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환(ㅍㅍㅅㅅ 대표, 이하 리): 창원에 애정이 정말 많으신 것 같은데요. 여기 토박이신가요?
허성무(창원시장 후보): 네, 1963년생 창원 토박입니다. 제 아내도 토박이고요. 거의 원주민들이지요(웃음)
리: 후보님이 초중고 다닐 때 창원은 어떤 이미지였나요?
허성무: 제가 어렸을 때는 창원이 창원군이었어요. 마산시가 상업과 어업, 공업 중심의 도시였고 창원군은 외곽을 둘러싸고 있었어요. 인구는 30~40만 정도였어요. 농촌이었고, 세 개의 면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창원면, 상남면, 웅남면. 그 세 개의 면 원주민 모임이 ‘삼원회’라고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제 집사람이 거기 멤버예요. 저는 원래 마산시 진전면 출신이고요. 거기가 과거에는 창원군이었습니다.
리: 어릴 적 창원에서 학교 다니실 때는 어떤 학생이셨습니까?
허성무: 매우 평범했어요. 공부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하는 학생이었고요. 그러다 부산대 행정학과에, 원래 82학번인데 83학번으로 들어갔어요. 그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잘 알잖아요? 엄혹한 전두환 군사정권 시대였죠. 박정희 정권 못지않았고, 오히려 더한 면도 있었어요.
리: 그런데 가자마자 운동권…
허성무: 과에서 학회 활동하면서 자연스럽게 운동권 학생이 되었죠. 책 읽고 토론하고 그랬죠. 예를 들면 ‘전환시대의 논리’라든가 ‘우상과 이성’ 같은 책들이 가장 기초적이고, 철학책도 많이 읽었어요. ‘철학의 기초’ 같은 책이요. 사회과학 서적들도 읽고 토론하고 그랬죠.
리: 미문화원 점거에 참여했을 때, “이걸 하면 나는 감옥에 가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이 없었나요?
허성무: 두려움은 당연히 있죠. 그때 학생운동 조금만 앞장서도 대부분 다 감옥에 갔으니까(웃음) 그런데 우리는 과거에 미국이 세계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키는 경찰국가라고 생각했잖아요? 5·18이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는데, 그때만 해도 부산에 무슨 항공모함이 들어온다, 미군이 들어온다, 이러니까 안심했거든요. “우리나라가 좋은 민주주의 국가가 되겠지”하고. 그런데 전혀 그런 게 아니었어요. 그런 미국이 광주 민주화운동 때 전두환 군사 신군부가 학살을 자행하는 것을 막지도 않고 오히려 지원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1980년대 많은 학생이 미국 대사관이나 영사관, 문화원에 가서 “미국은 전두환을 지지하지 말라”, “전두환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라”, “심한 경우에는 미국은 돌아가라” 이런 말까지 하게 되었죠.
리: 어떤 고문을 당했어요?
허성무: 칠성판 고문이라는 게 있어요. 왜 이걸 칠성판이라고 하냐면요, 관뚜껑을 칠성판이라고 불러요. 사람이 죽어 시신이 되었을 때 염을 하잖아요? 마치 그것처럼 사람을 칠성판에 뉘어놓고 줄로 온몸을 꽁꽁 묶습니다. 머리는 묶지 않고 수건을 얹어요. 그리고 그 위에서 주전자로 물을 계속 붓습니다. 그다음에 잠을 안 재웠고요.
리: 그 과정에서 노 대통령을 만나신 거죠?
허성무: 사실 저에게는 첫 만남이 아니었어요. 1년 전에 처음 뵌 분이었죠.
부산 민주화의 중심 ‘노무현’을 만나다
리: 어쩌다가 노 대통령을 만난 거죠?
허성무: 제 선배들이 구속되어서 재판에 갔다가 잠시 뵌 적이 있습니다. 그때 굉장히 울분에 차서 정권을 비판하고 계셨어요.
리: 오, 법정에서요?
허성무: 법정에서도 그랬고, 마치고 나와서 변호사 사무실에 갈 때 몇몇 사람들이 그분을 따라갔어요. 저도 그때 갔는데, 변호사님이 굉장히 강하게 정권을 비판하셨어요. 그때 이미지가 굉장히 강렬하셨어요. 그리고 그로부터 1년 후 제가 구속되었을 때 다시 노 변호사님을 뵙게 되었죠. 그때랑 똑같은 분이셨어요.
