소리가 들릴 때가 너무 고통스러워요. 내가 맞는 것보다 더. 국회 프락치 사건 같은 거로 엮으려는 것 같더라고요. 하지만 박찬종 의원이 절 계속 주시할 테니, 그들이 저를 없는 사람처럼 대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천명을 하시더라고요. 대단한 일이었죠.
리: 실제로 박찬종 의원이 큰 도움이 됐나요?
임대윤: 그럼요. 그 당시가 어땠냐면, 제가 갑자기 이 세상에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판국이었습니다. 최소한 실종 처리나 이렇게 가진 못했죠. 그래서 좀 조용히 가나 했더니 제가 감옥에 있는 동안 건국대 도서관 점거 사건이 생겨요. 기소만 천몇백 명이 동시에 된 최대의 사건 중 하나인데 옥상에 “통일국시론을 지지한다”는 게 붙고 그랬어요. 근데 그거 때문에 저는 또 남산에서 깨지고…
리: 그 경험 이후, 세상이 좀 달라 보이던가요?
임대윤: 그렇죠. 그 후 나와서, 유학은 포기하고, 박찬종 의원의 제안으로 비서로 들어가게 되었죠. 그때부터 정치를 하겠다,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꿈이 생겼어요. 그래서 유학도, 박사도 포기하고. 사실 가정형편도 박살 나고, 어머니도 병을 얻었고… 그렇게 정치판을 시작하게 된 거죠.
노무현에 이어 지역색에 도전한 패기의 젊은이
리: 어떻게 보면, 운동권 청년이 기성 정치판으로 편입된 것인데… 어떻던가요?
임대윤: 사실 박찬종 의원이 당시에 엄청 깨끗했어요. 박찬종 의원이 저를 총애했어요. 아침이면 방배동 집에 일찍 가서 사모님이 직접 해주신 토스트와 커피를 먹으며, 다른 비서와 함께 신문을 정리하면서 대변인 논평을 준비했죠. 지금은 돌대가리가 됐지만 그때는 머리가 잘 돌아갔죠. 박찬종 의원이 그때 기자에게 인기가 없었던 게, 술은 안 사면서 논평을 계속 내니까.
리: 그런데, 박찬종 의원과 갈라지셨어요.
임대윤: 복잡한 시기였어요. 삼당 야합 때 안 들어가고 민주당을 만들었는데, 제가 이때 창당기획실장을 했지요. 몇 달 안 돼 한겨레민주당이랑 합치고, 또 평화민주당이랑 합쳐서 통합민주당이 되고. 박찬종 의원은 일노삼김을 거부하는 뜻에서 통합민주당을 거부하고 신민당을 만들었는데, 그때 김대중 선생이 김홍길 씨를 보내 서울시장을 권유하는 등 박찬종 의원을 통합민주당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했어요.
리: 그때 박찬종 의원이 서울만 나갔어도 인생이 잘 풀렸을 것 같은데요(…)
임대윤: 저는 1-2주를 찾아가며 서울시장 하십시다, 했어요. 그땐 나갔으면 붙었지요. 그런데 부산에서 올라온 참모 몇 명이, 일노삼김에 박이 나가도 이긴다는 오자필승론을 내세우며 대선에 나가자는 거예요. 전 끝까지 격렬하게 반대했어요. 서울시장이 어떤 자리냐? 차기 대권으로 가는 자리다, 하면서요. 하지만 끝까지 거부하시며, 참모들을 데리고 민주당을 나가시더라고요.
리: 본인은 왜 따라가지 않았습니까?
임대윤: 의원님께서 나가면서도 숲이 커야 큰 오소리도 나온다며, 저에겐 민주당에 남으라고 하셨어요. 저도 남고 싶었고요. 거기서 갈라진 거죠. 그러다 나중엔 결국 김영삼이 있는 신한국당에 가시더라고요.
리: 통합민주당은 어땠었나요?
