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환(ㅍㅍㅅㅅ 대표, 이하 리): 선거는 어떻게 나오게 되셨나요?
박성수(송파구청장 후보): 제가 국회의원을 두 번, 2012년과 16년에 송파 갑에서 떨어졌어요. 숱한 고민을 했었죠. 소위 삼세판이란 말 때문에, 세 번째 도전을 해야겠다 싶어 원외 지역위원장 지위를 계속 유지했는데요. 문재인 정부의 정책을 기초단체에서 뒷받침할 필요도 생겼고, 송파가 강남 3구, 험지로서 우리 당에선 정치적인 의미도 크기 때문에 출마를 결심하게 됐지요. 송파는 18년간 계속 자유한국당 쪽에서 당선자가 나왔거든요.
리: 민주당에 2012년에 입당하셨어요. 선거 나오려고 입당한 느낌도 드는데요.
박성수: 그렇죠. (웃음) 제가 2005년 9월부터 2008년 2월까지 노무현 정부 청와대 법무비서관, 민정수석실 행정관으로 일했어요. 참여정부의 검찰 개혁 작업이 주된 업무 중 하나였는데, 사실 미완성으로 끝났죠. 그 후 검찰에 복귀했는데, 조금 나아지는 것 같던 상황도 이명박 정부에서 다시 권위주의, 검찰권 남용, 표적수사 등의 양태를 보이며 악화했기에 검찰에 남기가 심적으로 부담되는 상황이었죠. 그래서 사직을 하고 정치권에 입문했어요.
리: 왜 돈 잘 버는 변호사 하지 않고, 검찰에 계셨어요?
박성수: 파사현정(破邪顯正; 사악한 것을 부수고 사고방식을 바르게 한다)이라고 할까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에겐 사명감과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직업이죠. 영업 엄청 뛰어야 하는 변호사와 달리 직업적인 안정감도 영향을 줬죠.
리: 그러다가 참여정부로 들어가게 된 계기나 생각이 있다면요?
박성수: 2005년 9월 수원지검 검사로 재직 중에 청와대로 발탁되었어요. 그 당시엔 검사가 청와대로 파견되어 1~2년 근무하고 복귀하는 시스템이 있었으니까. 그 당시 노무현 대통령을 존경하기도 했기에 기쁜 마음으로 갔습니다.
리: 보통 검사라고 하면, 노무현 전 대통령을 싫어하는 경우가 많을 것 같은데요?
박성수: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나라 법조계는 사실 보수적입니다. 70~80% 이상은 그렇다고 봐요. 하지만 다 그런 건 아니에요. 저는 검사 생활도 했지만, 1980년대 초반엔 대학에서 군부독재에 저항하여 치열하게 살아왔던 경험도 있어요. 김대중 대통령이나 노무현 대통령 등 민주당을 계속 지지해왔기도 하고, 노무현 대통령 같은 경우엔 스토리도 있는 분이잖아요.
리: 어떤 스토리가 가장 매력적이셨어요?
박성수: 학력의 한계를 뛰어넘어서, 그 어려운 고시에도 합격하셨고요. 성적이 잘 나와 판사로 임용되었음에도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 변호 활동을 한다는 것도 쉬운 결단은 아니었을 것이고요. 인권변호사, 노동변호사로서 사회적 약자를 위해 활동하신 것도, 보통 사람이 걸을 만한 길이 아니죠.
리: 실제로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 공적으로, 사적으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을 텐데요. 어떤 모습이시던가요?
박성수: 행정관급에선 사실 대통령을 접할 기회가 거의 없어요. 이후 법무비서관으로 한 단계 승진을 한 후에 접할 기회가 몇 번씩 생겼죠. 노 대통령 부부가 비서관들을 불러 격려 오찬을 마련하신 적이 있는데, 국정 현안보다 기억나는 게 “박 비서관, 검찰로 돌아가면 왕따 당하는 거 아니냐, 날 도와줬던 것 때문에” 하고 농담을 섞어 말씀하셨던 거예요. 비서관 앞날까지 걱정해주시는 게 고마웠죠. 보통 비서관이 대통령과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비서실장, 장관 등 생각하면 그렇지 않거든요.