리: 강렬하다는 것은 어떤…?
허성무: 변호사들은 대개 좀 점잖게 표현하려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분은 독재정권을 직설적으로 비판하시고, 강하게 저항하셨어요. 그래서 굉장히 믿음이 갔어요. 단순히 인권 변호사라서 너희를 잠시 걱정해준다 이런 게 아니라 동지라는 느낌이 들 정도의 모습을 보여주셨어요. 그래서 굉장히 신뢰가 컸죠.
리: 그때부터 연이 시작된 거군요?
허성무: 네. 그렇게 하고 1987년 6월 항쟁이 일어나잖아요? 그래서 본인은 못 오시고 문재인 변호사께서(웃음) 구치소로 접견을 오셨죠. 제 이야기도 듣고, 설명도 하다 그렇게 가셨죠. 가신 후에 저희는 고등법원에 항소해서 대구 구치소로 이감이 되었습니다. 그때 이미 사상 적폐 투쟁이 밖에서 일어난 상황이었어요. 최루탄이 구치소 안까지 날아 들어오는 상황이었지요.
리: 이야, 경상도도 어마어마했네요?
허성무: 부산이 어마어마했죠. 마산도 마찬가지고. 서울보다 더 격렬했어요.
리: 경남이 서울보다 격렬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네요. 아무래도 1987년 항쟁은 화이트칼라의 혁명이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되잖아요? 그런데 어쩌다 부산경남 운동이 치열했던 거죠?
허성무: 그 중심에 노무현이란 사람이 있었죠.
리: 그때부터…
허성무: 네. 부산지역의 민주화운동, 학생운동 세력 전체가 노무현이라는 구심을 통해서 계속 결집했던 거죠.
리: 오, 그렇군요…
허성무: 네. 워낙 폭압적인 상황이니 사람이 소극적 투쟁을 많이 하잖아요? 부산에도 다른 인권 변호사님들이 많았지만 현장에서 가장 격렬하게 적극적으로 저항하고 투쟁했던 건 노무현 변호사입니다. 그러다 보니 87년 항쟁 때도 부산의 중심이 노무현이 되고, 노무현 변호사 옆에는 문재인이 항상 서 있고, 그렇게 되었던 거죠.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고 문재인이 대통령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1980년대 폭압적인 상황에서 가장 앞에서 맞서 싸운 사람들, 그 과정이 계속 축적되고 누적된 결과로서 그런 지도자들이 탄생하게 되었던 거지요.
리: 30년 전부터 전부 이어져 오는 거군요?
허성무: 그렇죠. 지도자는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김영삼과 김대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신군부의 세력으로 떠올랐던 전두환과 노태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떠한 정치 권력이 중심이 되어 한 세대에 등장하는 데에는 오랜 배경이 있습니다. 그 권력이 부당한 것이라면 대부분 저항해서 무너지게 되는 것이고요.
노무현의 바로 옆에서 ‘노풍’을 예측하고 함께한 사람
리: 운동이 끝나고 나면 사람들이 갈등을 하잖아요? 여러 길이 있었을 텐데, 뭐 때문에 어떤 길을 선택하게 되셨나요?
허성무: 저는 87년 8월 말에 감옥에서 나왔습니다. 나오자마자 바로 복학했어요. 그래서 민주화 복학생동지회를 만들어서 학내에서 학생운동을 했어요. 마침 87년 대통령 선거가 있었는데 그때 ‘공정선거 감시본부’ 체제로 넘어갔습니다. 그때 노무현 변호사님이 부산 본부장이셨는데, 제가 그 밑에서 교육실무자를 맡아 여러 일을 같이했죠. 법정에서와는 달리 굉장히 온화하고 인자하고 차분한 분이셨어요.
리: 같이 일하다 보면 여러 일이 생기는데, 혹시 생각나는 에피소드 있을까요?
허성무: 몇 가지 있죠. 선거운동 할 때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부산 초량동 선거사무실 밑에 메인 도로가 있었고, 저 산동네까지 걸어 다녀야 하는 구조였어요. 주민 몇 분께서 도로를 뭐 어떻게 해달라 이야기를 하니까, 변호사님께서 단호하게 그러시는 거예요.
저는 그런 거 하려고 국회의원 나온 사람 아닙니다. 그런 건 구청에 이야기하세요. 나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나온 사람입니다. 그런 일 시키려면 저 찍지 마시고, 큰 정치 시키려면 저를 찍으세요.