임대윤: 통합민주당 때 저도 서울에 정책실장으로 계속 있어야 했는데… 1992년 총선 때의 일이죠. 대구 동구 갑에 김복동 장군, 노태우 대통령 처남이 나왔는데, 이러다가 육사 11기 연속으로 대통령이 이어질 수 있다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정치 초짜가 이길 상대가 아니었지요. 그런데 노무현, 이철, 장기욱 세 분이 ‘이기진 못하겠지만, 태클을 걸어라, 져도 이기는 경우가 있지 않느냐’면서.
리: 노무현 전 대통령이 한 사람의 인생을 망쳤군요(…)
임대윤: 장기욱 의원이 그 두 분께 빌려서 3,000만 원을 만들어 저한테 주시더라고요. 그걸 들고 봇짐 메고 대구로 내려왔죠. 그때 김부겸 의원은 내가 우예 거길 가느냐고 버텨서, 동작 을에 공천받아 나오고, 저는 대구 동구 갑에 공천받아 나오고. 둘 다 떨어졌어요. 그래도 김복동이 전국 최다득표는 못 하게 막았고, 2등과도 비교해서 800표 차 나는 3등을 했어요. 34세 때.
리: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나요?
임대윤: 연설하는 동안 김복동 의원이 기다리지 않겠어요? 박정희 시해 당시 김복동이 경호실 차장이었다, 그 당시 어디 가 있었느냐, 왜 정치판까지 기웃거리느냐고 연설했어요. 김복동 의원 얼굴이 빨개지더라고요. 연설 잘 했다며,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수백 명이 제 사무실까지 따라왔어요. 물론 이길려고 나간 건 아니니까, 졌지만, 멋있게 낙법 잘 했죠. 깔끔한 선거, 완전히 도덕적인 선거 치르고.
리: 대구 동구는 그때는 낙후된 지역이었나요?
임대윤: 그럼요. 대구 출신이지만 중구 출신이라, 동구는 잘 모르는 동네였어요. 정말 노무현, 장기욱, 이철 때문에 여기 온 거죠. 그때 노무현 대통령 말씀이, “당신, 여기 내려가서 10년만 고생해라. 그래야 대물을 잡고, 대물을 잡아야 대물이 된다.”
리: 노무현 대통령은 어떤 느낌의 사람이었어요?
임대윤: 10년 버티면 대물이 된다고 하셨잖아요. 역사에는 희생이 따르지만, 전진한다는 낙관을 가진 분이었죠. 저도 믿어요. 그러니까 여기서 버티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번에 시장 나오는 것도, 그런 측면이에요. 시장 후보가 제대로 서 있어야 구의원 후보도 설 수 있거든요. 전 적어도 민주당의 정체성에 있어 안 흔들릴 자신이 있고, 정책 토론에서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어요.
8년간의 청장 생활, 그리고 영남 비주류의 삶
리: 잠깐 이야기를 돌려서요. 첫 번째 선거 이후, 다음 선거도 또 떨어지셨는데 기분이 어떠셨어요?
임대윤: 두 번째는 참담하더라고요. 서른여덟 살 땐데, 이종구 국방부 장관도 나오고, 강신성일도 나오고, 김복동 나오고, 구 의장들 몇 명 나오고, 답답하더라고요. 정치인에게 지역구를 받는다는 건 혼인신고 같은 일입니다. 대구 동구 위원장을 해 버렸으니 다른 지역에 가기가 어렵죠.
리: 그리고 나선 한나라당에서 연이어 당선되셨잖아요. 당적 옮기는 과정은 이미 많이 이야기가 나왔어요. 조순 대표와…
임대윤: 맞아요. 김대중 대통령이 대선에 두 번 떨어지고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에 갔지요. 그리고 1년 후 돌아와서 통합민주당을 깨고 새정치국민회의를 만들어 나갔어요. 이기택 총재의 측근들은 김대중이 들어오면 안 된다고 난리를 쳤지만, 통합추진위원회 사람들, 김근태, 제정구, 이부영, 노무현, 이강철, 원해영, 김부겸, 그리고 저… 다들 들어오라고 설득했는데 실패했지요. 거기서 김근태, 노무현은 그쪽으로 가고, 나머지는 남아서 조순 씨와 남아서 어중간하게 붕 떠 있다가, 조순 대표와 이회창 대표가 통합하며 한나라당에 가게 됐어요. 그렇게 한나라당 후보로 대구 동구청장이 된 거고.