참여정부에서부터 이어져 온 검찰 개혁, 문재인 정부가 가야 할 길
리: 검찰 개혁이 당시 큰 이슈였잖아요. 성과에 대해서도 설왕설래가 많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박성수: 미완성이죠. 공수처(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나 검경 수사권 조정은 법률이 해야 할 일이에요. 검찰 권력 남용으로 인한 폐해가 많았기 때문에 강하게 추진했고 제가 그 실무를 담당했고요. 법안을 실제로 만들기까지 했지만, 국회에서 좌초된 거죠. 한나라당이 계속 반대했고, 검찰에서도 조직적으로 반대했고요. 미완성이란 표현을 쓴 까닭은 당시엔 실패했지만, 아직도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에요. 문재인 정부 때는 매듭을 지어야지요.
리: 검찰이 큰 반발을 했는데, 실제 검찰에 있던 입장에서 당시 참여정부안이 옳다고 보시나요?
박성수: 공수처 설치 법안은 그때나 지금이나 큰 틀은 비슷해요. 당시엔 기소권까지 주는 건 아니었는데, 지금 문재인 정부에선 더 강화해 추진하죠. 방향성이나 내용 면에선 옳았다고 봐요.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 때 이 개혁 방향이 성사되었다면 좋았겠지만 더 과거로 돌아가 버렸죠. 문재인 정부에서 더 강한 검찰 개혁 필요성을 초래한 것이나 마찬가지에요.
리: 우병우 등을 통해 터져 나오긴 했지만 이명박, 박근혜 내내 심각한 일이 많았어요. 어떻게 이런 게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일까요?
박성수: 제가 『검찰을 국민에게 돌려드리겠습니다』란 책을 쓰기도 했는데, 참여정부 시절 해왔던 검찰개혁의 기본적인 골격이 다 들어있는데요. 인사권이 법무장관, 민정수석에 있잖아요. 승진을 하기 위해서는 권력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어요. 검찰뿐 아니라 법원이나 일반 행정 부처도 사실 구조는 비슷해요. 그런데 검찰은 다른 행정 조직과 다르게 수사 권력을 행사하잖아요. 다른 기관에 비해 무섭다고 할까, 그런 게 있죠. 피해자도 많이 생기고요.
리: 피해자들이 지난 9년간 많이 생긴 것 같아요.
박성수: 사실 지난 9년간 과거의 박정희, 전두환 시대의 검찰로 회귀했어요. 기본적으로 검찰 조직이 상층부로 올라갈수록 보수적인 성향인 데다, 정권이 바뀌면서 청와대, 민정수석 선에서 인사권도 마음대로 행사했죠. 참여정부는 인사권을 중요 보직에 대해서만 상당히 제한적으로 행사하고 법무장관에 자율권을 줬거든요. 거기에 대통령의 정치철학도 달랐기 때문에 더 검찰권이 남용되지 않았어요.
리: 한 사람의 문제라기보다 사회 전체의 문제라고 보시는 것 같아요.
박성수: 시스템의 문제라고 보지만, 정점에 있는 권력자의 철학의 문제라 보기도 해요. 노무현 정부 때나 이명박 정부 때나 검찰 관련 법 제도는 크게 변한 건 없어요.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검찰권을 국민에게 돌려주고 간섭하지 않겠다고 천명하고 지켰던 분이에요. 그러다 보니 역설적으로 참여정부 시절 검찰권이 가장 강력했죠.