리: 어이구;;;;;;
허성무: 깜짝 놀랐습니다. 많은 사람이 “저 사람 뭐하나” 했죠. 저도 후보를 해봤지만 유권자들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기 힘들거든요. 참, “노무현답다” 그런 생각을 했죠. 그렇게 1988년 노 대통령님이 국회의원 선거 당선될 때 자원봉사 팀장을 했습니다.
리: 본인께서는 어떻게 정치를 하게 된 건가요?
허성무: 뭘 할까 고민했어요. 그때 제 나이가 26살이었고, 졸업하니 27살이더라고요. 경제적으로 독립을 해야 하잖아요? 그러니 고향으로 다시 돌아갔어요. 처음에는 할 일이 없었어요. 먹고 살아야 하는데 취직도 잘 안 됐어요. 전과자니까(웃음) 고민고민하다 친구의 권유로 이런저런 사업을 했어요. 입시학원을 열어서 지역에서 제일 잘 나가는 학원으로 성장시켰어요.
리: 많이 벌었겠네요?
허성무: 그런데 정치하다 다 까먹었어요.(웃음) 그러다 노무현 국회의원이 종로에서 내려와서 경상남도 지부장을 하다가 2000년 출마합니다. 그러고 낙선했죠. 그해 여름에 보자 하시더라고요. 부산에 사상시외버스터미널 앞 드래곤 호텔인가, 파라곤 호텔인가 거기 커피숍에서 만났을 거예요. 본격적으로 나 좀 도와줄래? 그렇게 대통령 경선 준비를 시작한 거죠. 2000년 가을부터 했습니다. 그렇게 창원 경선팀장을 맡았죠.
리: 당선 과정이 되게 드라마틱했는데, 어떻게 해서 노풍이 불었다고 생각하세요?
허성무: 우리는 처음부터 노풍이 불 거라 예상했습니다.
리: 왜요? 완전히 ‘이인제 대세론’이었는데.
허성무: 대세론이라는 것은 완전히 상층정치 중심의 이야기예요. 물론 상층정치가 중요하긴 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국민들에게 흐르는 민심의 바다를 캐치하는 일이에요. 이인제 의원은 상층정치에는 적합할지 모르겠지만 대중들로부터의 큰 지지를 받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노무현 의원님께는 그런 게 있었죠.
리: 흐음…
허성무: 구조적으로 호남의 표만으로는 대선을 이길 수 없어요. ‘호남의 표에 영남 표 30%를 가지고 올 수 있는 후보만이 대선에서 이길 수 있다’라는 게 그때 30대 중·후반이었던 제 계산이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그런 계산은 못 했어요. 호남은 오랜 핍박과 억압 속에서 가진 열망이 있고, 영남에는 고통받았던 민주화 세력이 있어요. 부산, 경남, 울산, 대구, 경북 다 있죠. 그 세력들이 당시 노무현 후보님 중심으로 뭉칠 수 있었던 거예요. 후보님에게는 그런 절묘한 상품성이 있기 때문에, 전 이미 그때도 뭉칠 거라고 확신을 가졌던 거죠.
노무현의 의지를 계승한 남자, 편한 정치를 버리고 창원에 뼈를 묻다
리: 아주 핵심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노무현 대통령님과 친밀한 관계셨을 텐데, 창원을 떠나 중앙에서 편하게 정치해야겠다 그런 생각은 없었나요?
허성무: 그렇게 하게 되면, 노 대통령이 이루고자 했던 ‘지역주의 극복’이나 ‘지역 차별 타파’ 이런 것이 안 되잖아요? 어쨌든 여기서 국회의원이 되든 시장이 되든 당당하게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야 당만 보고, 색만 보고 정치하는 게 아니라 정책과 미래를 보는 시대를 열 수 있다고 말이에요. 진정한 동서화합, 정당 간의 제대로 된 경쟁, 지역에 의한 선거가 아닌 정책과 비전, 인물에 의한 선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여기를 떠나는 순간 그걸 포기하게 되는 거잖아요. 그런 건 해서는 안 되는 거죠. 그래서 여기를 떠나야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리: 음…
허성무: 제가 2006년에 청와대 비서관으로 갔을 때요, 저를 아끼는 사람들이 충고 많이 하더라고요. 창원 집을 팔고 서울에 집을 사라. 그때는 서울 집값이 창원 집값과 크게 차이가 없을 때였어요. 세월이 지나면 엄청난 차이가 생길 거다, 여기서 적당하게 지역구 하나 잡아라. 그분들은 진심으로 저 개인을 아끼는 분들이죠. 하지만 저는 한 번도 그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적이 없어요. 이 지역을 떠나서 청와대 비서관 갈 때도 가족들은 다 여기 있었습니다. 저는 주말에 창원에 내려왔다 올라가곤 했죠.