리: 그래도 당선되니까 기분은 좋았죠?
임대윤: 그거야 당연히… 당선될 때도, 자민련이 득세했어요. 모든 언론이 자민련의 오기환이 된다고 하던 때였는데, TV 토론회와 유세에서 앞서니 당선된 거지요. K2 이전 문제가 그때도 나왔는데, 구청장으로서 그 공약은 못 하겠다고 정직하게 얘기했어요. 미국의 동북아 군사외교전략, 한반도 안보전략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에, 구청장이 약속할 순 없다고 했죠.
리: 되든 말든 공약은 지르고 보는 게 원래 선거 아닌가요?
임대윤: 그땐 순진하니까 그랬던 것 같아요. 내가 자신이 없으니까, 내 영역 바깥의 문제니까 그렇다고 했죠. 다만 군용항공기 소음 피해 보상법은 국회를 통해서 만들겠다고 해서, 만들었지요.
리: 8년 동안 직접 맡아보니 어려움도 맡았을 거고, 깨달음도 많았을 것 같은데요.
임대윤: 광역시의 청장은 한계가 있어요. 다만, 주민 복지 문제, 문화 문제, 주민 의식 계도 문제 등은 충분히 기능할 수 있었죠. 금융위기 등으로 어려운 시기였지만, 구청장에게 허락된 능력으로 많은 노력을 했죠. 구청장은 군림하는 자리가 아니고, 소통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주고요.
리: 소통을 통해 달라진 사례가 있을까요?
임대윤: 예를 들어, 공공근로사업이 있었어요. 인건비 90%, 재료비 10% 이상을 못 쓰게 지침이 내려와요. 저는 필요한 경우엔 인건비 20%, 재료비 80%도 좋다, 하라고 했어요. 해야 하는데 예산 사업으로 못 하는 사업을 공공근로사업으로 전환한 거죠. 대신, 80%의 재료비를 썼더라도 한 점 부끄럼이 없게, 국가 계약법에 저촉되는 것이 절대 없게 하라고 했어요. 그렇게 금호강 고수부지 정비사업 ‘금호강을 금호강답게’를 시멘트 포대 한 포대 쓰지 않고 해냈어요. 사행천을 그대로 두면서, 공무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했어요. 일본의 최근 조류를 보니, 직수직강이 아니라 사행천이 강을 살리는 방법이더라고요.
리: 말씀하시는 걸 보면, 현재의 지방분권에 한계를 느끼고 계신 것 같은데요. 개헌에도 기대가 크신가요?
임대윤: 개헌에 기대가 컸죠. 지방법률제정권, 지방공화국 형태 개헌까지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국세와 지방세 비율이 8대 2인데, 6대 4까지 가야 합니다. 재정적 독립이 되어야 하고, 상위법이 없으면 조례를 만들지 못하는 형태가 아니어야 해요. 물론 지방법률제정권이라 해서 헌법적 테두리를 넘어설 순 없는 거지요.
리: 청장을 마치고 다시 민주당으로 복귀했습니다. 그 계기는 뭐죠?
임대윤: 공천 문제도 있었죠. 저는 경선을 하지 않겠다고 한 상황이었는데, 강신성일과 경선을 하라고 하는 바람에요. 그런데 더 큰 건 당시 총풍 사건이 발생하며 김부겸 등 모두 나갔어요. 한나라당에 계속 있으면 국회의원도 하고 시장도 할 수 있었겠지만, 생각해보면 그래 봤자 쫓겨났을 것 같아요. 사실 구청장은 행정 업무를 하기 때문에 당적이 큰 의미가 없어요. 하지만 국회의원은 다르거든요. 결국 본류를 찾아가게 된 거죠.