리: 와…
박성수: 불법대선자금 수사로 정경유착 뿌리를 뽑은 것도 그 시절 일입니다. 대통령 측근도 구속될 정도였으니, 검찰은 그만큼 국민적인 지지를 얻었고요. 그런데 이명박, 박근혜 정부 들어서면서 하명수사, 표적수사가 많았단 말이에요. 민정수석이 수사에 일일이 개입했다는 말도 들리고요. 아주 시시콜콜한 것까지요. 이로 인해 검찰권이 더욱 위축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리: 어떻게 보면, 검찰이야말로 검찰 개혁을 원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박성수: 검찰 전체를 정치검찰, 무소불위의 검찰이라고 보는 건 맞지 않는다고 봐요. 대형 사건을 수사하는 소수의 검사 행태가 그렇게 보였던 것이지, 대다수 검사는 거기 손도 대 보기 힘들어요. 서울중앙지검에서 일하는 게 보통 딱 한 번, 2년 6개월 정도인데, 거기에서 발탁이 되어 소위 잘 나가는 검사들이 생기죠. 특수 사건들을 계속 수사하다 보면 소위 대형 사건을 처리하게 되는 거고요. 거기 들어가는 검사는 많아야 5% 정도고, 나머진 밤새 야근하며 교통사고, 폭행, 절도, 명예훼손, 사기 이런 것들만 종일 처리하는 거죠.
리: 생각보다 일선 검사에겐 별 권한이 없는 것 같네요.
박성수: 검사동일체원칙(주: 검찰 조직은 총장으로 하는 하나의 유기체라는 원칙, 검사들의 자의적 권한 행사를 막기 위하여 존재)이 있어서, 총장을 정점으로 평검사까지 내려가잖아요. 수사는 검사가 하지만 결정권은 지휘부에게 있어요. 일반적인 사건은 일선 검사가 하지만 관심을 많이 갖는 사건, 소위 먹을거리가 많은 사건은 위에서 권한을 행사하기 마련이에요.
공천은 말 한 번 나오면 준다고 믿었던 순진한 정치신인의 첫 패배
리: 정계로 나와보니까 어떻던가요?
박성수: 사실 저는 강동 을에 전략공천 받는 걸로 알고 나왔어요. 보장된 건 아니었는데. 헛바람이 들었던 거죠. 민주당은 누가 전략공천 준다고 해서 실현되는 게 아니에요. 강동 을에 네 사람이 나왔어요. 공천 심사에선 1등이 되었는데, 경선에선 떨어졌죠. 민망했죠. 모르는 사람은 법무비서관 출신이라고 하니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선거 벽보도 못 붙여본 거 아니에요? 특히 집사람에게 무안하고. 당에서도 미안했는지, 송파 갑에…
리: 기왕이면 붙을 만한 곳을 줘야지, 두 번 죽이는 거 아닌가요.
박성수: (웃음) 전현희 의원이 먼저 얘기가 나왔는데, 본인은 강남을 지키겠다고 안 나오셨어요. 선거 캠프에 조언을 구했는데, 한 분만 빼놓고 다들 그래도 나가는 게 좋겠다고 찬성하시더라고요. 집사람도 찬성했고, 저도 경험 차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고, 공무원으로서의 습성이 남아 있다 보니 당 지휘부가 나름 배려해서 권유한 걸 거절하기도 어려웠고요. 정치를 어느 정도 알았다면 안 받았겠죠. 무모한 지역에 부딪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나와서 9% 차이로 깨졌습니다.
리: 그래도 선전했네요. 9% 차이면.
박성수: 예전보다는 선전했죠. 그 이후로 고민을 조금 했는데, 주변에선 강남·서초·송파는 어차피 안 되는 곳이니 빨리 떠나라고 권유하시는 분이 많았어요. 그런데 전 오기도 생기고, 워낙 지역위원장들이 떨어지면 떠나고를 반복하다 보니 주민들의 눈높이에 미치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어요. 여기에서 버티면서 발돋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고, 노무현 대통령의 정신과 가치를 배운 사람이 그렇게 쉽게 떠나는 건 맞지 않다는 생각도 했었죠. 그렇게 4년을 준비했는데…
리: 잠깐, 2012년으로 돌아가서요. 지금껏 인생에서 그렇게 쓰라린 패배를 한 경험이 없을 것 같은데. 연이어 2번, 그것도 승자 독식의 제도에서 패배했는데, 어떠셨어요?