리: 지금이야 세월이 지났다고 하지만, 당시에는 이길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희귀하던 세월 15년을 보냈잖아요? 그런데도 승리할 수 있을 거라 어떻게 확신하셨나요?
허성무: 저는 항상 이길 수 있다고 생각을 해왔습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어렵죠. 하지만 나가서 열심히 싸우면 우리 표를 어느 정도 모으고, 세력을 모아 나가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어요. 우리 지역 내에서 우리보다 더 힘든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가끔 나타나요. 그런 분들에게도 그런 이야기 합니다. 당신은 힘들겠지만 당신이 거기서 계속 출마해야 우리를 지지하는 유권자들이 찍어줄 데가 생긴다, 당신이 포기하면 지지자는 다 흩어진다, 계속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된다, 세상은 그렇게 바뀐다…
리: 어떻게 보면 참 긴 세월을 당에 바친 것이기도 하네요. 그런데 당이 되게 굴곡이 많았잖아요? 특히 열린우리당 이런 거 생각하면… 지금이야 더불어민주당이 굉장히 강한 정당으로 보이지만, 그 힘든 세월 동안 당이 본인에게 어떤 것이었길래 힘을 당에 계속 바칠 수 있었을까요?
허성무: 사람들이 당 욕 많이 해요. 우리 당원들도 자주 하고, 특히 우리 당에서 정치 하다가 잘 안 된 사람들이 많이 하죠. 그런데 당에는 실체가 없습니다. 당에 소속된 한 명 한 명이 다 실체일 뿐이에요. 그러니 당을 욕하는 사람들은 제가 봤을 때는 당원자격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에요. 그 당은 당을 욕하는 스스로가 만들어야 하는 것이거든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리: 그렇게 말씀하시기에는 노회찬 의원과의 단일화가 너무 억울하지 않았나요-_-?
허성무: 아 정말… 그때는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었죠.
리: 그 결정에 왜 따른 거죠?
허성무: 그렇게 해야만 우리가 이길 수 있기 때문에. 내가 굉장히 힘들고 어렵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어요.
리: 일방적으로 희생한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허성무: 그 순간에는 들었습니다. 정말 기분 나쁘고 짜증 나고 분통 터졌는데… 구조적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어요. 미래에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문재인 전 대선후보가 단일화와 연대에 앞장서시는데, 제 개인의 이익 때문에 거부하면 문제가 있을 거라 생각했죠.
리: 경남 일대가 조금씩 민주당의 힘이 커지잖아요? 그런데 우리 당이 여기를 잡았으면 더 좋았겠다, 과거에 그런 상황이 있었을까요?
허성무: 2010년 지방선거 때 좀 더 많이 출마했으면 어땠을까 싶어요. 더 많이 당선되었을 것 같거든요. 다들 두렵다 보니 권유해도 출마를 잘 안 해요. 지난번 지방선거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출마를 안 하려고 하더라고요. 제가 봤을 때 지역구 나가면 다 당선되게 되어있는데… 애초에 기초의원은 2명 내지 3명을 뽑아요. 그래서 나가면 우리 후보가 무조건 당선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조차도 두려워서 안 하더라고요. 그래서 굉장히 아쉬웠어요. 저 혼자 파란 옷을 입고 나가는데 주변에서 빨간 옷들이 에워싸는, 그런 구도에서 선거해야 했으니 힘들었죠.
소통과 미래가 없었던 새누리의 창원, 더민주 허성무의 창원은 다르다
리: 문재인 대통령의 혁신이 지난 총선부터 당 구조를 많이 개선했습니다. 노무현과 문재인 대통령은 어떤 존재로 남아 있죠?
허성무: 인간적으로나 스킨십으로나 훨씬 가까웠던 건 노무현 대통령이셨죠. 물론 문재인 대통령님도 변호사 시절에 만났고, 저를 위해서 애써 주신 적 많지만 노무현 대통령님은 성격적으로 저랑 닮은 부분이 많으셨어요. 제가 부족한 부분을 가지고 계셨죠.