리: 참, 영남 비주류의 삶을 대변하는 것 같아요. 탈당하여 민주당으로 돌아갈 때, 사모님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임대윤: 반대했죠. 교사인데 학교도 안 가고 절 탈당 못 하게 하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생각해보겠다고 하고 일단 학교에 보낸 뒤에, 바로 탈당계를 냈어요.
리: 나쁜 남자네요. 10년만 참으면 기회가 온다는 노 대통령의 말씀이 이번엔 이루어질까요?
임대윤: 안 된다는 가정을 하고 계신 것 같은데 그건 모를 일입니다. 내가 간절하면 상대가 실수할 수도 있고요. 10% 정도 차이가 나는데, 아직 한 달 남았으니까요. 그리고 트럼프가 도와줄지 또 압니까.
이것저것 정책 이야기
리: 대구공항 이전을 외치는 상대 후보와 달리, 공항을 지켜야 한다는 쪽입니다. 허나 이용객도 영 없고 그렇지 않나요?
임대윤: 작년에만 300만이 넘어갔고, 원래 400만이 넘어갑니다. 오히려 확장해야 해요. K2(군 공항)는 이전하고 대구공항은 확장해야 해요. 그런데 제 마누라도 그래요. 공항 통합 이전을 그렇게 반대해서야, 대구 동구에서 정치를 포기하는 거 아니냐고요. 그런데 제가 대구공항 통합 이전을 제일 먼저 반대했습니다. 시장 선거용으로 들고나온 게 아닙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갑자기 통합 이전을 국무회의에서 지시하기 직전까지, 대구에선 통합 이전 같은 말도 없었어요.
리: 통합 이전을 하면 어디로 하는 건가요?
임대윤: 군위, 의성으로 한다는 건데, 거기 인구도 몇만 안 살아요. 조사해봐야겠지만 최순실 작품 같아요. 밀양 신공항도 안 되고 가덕도도 안 되고, 김해 공항 확장으로 갔잖아요. 그러니 유승민이 대구 시민 마음을 위로해야 한다며 아예 통합 이전을 시키자는 논리를 내세웠죠.
리: 부산 공항도 있는데, 대구만의 수요로 규모가 나올까요?
임대윤: 부산은 전남 해안, 서부 경남권에서 이용한다면 대구는 경북, 울산, 광주권이 이용할 수 있어요. 수원 이남은 거의 대구공항을 이용하게 될 겁니다. 지금도 근거리 항공은 수원 이남, 충청권에서도 많이 옵니다. 또 대구역은 KTX 역사에서 내리면 공항까지 10분이면 가요. 고속 철로를 놓으면 그걸 3분까지 줄일 수 있습니다. 자기 도시에 있는 비행장을 폐쇄하겠다는 시장 후보는 어디에도 없을 거예요. 박근혜가 하라고 하니까 하는 것 같아요.
리: 공항 외에도 여러 문제가 있어요. 취수장 문제는 굉장히 오래된 문제인데, 어떻게 되어갑니까?
임대윤: 한 10년 된 문제인데, 간절함이 부족했죠. 어차피 새누리 간판 달고 나오면 당선되니까. 깨어있는 시민들이 필요한 이유에요. 제 생각엔 구미 시장을 이 문제로 만나서, 담판을 짓고 그러질 않은 것 같아요. 실질적으로 구미 하수종말처리장에서 하루에 배출되는 물은 고도 정수 처리를 해도 한계가 있어요. 하수종말처리장의 배출 기준을 높여야지요. 물 갈등 조정 특별법을 만들어 중앙 정부가 개입해야 합니다.
리: 예전엔 공약이 개발 위주였는데, 요즘에는 환경, 문화, 교육이 많더라고요.