박성수: 2012년도엔, 사실 경선까지 그렇게 치열하게 할 줄 몰랐어요. 정치를 그만큼 몰랐던 거죠. 예비후보로서 뛰어다니며 선거인단 모집하는데 너무 힘들더라고요. 괜히 나왔구나 싶기도 했고, 경선에서 7대 3 가까이 졌어요. 정치 초짜가 어떻게 이기겠어요. 집에 가서 집사람에게 승진 못 해도 평생 검사 하지 그랬냐며 핀잔 먹고. 그리고 나서 변호사 개업을 준비했는데, 당에서 송파 갑 지역을 권유하면서 딱 하루를 주더라고요.
리: 겨우 하루라니오(…)
박성수: 정치가 그래요, 무슨 한 달씩 주면서 생각해보라고 하질 않더라고요. 사실 본선에서 떨어졌을 때는 별 충격이 없었어요. 경선에서 이미 충격을 받기도 했고, 송파 같은 지역은 당 대표급이나 3선, 4선급이 나와야 될까 말까 할 지역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또 하다 보면, 지지층이 40% 정도는 되잖아요. 현장 가 보면 착각을 하게 돼요. 특히 젊은 계층은 기대감을 내비치며 꼭 되시라고 말씀을 해주시기도 하고. 뭣도 몰랐지만, 재미있게 했어요. 벽보도 한 번 붙였고, TV도 나왔고, 해단식도 멋있게 해 보고. 그리고 4년 후엔 해볼 만하겠다, 하는 착각을 또 한 거죠.
리: 2012년 대선 때도 활동하셨잖아요. 그때 기분은 어떠셨어요?
박성수: 그때 영화가 한 편 나왔었죠, ‘레미제라블’. 그 심정이죠. 저는 정치에 입문해서 꿈을 못 이루었지만, 문재인 후보를 통해 민주정부가 빨리 들어서길 바랐는데 상실감은 컸어요.
남들 다 이길 때 진 두 번째 선거, 지방 정치가 무엇인지 깨닫다
리: 그렇게 패배 후, 4년 동안엔 어떤 준비를 하셨어요?
박성수: 워낙 험지였던지라, 지역조직 자체가 유명무실했어요. 기본적인 조직조차 없어요. 하나씩 만들어가며 당 조직을 정비하고, 틈나는 대로 지역 사람들을 만나고. 2012년엔 대선 캠프에서 활동도 했고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온전히 올인해서 한 건 아닌 것 같아요. 변호사 일도 해야 했고, 원외위원장은 대접을 못 받는 경우도 많아서 힘들어요. 그래도 2014년 지방선거에서 송파 갑에서 구의원을 다섯 명으로 늘리는 등 성과도 냈어요.
리: 2014년 구의원이 그렇게 는 것을 보면 활동 꽤 많이 하셨나 봐요?
박성수: 저만의 활동은 아니지요. 송파 갑만 해도, 구의원 지역구가 3개 있어요. 나, 다는 두 명씩을 뽑아요. 그러니 두 곳은 1, 2당이 공천만 하면 되는 곳이죠. 그리고 가 선거구가 세 명을 뽑아요. 그러니 여긴 새누리당은 후보를 3명을 냈었어요, 다 붙을 걸 생각하고. 그리고 우리 당은 한 명만 내보냈어요. 사실 그 한 명은 선거기간 동안 해외에 나가도(…) 무조건 당선이 된단 말이에요.
리: 역시 새누리의 텃밭이군요(…)
박성수: 그래서 이번엔 세 명까진 아니어도 두 명을 내 보자 해서 두 명을 냈는데, 거기에서 두 명이 된 거예요. 비례대표까지 해서 다섯 명이 된 거죠. 그러니까 송파 을에서도, 3인 지역구가 한 곳 있으니 두 명을 내보내자 하며 두 명을 내보냈더니, 여기서도 두 명이 됐어요. 그러면서 우리 당 출신이 구 의장까지 됐어요.
리: 지역 정치를 배워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어떤 식으로 활동해야 승리할 수 있고, 더 나은 정치를 할 수 있다는 점을 배우셨나요?
박성수: 제일 중요한 건 지역을 돌아다니며 몸으로 부딪치는 것이죠. 동별 행사, 공청회, 주민과의 대화 같은 것이요. 또 지역에서 활동하는 모임을 접하며 인지도를 올려나가야죠.
