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아마 이 말이 당신에게 매우 유용한 지침이 되어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알다시피 과거에 머물지도, 미래에 머물지도 말고 오롯이 현재를 살라는 의미다. 그리고 이 카르페 디엠의 정신을 가장 손쉽게 실천할 방법이 한 가지 있다. 오감을 바쁘게 굴리고, 거기에만 집중하는 것.
연인과의 이별, 잘 풀리지 않는 일, 건강의 악화, 사는 즐거움의 실종 등등 인생의 위기가 닥칠 때면 나의 지인 A는 모든 물리적/정신적 짐을 다 내려놓고 며칠간 훌쩍 여행을 다녀온다고 했다. 여행 짐을 싸면서 그는 자신이 꼭 지키고 있는 두 가지 원칙이 있음을 밝힌 바 있다. 첫째, 평소 읽고 싶었던 책을 한 10권 정도 넣을 것. 둘째, 휴대전화나 펜, 노트, 메모장, 녹음기, 캠코더 등등 ‘기록’이 가능한 도구는 일절 가지고 가지 않을 것.
그렇게 준비를 마치고 나면 최대한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으슥하지만 지극히 자연 친화적인 장소들을 찾아다닌다고 한다. 빚쟁이가 우르르 쫓아오려 해도 결코 쉽게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인적이 드문 곳. 그러나 아름다운 곳. 그래서 나만 알고 나만 언제든 쉬다 오고 싶은 그런 곳을 찾아다닌다는 것이다.
첫째 날에는 책을 꺼내지 않는다고 했다. 그저 발길이 닿는 대로 계속해서 걸어 다녀본다고 했다. 그러면서 평소 볼 수 없었던 풍경들을 실컷 보고, 듣고, 맡고, 맛보고, 느껴보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이야말로, 자신이 휴대전화를 가지고 오지 않은 그 의미를 제대로 느끼게 된다고 했다.
풍경을 기록물의 형태로 남기면 오감을 통해 있는 힘껏 느낄 수 있는 그 맛이 나오지 않는다고 하던가. 심지어 사진을 찍든, 스케치를 하든, 글을 적든 기록을 남기지 않더라도 그것을 가능케 하는 도구가 지금 내게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문제라고 했다. 절대로 지금 이 순간의 풍경을 담아서 올 수 없으리라는 그 ‘절박함’이야말로 100%의 만족감과 100%의 몰입을 끌어내는 비결이라는 것이다.
그 설명을 듣고 난 나는 즉시 무릎을 쳤다. ‘그래 맞다. 지금 이 순간이 다시 오지 않을 것처럼, 풍경에 빠져드는 것이야말로 현재를 즐기는 최선의 방법이 아니겠는가.’ 그러려면 ‘유보’를 암시하는 어떤 가능성도 없어야 할 것이다. 즉, ‘다음’이 없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마음먹는 순간 우리의 뇌는 지금 경험하고 있는 이 순간을 절대로 망각하지 않기 위한, 처절한 기억 연산의 과정을 밟기 시작한다. 이 느낌을 절대 잊고 싶지 않기에 열심히 보고 또 보는 것이다. 오감을 통해 고루 즐기고, 오로지 가까이서 집중해야지만 볼 수 있는 사물의 특징들을 머릿속에 열심히 넣어두려 할 것이다.
우리는 굳이 그것을 기록해 ‘숙제’를 만들 필요가 없다.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을 즐기면 된다. 나중에 다시 찾아서 느껴보려 해도 시간이 지나고, 맥락이 지난 미래에는 지금과 같을 수 없을 것이다.
2000년대 중반, 대학수학능력시험이나 모의고사를 치르던 순간이 떠오른다. 국어듣기평가, 영어듣기평가를 한다 하면 우리는 정말 잡아먹을 듯이, 문제들을 노려보며 들리는 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가? 첫 번째 문제가 들려오기 전에,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먼저 전해졌기 때문이다.
모든 문제는 한 번씩만 들려드리니…
문제를 듣는 지금 이 순간이 다시 오지 않는다는 절박감이 그런 놀라운 집중력을 만들어냈던 것을 기억했다. 불행하게도 듣기평가를 치르는 장면에서야 그 집중력에 섞여 오는 중압감을 이기지 못해 왕왕 일을 그르치기도 하였으나 여행을 가고 풍경을 경험하게 되는 때라면야. 누가 날 어떤 방식으로 평가하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없어 더욱 순수히 몰입하는 일이 가능하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음 여행지에서는 그 어떠한 기록도 만들어오지 않으려 한다. 그 두근두근하는 느낌은 오로지 내 가슴속에만 담아올 것이다. 모든 감각으로 느낀 그 벅찬 기분을 절대 잊지 않기 위해 반추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다. 몰입하는 그 순간만큼은 모든 걸 내려놓을 수 있을 테니.
심지어 나를 착하고 합리적인 인간으로 만드는 ‘정신줄’마저도 내려놓을 수 있겠지. 그 느낌을 꼭 좀 살려보고 싶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카르페 디엠의 정신이요, 행복에 이르는 왕도다.
원문: 허용회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