임대윤: 삶의 질의 문제죠. 산업화 시대 개발 논리가 인간의 행복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걸 사람들이 아는 거죠. 대구도 공기도 좋지 않고, 삶의 질이 좋은 편은 아니에요. 근본적으로, 전기자동차 생산을 대구에서 하고 싶어요. 초기 단계에선 일 120~130대를 생산할 수 있는 땅 4만 평 정도를 확보하려고 해요. 소형 전기 자동차를 만들어서, 공무원부터 카 셰어링 시스템으로 운용하는 거죠. 지금 내연기관 자동차를 전기 자동차로 기술 이전을 하지 못하면, 도시산업의 20%가 무너져요. 대구 도시가 무너집니다. 산업화 시대의 사고에서 벗어나야 해요.
리: 좋은 아이디어인데, 급진적이라 안 될 때의 리스크를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임대윤: 4,000만 원짜리 전기 자동차를 대구에서 2,000만 원 주고 지원해요. 이럴 거면 차라리 대구에 자동차 회사를 만들어서, 그 자동차를 확실히 대구시가 구매하겠다는 민간기업 지원 형태로 하면 됩니다. 전기자동차는 부품이 8,000개 정도밖에 안 되고, 앞으론 점점 줄어들 거예요. 대구에 있는 자본으로도 충분히 가능해요. 대구에 있는 여러 자동차 회사와 대구 시민들이 협동조합 형태로 자동차 회사를 만들어, 카 셰어링까지 하는 겁니다. 교통 시스템 자체가 바뀌는 거지요.
리: 교통 시스템 말씀을 하시니, 대구가 버스 문제가 제일 심각한 도시 아닙니까?
임대윤: 아침에 텅텅 비어 다니는 버스 많아요. 노선부터 문제가 있지요. 무조건 시에서 보전해 주는 데다, 3호선을 만들면서 3호선을 많이 타게 하기 위해 버스 노선 조정을 해 놓으니까 버스 노선이 너무 불편해요. 또 버스 배차 간격이 약 15분 걸려요. 절대적인 버스 대수도 적어요. 밤엔 중간에 내려야 되고, 환승하는 데 시간도 너무 걸리고, 지하철 역사에서 버스 정류장까지도 거리가 있고… 교통 시스템 전반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26개 버스 회사가 있는데, 이걸 1개 내지 3-4개 회사로 묶어야 할 것 같아요. 버스 회사 소유주들의 부를 연장하는 행태는 더는 안 되죠.
리: 호남을 돌면서 느낀 게 경북·경남은 산업화 시대에 매몰된 반면 호남은 홀대받았다곤 해도 순천, 전주 등이 문화도시로 성장해가는 게 보였어요. 경북에서 경주 빼면 이런 게 되는 도시가 없거든요. 대구는 문화적으론 어떤 발전이 가능할까요?
임대윤: 관제문화엔 한계가 있어요. 문화의 뿌리가 호남보다 뒤떨어지는 곳이 아닌데, 지나치게 권력 추구형 도시가 되다 보니 그렇게 되었죠. 졸부가 인정받는 문화를 탈피해 선비정신, 민족정신을 거양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죠. 각 계층의 목소리를 들어주고, 이를 시정에 반영함으로써, 시정이 힘의 논리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는 인식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봐요. 대구가 예술적인 기질 자체는 강합니다. 문화 예술 고액 티켓이 서울 다음으로 많이 팔리는 게 대구에요. 이를 더 오픈해 고액 티켓만 팔리는 게 아니라, 많은 사람이 문화를 향유할 수 있게 해야 해요.
리: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임대윤: 우선, 무대가 있어야 해요. 제가 동구청장으로 있을 때 동구 아트센터를 만들었습니다. 당시 땅값을 제외하고 300을 들인 수성 아트센터가 있고, 200을 들여 만든 동구 아트센터가 있는데, 동구가 훨씬 낫습니다. 무대 예술에 대한 이해도가 달랐던 거죠. 무대 크기, 조명, 음향 시설 등 초기 투자를 제대로 했어요. 또 생활체육 시설도 늘려야 해요. 대구시민운동장조차 대구FC 구단에게 줘버렸어요. 물론 월드컵 경기장을 사용했을 때 관객이 너무 안 오긴 했지만.