리: 두 사람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어떨까요?
허성무: 문재인 대통령은 내유외유 형이다. 안으로도 부드럽고 밖도 부드러운데, 자기 입장은 강하게 가져가는 분이다. 반면에 노무현 대통령은 내강외강 형이다. 사실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서는 내유외유라고 해도 말이 되고 내유외강이라고 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님은 내강외강이셨죠.
리: 이번엔 다른 당으로 화제를 확 돌리죠. 최근에 ‘홍준표 빨갱이’ 발언으로 창원이 다시 한번 유명해지고 있습니다… 홍준표 대표랑은 어떤 관계세요?
허성무: 홍준표 대표가 도지사일 때, 제가 경상남도당 위원장이었어요. 그래서 진주의료원 폐쇄, 무상급식 폐지, 이런 의제가 나올 때마다 계속 대립했던 관계입니다. 어쨌든 저는 홍준표 지사가 도지사가 되기 전 김두관 지사 때부터 정무부지사를 지냈기 때문에 도정에 관해서도 여러 내용을 잘 알아요. 그래서 대립할 수밖에 없는 관계였죠.
리: 진주의료원 말이 나오니, 어마어마하게 대립했을 거라 짐작되는군요…
허성무: 네, 그때는 정말 밤샘 노숙도 하면서 싸웠죠.
리: 관계가 아무래도 좋을 수가 없겠네요.
허성무: 개인적으로 안 좋다기보다는, 정치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는 관계죠. 기본적인 철학이 아예 다르기 때문에… 그분이 진주의료원을 폐쇄할 때 주장했던 주 논리가 ‘진주의료원이 강성귀족노조 좌파의 근거지가 된다’ 이런 거였어요. 말이 안 되는 거죠. 보건복지부 조사에도 나와 있지만 그 병원의 문제는 너무 외진 곳으로 이전해서 외래환자가 거의 오지 않는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병원을 바깥쪽으로 이전시키면 다시 환자가 올 수 있었어요. 주 책임자는 이전의 의사 정책 담당자들이었던 거죠.
리: 그렇다면 후보님은 어떻게 해결하려고 하셨죠?
허성무: 계속 얘기했어요. “강성노조에 대한 책임은 잘못된 이야기다, 노조에 원인이 있다면 고작해야 5%, 10% 이하일 것이다. 오히려 경영진과 도의 책임이 더 크다”라고… 그리고 진주의료원 자체도 노인요양 전문병원 등 특성화 병원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실제로 그런 대안도 모색되던 중이었어요.
리: 창원시의 1년 예산이 어느 정도 되죠?
허성무: 약 3조 정도 됩니다.
리: 시 급으로는 무진장 크네요.
허성무: 네. 인구도 106만 가까이 되고요, 면적은 서울보다 1.16배 큽니다.
리: 만약 창원에서 의원이 되었거나 시장이 되셨으면 지금 창원의 모습과 어떻게 다를 거라고 생각하세요?
허성무: 지금처럼 창원이 이렇게 어렵지는 않았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공단의 구조고도화도 제가 굉장히 강력하게 밀어붙였을 거예요.
리: 조금만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세요.
허성무: 우리 공단이 어려워질 거라고 다들 예견했단 말이죠. 그렇다면 더 어려워지기 전에 어떻게 활성화할 것인가 고민했어야 해요. 조선기자재가 어려워질 건 다 예상하는데, 어떻게 다른 산업과 활성화할 준비를 해야 하는가? 저는 이미 많은 고민이 있었기 때문에 더 역동적으로 대비했을 거예요.
“머릿속에 다 있어요”: 창원의 발전 계획은 모두 세워 두었다
리: 지금도 계속 어려워지는 중인데, 현재로서는 어떤 대비책을 생각해두고 계신 건가요?
허성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기존 산업의 혁신을 통한 구도화, 경쟁력 강화가 필요해요. 기존에 주목받지 못한 산업을 좀 더 혁신하고 마케팅도 도와서 해외수출을 노려야 해요. 특히 방위산업이 그렇습니다. 남북관계가 좋아지니까 방위산업 쪽 주가가 빠지잖아요? 그런데 결코 그러면 안 되거든요. 평화의 시대에도 방위산업은 돌아갑니다. 주변국의 침략에 대비해 열심히 훈련해야 하고 안보를 지켜야 해요. 더 큰 미래로 가는 안보죠. 해외수출도 많이 해야 하고, 방위산업 부분의 케파(생산능력)도 두 배 이상 키워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최종적으로 방위산업과 4차 산업의 결합을 노리는 거지요.