리: 그런데 정작 본인은 2016년 또 떨어졌습니다(…)
박성수: 2016년에 패배했던 이유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점이 모자랐던 게 큰 것 같아요. 2016년엔 2% 차이로 떨어졌는데, 조금만 더 빨리 시작했어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또 1대 1 구도가 되었으면 이길 가능성이 높았는데, 국민의당 후보가 후보등록 마감일에 공천을 받았어요. 그리고 15% 가까이 얻었는데, 국민의당 바람이 호남에서 불면서, 호남 기반 표가 그쪽으로 많이 간 거로 보여요. 물론 구도적으로는 그랬다는 거고, 활동이 부족했던 게 아쉽죠.
리: 2016년의 경험으로부터는 어떤 걸 배우셨나요?
박성수: 답변을 드리기 전에, 사실 그땐 충격이 컸어요. 출구조사에서도 이기는 거로 나왔거든요. 그런데 할 말이 없었어요. 험지라는 부산, 경남에서도 많이 되고, 강남에서도 전현희 의원이 당선됐잖아요. 저보다 더 어려운 험지였으니. 같이 떨어지면 묻어갈 텐데, 자책감도 생기고. 몇 개월은 진짜 힘들었어요. 새벽에 갑자기 자다가도 깨고요.
리: 사모님은 뭐라 하시던가요?
박성수: 집사람은 뭐, 어쨌겠어요. (웃음) 남몰래 울기도 했겠죠. 그러다가 2016년 9월 되며 문 대통령이 슬슬 대선 준비를 하기 시작했고요. 저도 추스리면서 문 대통령 승리에 기여하자고 마음을 먹었고요. 세월이 약인지, 몇 개월 지나니 다 하늘의 뜻이구나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리: 문 대통령 캠프가 열리며, 어떤 목표 의식을 찾게 되셨나요?
박성수: 박근혜 정부가 탄핵으로 물러나면서 10년 만에 민주정부가 열릴 기회가 열렸잖아요.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선거였죠. 개인적으로 문 대통령과 각별한 인연이기도 했어요. 문 대통령을 비서실장으로 모셨고, 정치 입문할 때도 문 대통령과 상의해서 입문한 것이고요. 총선 때 후원회장을 문 대통령께서 해 주시기도 했어요. 문 대통령이 당 대표 시절 절 법률위원장으로 발탁하기도 하셨어요. 고영주 이사장이 문 대통령을 공산주의자라고 매도한 사건에 대해 제가 문 대통령의 변호인으로 활동하기도 했고요. 또 제가 지역의 사령관이니까, 지역에서도 활동해야 했어요. 우리 지역에서도 두 군데만 빼고 다 이겼어요.
리: 당선된 날은 기분이 찢어지셨겠어요.
박성수: 그거야 당연했죠. 낙선 후 상당 기간 어려운 시간을 보내다가, 대선이 빨라지면서 이런저런 활동을 하며 회복을 했죠. 무모하게 칠 전, 팔 전 할 순 없겠지만, 삼세판이란 말처럼 세 번은 해야 하지 않겠냐 하는 생각에 지역위원장을 유지했는데요. 우선, 지역에서 요청도 많았어요. 박성수가 나가야 승산이 있다는 얘기가 많았죠. 또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위해 기초단체에서도 정책을 뒷받침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서 지방선거에 출마하게 된 거죠.
리: 삼세번도 좋지만 이제 이 지겨운 선거 좀 그만두고 싶지 않습니까…
박성수: 그리고, 송파가 전국 기초단체 구 중 제일 커요. 68만 정도 인구가 있으니, 본인 하기에 따라 국회의원 못지않은 정치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선출직에 도전했던 사람이니 선출직에 계속 도전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개발에만 매달리는 송파를 넘어, 구민 모두를 위한 송파로
리: 송파는 큰 정도가 아니라, 앞으로 더욱 커질 곳인데요. 많은 문제가 터져 나올 텐데, 어떤 문제에 주목하시나요?