리: 디즈니랜드나 유니버설을 유치한다는 얘기는요?
임대윤: 대구공항이 국제공항이 되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패키지죠. 남는 비행장 부지와 해제되는 군사보호지역에 항공산업단지를 만들 겁니다. 비행기를 만들겠다는 겁니다. 대구 부근에서 항공전자산업이 상당히 발전해 있고요. 지금 사천 KAI에선 전투기를 만들어요. 구미 한화 쪽에서 보잉 엔진까지 만들고, 영천에선 보잉 부품까지 만들어요. 지금 중국에 공항이 370개쯤 되는데, 2040년엔 3,000개 공항을 만든답니다. 미쳤죠. 대구가 비행기를 만들 수 있는 최적의 공간입니다.
리: 이걸 하려면 정부 예산을 엄청 따와야겠는데요.
임대윤: 그렇죠. 2010년에 정부가 예비타당성 조사를 통과시킨 게 1조 1,000억이 있어요. 그런데 유수한 외국 항공기 제작사와 조인트 브랜치를 만들 때 이 데이터를 인정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캐나다 항공사 중 한국과 합작 투자할 곳이 추진되고 있어요. 비행장을 얻어내고, 반은 국제화하 하고, 반은 항공산업단지를 만들어, 중소산업 연구시설을 갖추고 가까운 곳에 주거시설을 배치해 에어시티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에요.
대구의 미래
리: 대구 계시다 보면 어때요? 온도가 바뀌는 게 느껴지나요?
임대윤: 느껴집니다. 세상이 바뀐다는 걸, 그 주체 세력이 민주당이란 걸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대구에서도 촛불이 일어났어요. 최순실, 박근혜의 개인적인 일탈을 넘어, 이런 국정 농단이 이토록 쉽게 일어나고 지속될 수 있었던 시스템의 문제, 거기에 대한 분노가 많았다고 생각돼요.
리: 순천에서 이정현이 당선된 게 굉장한 충격이었던 게, ‘너 좋아서 뽑은 거 아니다, 호남에서 더 이상 민주당이면 무조건 되는 거 아니다’란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하더라고요.
임대윤: 그런 전략적 선택을 할 수 있는데, 대구만은 계속 한 당이었지요.
리: 그런 행태가 왜 사라지지 않은 거죠?
임대윤: 대구의 보수 정치 세력이 보수적인 자본가들과 결탁해 그 이권이 계속 유지되어오는 거죠. 관료들은 그 눈치를 보는 거고요.
리: 사실 어디서나 학부모가 표심이기도 하지만, 도시가 발전하려면 학생들을 어떻게 케어해주느냐가 골치 아픈 문제인데요.
임대윤: 대구가 가장 늙은 도시에요. 대구에서 취업의 기회가 너무 적으니 청년들이 서울로 가죠. 그러다 보니 서울의 2류대학이 경북대학교보다 입학 성적이 높아져요. 지잡대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이 붙는 거고요. 교육 문제가 제일 어려워요. 제 생각엔 대학 시험을 좀 단순화시켜야 될 것 같아요. 서울대 몇 명 넣느냐로 학교 서열화를 계속 시키는데 그런 것도 안 하게 해야죠. 지방대도 활성화해야 하고, 지방에 내려오는 국가 공사엔 고용 쿼터제를 실행해야죠. 기본적으로, 이제 청년들은 무조건 많은 월급보단 적절한 월급과 만족감, 문화 등을 함께 추구하는데, 서울로 떠난 대구 청년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청년 창업을 편하게 해야 할 것 같고요. 주거와 일, 놀이를 함께 추구할 수 있는 커뮤니티를 형성해야 할 것 같아요.
리: 자제분들은 다 대구에서 자랐나요? 자제분들을 키우기에 대구가 이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신 적은요?