리: 뭔가 정부 예산을 엄청나게 따와야 할 것 같은데요? 어떤 식으로 정부 예산을 어디에 쓰겠다 하는 그림이 있나요?
허성무: 예를 들면, 정부와 창원시에 방위산업의 강소기업을 육성하는 센터를 만들 겁니다. R&D센터도 만들고요. 시 자체로는 행정지원센터를 만들어서 해외 수출할 때 필요한 마케팅 전문가를 고용할 겁니다. 방위산업의 마케팅은 독특하거든요. 그걸 잘할 수 있는, 각국 대사관에 근무했던 사람들을 창원에 불러서 로비스트로 일하도록 지원한다는 방안이 있습니다. 국내에서도 국방과학연구소나 방사청과의 관계를 계속 가져가야 해요. 하지만 개별 간의 좋은 관계를 계속 가져가기는 어려워요. 그러면 시가 나서서 기관과의 관계에서 문턱을 낮춰주는 거죠. 제 머릿속에는 모든 계획이 다 들어있습니다.
리: 일이 잘 되면 그렇게 되겠지만 안 된다면요? 예를 들어 GM 같은 경우는 정말 복잡하잖아요?
허성무: 복잡하죠. 하지만 GM은 우리 당에서 특별위가 조직되어 있습니다. 저도 특별위원 중 하나입니다. 적어도 지역 문제는 풀어냈죠. 창원 같은 경우에는 8,000억 이상을 10년간 투자할 거예요. 새로운 자동차 모델을 창원에서 2026년부터 생산하게 하고요. 이런 것들이 다 계획에 나와 있습니다.
리: 이런 식으로 다른 기업의 적극적인 투자를 이끌어 내는 건가요?
허성무: 그렇습니다. 지자체가 적극적으로 나서면 기업이 굉장히 편합니다.
리: 하지만 산업구조적으로 전통제조업이 계속 잘 나갈 수 있을까요?
허성무: 근본적으로 창원공단이 들어선 지 40년이 훨씬 지났습니다. 그러다 보니 과거의 제조기술에 의존하는 경쟁력이 약화한 거죠. 그 사이 중국도 컸잖아요? 기술집약형의, 원천기술 중심의 그런 기업으로 재편되어야 하는데, 그런 노력이 부족했던 기업들은 전부 지금 어려움을 겪고요. 노력해서 뛰어난 기술을 확보한 기업들은 여전히 잘 나갑니다.
리: 일례로 어떤 기업이 있을까요?
허성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주)부경이라는 기업이 있어요. 항공기 부품을 만드는 회사예요. 굉장히 정밀한 기술을 가지고 있죠. 작은 기업에서 시작해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자기 경쟁력과 끊임없이 혁신하는 정신으로 여기까지 왔어요. 그에 비해 단순 하청, 기술에 의존하던 기계부품 산업들은 어려움을 겪는 것이 사실이고요.
리: 말씀하신 부분을 많은 지자체에서 이야기하는데, 정부 차원이 아니라 시 차원에서 어떠한 지원이 가능할까요?
허성무: 시 차원에서는 한계가 있는 게 사실입니다. 대한민국은 중앙집권 국가니까요. 분권해서 자치한다 해도 껍데기뿐입니다. 하지만 찾아보면, 지방정부가 할 수 있는 것도 많습니다. 기업이 기술을 개발할 때 지방 차원에서 4년간 협력 체제를 구축할 수 있도록 돕고 운영자금이나 기술개발자금 일부를 지원한다든지, 중앙정부의 자금을 기업이 많이 쓸 수 있도록 행정 지원을 해준다든지, 기업이 마케팅하는 데 지방정부가 도와준다든지 하는 방법이 있어요.
리: 호오…
허성무: 예를 들어, 제가 경상남도 정무부지사를 할 때 일입니다. 경상남도에 있는 항공부품 기업들 있죠? 이 기업들이 미국의 보잉사를 방문한다고 할 때 방문단을 만들어 주고, 경비를 보조해주고, 그쪽에서 연결해서 스케줄 조인을 시켜줍니다. 또 반대로 보잉의 구매담당 팀 전체를 경상남도에 초청해서 우리 항공기부품 회사와 단체로 미팅을 시켜줍니다. 물론 미팅 장소라든가, 밥값이라든가 하는 것은 경상남도에서 지불하죠. 그렇게 현장에서 이 사람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부품을 제대로 생산할 수 있는지 기술력과 설비력, 인력 등을 확인하는 거죠. 이런 것들을 제가 정무부지사일 때 경상남도에서 다 했습니다. 창원시도 그런 걸 똑같이 할 수 있어요.