박성수: 송파가 사실 기본적인 인프라는 잘 갖춰진 곳이에요. 올림픽공원, 석촌호수, 가락시장, 탄천, 제2롯데월드… 그런데 지난 18년간 자유한국당에서 구청을 독점하면서 정체된 부분이 있어요. 가락시장 현대화 사업 문제, 잠실 운동장 국제 교류 복합지구 건설 문제, 성동구치소 부지 이전 및 사용 문제, 위례신도시가 들어서며 생길 교통 문제, 탄천변 개발 및 산책로 조성 문제 등 현안이 있죠. 조속하게 해결할 필요가 있죠.
리: 업적을 보는 관점이 다를 수 있어요. 어떤 사람은 건물을 높게 짓는 걸 업적이라 할 수도 있고… 후보님의 관점은 어떤가요?
박성수: 큰 틀에서 보면, 삶의 질이라고 봐요. 송파는 기본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고, 상대적으로 풍족한 분이 많이 계시지만, 서민, 비정규직 문제는 있습니다. 독거노인만 해도 1만 2,000명이나 되는데 그에 대한 체계적인 지원도 없고요. 송파 세 모녀 사건도 아시잖아요. 재건축, 소음, 미세먼지 문제 등도 있는데, 미비한 점이 많다고 생각해요.
리: 왜 이렇게 해결이 안 됐을까요?
박성수: 현 구청장은 서울시장과 다른 당이다 보니 엇박자 나는 게 있을 수도 있겠지만, 소통이 부족했다고 생각해요. 복지예산, 특별 교부금 등도 따와야 하고, 재건축처럼 서울시장까지 올라가야 할 문제는 구청장이 중간 통로가 되어야 하는데, 그런 점이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죠. 제가 여당 구청장이 된다면 그런 부분은 힘 있게 노력하겠다…
리: 그런 면에서 보궐선거 결과도 중요하겠어요.
박성수: 그렇죠. 국회 차원에서 예산을 따올 수 있는 것도 있으니까요. 우리 최재성 의원이 당선된다면 송파에 힘이 더 생기겠지요. 가락시장 현대화 사업도 원안과 많이 변경되어 2018년에 마무리되어야 했던 게 2025년까지 늘어났어요. 이런 부분이 주민의 뜻에 따라 진행되려면, 국회에서도 할 일이 많을 거예요. 물론 구청장이 이건 국회의 일, 이건 시장의 일, 이건 청와대의 일 하며 손을 놓아서도 안 되겠죠.
리: 송파가 발전이 빠르다 보니 재건축 문제가 많은데, 해결이 요원해 보여요. 구청장으로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박성수: 재건축은 국토교통부나 서울시에 결정 권한이 더 많긴 한데, 구청장이 관여하는 부분도 상당히 많아요. 재건축은 서울 전반의 문제지 송파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송파는 특히 아파트 단지 비율이 70%로 높아 재건축이 진행되거나 준비 중인 곳이 많아요. 구민들의 재산을 보호하고 이익에 부합되게끔 진행을 해야 되겠죠.
리: 구민 다수의 삶의 질이 증진되지만, 구민 일부가 삶의 터전을 잃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이를 어떻게 케어하시겠어요?
박성수: 정치, 정치인은 기본적으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아무래도 정치적, 정책적 혜택은 서민과 약자를 향해야 한다고 봅니다. 기초단체장을 비롯해 정치인들은 늘 갈등상황에 마주하게 되죠. 이때 서민과 약자를 우선하며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한 방향으로 갈등을 해결해야죠. 그럼 그때 또 피해를 보시는 분이 계시잖아요? 그럼 그분들을 위해 위와 같은 기준으로 끝없이 반복해서 나중에는 모두가 행복한 방향으로 갈등을 해결해야 할 것 같아요.
일자리, 교육, 건강, 삶의 질이 남다른 송파
리: 물론 생활환경을 전반적으로 향상시키는 정책도 필요하겠지만요. 정말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는, 어떻게 구체적으로 지원할 수 있을까요?