임대윤: 대구에서 자라다가 대학은 서울로 갔죠. 부끄럽게도, 자녀들과 함께 놀아주는 아빠가 아니었어요. 30대 초반부터 정치해서 40 초반에 구청장이 된 데다가, 워커홀릭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일에 열중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지금도 선거운동 하다 보면 동구 주민들이 절 알아보시는 경우도 많긴 해요.
리: 그 고생을 하면서 왜 정치를 계속하세요?
임대윤: 세상을 바꿔보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이건 아니에요. 빈부격차가 이렇게 심해지고, 강자의 횡포도 심하고… 사람이 함께 사는 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세상을 공정한 사회로 바꾸어 보고 싶어요.
리: 어찌 보면, 노무현과 김부겸 두 분과 비슷하면서 다른 길을 가는 것 같은데요. 본인이 생각하기에 두 사람은 어떤 것 같아요?
임대윤: 노무현 대통령이 좀 더 투박하게 자기 갈 길을 가죠. 부겸이 형도 자기 길을 흔들림 없이 가지만, 투박하다기보다 부드럽고 세련된 방식으로요. 얼굴이 세련되지 않아서 그렇지.
리: 앞으로도 여러 활동을 하실 텐데요. 삶의 굴곡이 굉장히 많은데, 제일 잘 한 선택과 아쉬운 선택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임대윤: 아쉬운 선택은, 좀 더 공부를 했어야 했다는 거예요. 박사학위까지 해서, 북한 문제 전문가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았나 해요. 구청장을 그만두고 나서라도. 잘한 선택은 별로 생각이 안 나요. 항상 아쉬움이 많죠. 다만 공직에 있으면서 정말 투명하게 했던 점? 1,000만 원 이상만 돼도 전자입찰을 하도록 시스템을 만들었고요. 수많은 인사청탁을 다 거절하고, 볼펜 하나 안 받고 정치를 했습니다.
리: 정책 중에 특이한 게 의무급식 이야기인데요. 다들 무상급식 얘길 한지 한창인데, 의무급식 얘기가 이제야 나온다는 게요.
임대윤: 대구가 아직 그 수준이 안되니까요. 중학교까진 의무교육입니다. 고등학교부터는 의무교육은 아니니까, 무상급식이 되는 거고요. 그런데, 박근혜 공약 중 고등학교까지 의무교육으로 만든다는 게 있었거든요. 저는 대구에서 시범적으로 이를 실행해보고 싶어요. 특히 대구는 발달장애인이 만 가구 정도 있는데, 발달장애인 국가책임제 시범도시도 만들어 보고 싶고요.
리: 소수자 문제에 관심이 많으신가요?
임대윤: 제 아버지가 치매신데, 치매 가정이 많지요. 치매 국가책임제를 문재인 대통령이 내세웠는데, 대구에서 확대 시범실시를 하고 싶어요. 발달장애인들은 학령 나이까진 어느 정도 지원이 되지만, 그 이후엔 문제에요. 그들이 자립하고 살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해요.
리: 그런 생각이 정권교체를 통해 매우 확대되는 것 같아요.
임대윤: 그것이 국민의 권리죠. 복지는 시혜가 아니라, 동시대에 함께 사는 사람으로서의 권리죠. 국가, 사회단체의 의무고, 사람의 권리입니다.
리: 마지막 질문 하나만 할게요. 이번에 시장이 된다면, 이전의 대구와 어떤 차이가 생길까요?
임대윤: 에너지 넘치는 대구가 될 겁니다. 젊은 사람들이 돌아오는 대구를 만들 것이고, 평균 연령이 낮아진 대구를 만들 거에요. 충분히 상의도 하지만, 그걸 밀어붙이는 힘도 있어요. 구청장 때 일도 많이 시켰지만, 그때 직원들이 아직도 절 불러요. 인격적으론 제가 그분들을 모셨어요. 참, 일하고 싶어요.
데이터 시각화로 알아보는 ‘대구광역시’
“해당 기사에 사용된 데이터 시각화는 뉴스젤리의 시각화 솔루션 DAISY를 이용하여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