마·창·진, 원팀으로의 개성 있는 발전
리: 굉장히 문제가 많이 되는 게 마산 해양신도시 쪽인데,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실 건가요?
허성무: 마산 해양신도시는 공론화 과정을 거칠 겁니다. 위원회를 만들어서 시민들과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논의할 거예요.
리: 공단문제에 대해서는 늘 적극적으로 밀어붙이는 편이셨는데, 왜 이쪽은 천천히 공론화하실 생각인가요?
허성무: 시민들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에요. 우선 시민들의 의견을 모으는 것이 일의 추진력을 확보하는 길입니다. 이 일은 사실 정부 책임도 있다고 보거든요. 그래서 정부에서 지원이 내려올 거고, 경상남도의 지원도 따내야 하고, 창원시도 직접 투자할 거예요. 어쨌든 국가와 정부와 시의 공익자본으로 이끌어 가야 하는 문제가 맞아요. 민간에 넘겨버리면 완전히 아파트 숲이 되어서 망쳐 버리거든요. 그래서 주거 아파트는 되도록 들어오지 않게 할 거예요. 들어오더라도 최소화할 거고요. 어쨌든 친환경적이고 친 4차 산업적으로 미래로 가는 스마트 도시로 발전하는 게 제 목표입니다.
리: 광역시는 좀 힘들다고 봐야 하나요?
허성무: 광역시는 애초에 안 되는 거죠.
리: 세 개의 도시가 합쳐지면서 불만도 많고 갈등도 많은 것 같은데, 이 세 군데를 어떻게 잘 엮어서 발전시킬 생각이세요?
허성무: 4년 전 선거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각 도시 발전에는 역사와 특성이 있습니다. 마산은 처음에 상업항으로 개항한 곳이에요. 그 상업항으로부터 수출이 들어오면서 발전한 도시예요. 진해는 군항으로 발전하였고, 창원은 기계공업과 중공업 도시의 산업단지로 발전했죠. 각자의 특성이 다 다릅니다. 그걸 극대화해서 발전시키는 전략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각자의 역사와 특성을 존중하면 자연스럽게 잘 되게 되어있어요.
리: 창원 쪽은 공단으로 이야기가 많이 된 것 같고… 나머지 둘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이세요?
허성무: 진해 같은 경우, 진해 서부지역은 우리 근대 최초의 계획도시라고 불러도 되거든요? 로터리를 중심으로 하는 방사형의 계획도시입니다. 일제가 만들었죠. 근대문화유산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거길 중심으로 관광중심도시를 만들 수 있어요. 동부지역은 우리나라의 관문인 신항이 있어요. 신항은 배후 공업인 물류 등이 중요하거든요. 이 신항을 중심으로 대한민국 최고의 성장 잠재력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니 물류 상업 중심으로 발전시키면 돼요.
리: 마산 같은 경우에는 어떻게 할 계획이신가요?
허성무: 마산은 오래된 전통 도시잖아요? 문화와 예술, 전통 상업. 그리고 전국 최대 규모의 어시장이 있어요. 제가 봤을 때에는 이 어시장이 자갈치시장을 넘어서는 수준입니다. 활어센터가 있으면 건어물 가게가 있고, 해안 쪽에는 장어 골목이 따로 있어요. 그 뒤에는 복집 골목이 따로 있고, 아귀 골목도 따로 있고… 종목별로 특화된 대규모의 어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상권입니다. 이 상권의 매출을 두 배 이상으로 올릴 계획입니다. 그러려면 손님이 지금보다 두 배는 많이 와야겠지요?
리: 어떻게요?
허성무: 볼거리를 만드는 거죠. 사람을 모으기 위한 여러 축제와 시설을 넣어야 해요. 지금보다는 도시 한가운데 작은 섬에 좀 더 많은 사람이 오게 만들 거예요. 그 섬에 온 사람이 어시장에서 구매하는 구조를 만드는 거죠. 또 해양신도시가 생기면 거기에 구조 또는 업무, 관광 등으로 오시는 분들이 어시장에서 많은 소비를 할 수 있게 만드는 구조를 제작할 거예요.