박성수: 생활환경 향상을 위해 여러 생활 시설도 만들어야겠죠. 그리고 저소득층에 대한 정책적 배려, 독거노인 관리나 청년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는 정책이 필요하겠지요. 제가 일자리 1위, 교육 1위, 건강 1위, 삶의 질 1위라는 4대 공약을 제시해요. 노인이나 청년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는 게 가장 역점이 되어야 한다고 봐요. 제가 직접 일자리위원장이 되어, 구직 단계부터 맞춤형 일자리까지 논스톱 서비스를 제공할 예정이에요. 취업사이트의 전문인력을 파견받아 지속적으로 창업, 구직과 관련해 컨설팅도 하고, 매칭도 할 거고요.
리: 교육 얘기를 해 볼게요. 경제활동 인구에게 가장 중요한 게 자녀교육 문제인데, 어떤 생각을 갖고 계세요?
박성수: 송파는 중산층이 많고, 30-40대가 두터워요. 교육에 대한 수요, 문화적 요구가 강하죠. 강동 송파 교육청과 업무협약을 맺어, 현장의 목소리를 직접적으로 들을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할 생각이고요. 1인 1특기, 1인 1예능을 하려고 해요. 이게 다 사교육비로 들어가거든요. 이걸 공적 인프라가 담당할 수 있어요.
리: 이 어마어마한 걸 공적 인프라로 감당할 수 있을까요?
박성수: 송파엔 인적 인프라가 우수해요. 예를 들어, 한국 체육대학과 체육진흥공단이 있어요. 건강 관련, 체육 관련 벤처기업을 육성함과 동시에 이런 자원도 활용할 수 있겠죠. 또 뛰어난 능력을 갖춘 경력단절 여성들도 있어요. 그런 걸 체계적으로 매칭시킬 수 있다면 획기적인 일이 되겠지요. 꼭 우리가 대치동 가서 배우고 해야 하는 게 아니에요. 특출나게 뭔가를 얻는 것도 아니거든요.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평균적인 교육은 공적 서비스를 통해 제공할 수 있다는 거예요. 우리 커뮤니티 안에서 품앗이처럼 제공하는 거죠. 이렇게 하면 일자리 문제도 조금은 해결할 수 있는 거고요.
리: 10년 후 쓰신다는 책이 자서전이 된다면 ‘나답다’ ‘박성수답다’란 걸 어떻게 정의하실 생각이세요?
박성수: 우청한서일희일비, 우청한서(雨晴寒暑)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고 묵묵히 지금을 사는 사람. 평범한,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나 공부 좀 잘한 덕에 좋은 대학 나와서, 대학 5년 동안 사법시험도 안 보고 소위 말하는 운동권 내에서 활동하다가, 결국은 진로를 바꿔서 느지막이 고시 공부를 하고… 그 당시 운동권에서 계속 활동하던 사람에겐 미안한 생각을 갖고 있어요. 검사 생활을 하면서 사회적인 혜택도 많이 누렸죠.
참여정부와 연이 있어 정치까지 하게 되었는데, 나름대로는 올바르고 정의로운 길을 살아오려고 노력했고, 한눈팔지 않고 의리와 신념을 지켰다는 자부심이 있어요. 송파를 함부로 못 떠났던 이유도, 비전이 안 보인다고 해서 벗어나는 게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죠. 이번엔 구청장에 꼭 당선돼야 할 것 같아요. 계속 패배하면 뜻을 펼칠 수가 없는 거니까.
리: 당선되어 뜻을 펼친다면, 지난 18년의 송파와 박성수의 송파는 어떻게 달라질 거로 생각하세요?
박성수: 지금 단계에서 공약을 구체화하는 건 한계가 있지만,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도시로 만들고 싶다는 꿈이 있어요. 송파의 잠재력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요. 이 꿈을 실현하기 위해 구청장으로 모든 것을 다 하고 싶어요. 송파 민선 1, 2기 때 김성순 구청장이 기본 토대를 다 만들어 놓았어요. 다만 인구가 너무 폭발적으로 늘다 여러 문제가 많이 일어났으니, 이를 잘 정비해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야죠. 대한민국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성공모델을 이 송파에서 찾고 싶어요. 송파에 산다는 데 자부심을 갖도록 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