모든 공약은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
리: 나중에 자서전을 하나 쓴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안에서 ‘허성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다,’ ‘허성무답다 하는 건 어떤 거다’라고 쓴다면 어떻게 쓰실 것 같아요?
허성무: ‘허성무는 정치적으로 요란한 사람은 아니지만 굉장히 성과를 잘 내고, 진실로 지역의 시민들에게 잘해서 삶의 큰 도움이 된 사람이다.’ 그렇게 기억에 남고 싶습니다. 정치적으로 요란해서 인기 있는 사람보다는 시장을 하고 부지사를 하고 청와대 비서관을 하면서 내 삶에 구체적으로 도움을 준 사람으로 남고 싶어요.
리: 공약이 굉장히 많은데, 그중에서 정말로 이거 하나는 꼭 해내야겠다고 생각하는 하나는 무엇일까요?
허성무: 다 꼭 해야 됩니다. 그게 다 어우러져서 잘 돼야지만 시민들의 삶에 구체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이니까요. 마산자유무역지역공단, 봉암공단, 어시장경제 같은 것들이 전반적으로 살아날 수 있는 거시적인 일도 해야 하지만, 우리 아이들이 입학할 때 교복 입혀서 보내는 것이라든지 급식을 잘 먹게 한다든지 장애인들의 불편을 해소하고 행복하게 해준다든지 하는 미시적인 일도 해야 해요. 큰일부터 미시적이고 대상이 구체적인 작은 일까지 모두가 잘 어우러져야 합니다.
리: 장애인, 학생까지 하나하나 다 꺼내시는 걸 보니까 복지도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쓰시는 것 같아요.
허성무: 그렇죠. 복지 따로 있고 경제 활성화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큰 것도 작은 것도 다 잘해야 해요.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어요. 시의 행정이나 도의 행정 모든 것을 종합해야 합니다.
리: 당선이 된 다음에 4년 후를 그려 보죠. 허성무의 창원은 어떻게 바뀌어 있을까요? 사람들이 어떻게 이야기했으면 좋겠어요?
허성무: 딱 한 마디만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이 바뀌니까 이렇게 확 바뀌네” 이거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종일 선거운동하고 집에 가면 전화가 막 울려요. 말도 잘 안 나오지만 전화를 받아요. 다 씻고 누웠는데 얼굴 보러 나오라고 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래도 나가죠.
리: 으으… 생각만 해도 힘들 것 같은데요.
허성무: 저는 시장을 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부르면 빨리 달려갈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시장이 되고 싶어요. 문턱 높은 시장실이 아니라 문턱 낮은 시장실이 되었으면 좋겠죠.
리: 어떻게 보면 소통인데, 그걸 활성화할 방안도 생각해두신 건가요?
허성무: 마음만 열어두면 언제든 됩니다. 제가 부지사 할 때 추운 겨울 빼고는 방문을 매일 열어놨습니다. 그러면 일이 있어 오시는 분들은 언제든 제 방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리: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여쭤볼게요. 지금까지 인생 굴곡이 좀 있는데, 어떤 선택이 나에게 있어 가장 중요했던 것 같나요?
허성무: 어쨌든 젊은 시절에 민주화 운동을 한 것. 그다음에 제일 잘 한 건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선거 나가신다고 하셨을 때 적극적으로 결합해서 도와드린 것. 그것 덕분에 좀 더 나은 대한민국, 미래로 가는 대한민국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데이터 시각화로 알아보는 ‘창원시’
창원시의 구별 연령 인구수를 살펴보면 골고루 인구가 나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창원시 마산 합포구의 경우 유소년, 생산가능인구가 가장 적었지만 65세 노년층 인구 비율이 제일 높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같은 시에 연령별 인구 차이가 조금씩 있는데 이러한 부분에서 특정 구에 대한 연령별 정책이 있을지 생각해보자.
창원시의 연도별 인구수 데이터를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다. 2011년 인구수를 최고를 찍은 후 2017년 현재까지 인구수가 감소하고 있습니다. 수치로 따지면 약 5만 명이 감소중인데,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창원시의 전출 구체적 요인은 주택요인이라고 한다. 앞으로 인구 증가 또는 전출을 막기 위한 정책은 무엇이 있을까?
“해당 기사에 사용된 데이터 시각화는 뉴스젤리의 시각화 솔루션 DAISY를 이용하여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