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환(ㅍㅍㅅㅅ 대표, 이하 리): 어쩌다가 이번에 선거에 출마하게 되셨습니까?
최재성(송파 을 국회의원 후보): 총선을 앞두고 불출마했던 건, 문재인 당 대표 시절 탈당 등으로 당이 흔들렸기 때문이죠. 야권 분열로 패배가 우려되었기 때문에, 사무총장으로서 강력한 인적 혁신, 공천 혁신을 하고자 했어요. 이를 위해 불출마를 선언한 거죠. 이젠 다시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위해 정치를 할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리: 혁신안도 주도적으로 내신 거예요?
최재성: 그렇습니다. 거의 제가 만들고 주변의 의견을 청취해서 보완했지요.
리: 야권이 분열되면 총선은 필패라고 했는데, 훌륭한 승리를 거두었어요.
최재성: 국민들이 정말 대단한 거죠. 정당사, 선거사에 유례가 없는 전략적 조합 투표를 한 거거든요. 인물은 민주당을 찍고, 정당은 국민의당도 좀 찍는 식으로 새누리당을 패배시킨 거예요. 정보와 지식이 특정 사람에게 집중되지 않고, 격차 없이 누구나 디지털 세계의 바다를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기 때문에, 국민들이 소통하고 판단하는 게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리: 직접민주주의 이야기를 많이 하시는데, 정보와 지식이 커진다고 꼭 좋은 결정을 내리는 게 아니라는 건 이미 트럼프가 증명하지 않았을까요? 또 이명박, 박근혜가 되는 동안에도 지식과 정보는 증가했거든요.
최재성: 두 가지 형태가 있어요. 일종의 포퓰리즘이죠. 그런데 저는 포퓰리즘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패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겁니다. 트럼프 대통령을 두고 옳으냐 그르냐 절대평가를 할 수도 있죠. 그런데 경쟁자인 민주당과 힐러리 후보가 유권자들에게 매력적이었는가, 그 생각도 해 봐야죠. 어쨌든 힐러리의 노선과 정책, 캠페인이 유권자들의 지지를 덜 받은 거거든요. 그 선택의 결과가 나쁘다고 단정할 순 없는 거예요.
리: 저는 정당이나 인물이 정말 잘 해서 승리한다기보다는, 그냥 원래 모습이 마침 국민들의 목소리와 잘 맞아 떨어지는 타이밍에 뽀록으로 이기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종종 하거든요.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움직임을 잘 해내서 승리하는 게 아니라, 국민들이 그냥 상황 따라 고르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최재성: 그것도 똑같은 원리에요. 국민들이 고를 수 있게 그 자리에 가 있어야죠. 그냥 가만히 있는 정당, 정치인을 국민들이 그냥 선택하는 법은 없습니다. 저는 국민들의 선택이 시대 흐름과 거의 일치한다고 봐요. 예전에는 특정 언론, 유력한 정치인 등에 의해 유권자들의 판단이 휩쓸렸거든요. 하지만 오늘날은 지식과 정보의 격차가 없어요. 인터넷, SNS에서 비빔밥처럼 비벼져서 더 크고 위대한, 집합된 지식과 정보를 만들어내죠. 2008년 80만 대였던 스마트폰이 2016년에는 4,500만 대가 보급됐어요. 2012년 박근혜 대통령이 집권할 때까지도 스마트폰이 한창 보급되기 시작할 때라, 문명의 이동이 이뤄졌다고 보기는 어려웠죠. 하지만 지금은 그 이동이 이루어졌고, 그 당시와는 다른 흐름이 있는 거죠.
리: 지금 스마트폰은 뭐 쓰세요? 특별히 쓰는 앱 같은 게 있나요?
최재성: 저는 갤럭시요. 민주당이라는 앱이 있어요. 지금은 1만 명 정도가 사용해요. 우리는 매우 특이한 정치환경에 있는 나랍니다. 정당 가입을 회피하거나, 숨기는 경우가 많아요. 출마자의 권위 때문에 형식적으로만 가입하는 경우도 있고요. 그런데 우리 민주당의 권리당원이 170만 명입니다. 세계적으로 다들 당원 수가 줄어드는데, 문재인 대표 이후로 2년 동안 170만 명이 되었어요. 그런데 여전히 당을 밝히는 것을 꺼려요. 그래서 민주당이라는 앱을 만들자고 당에 요청해서 개발이 된 거죠.
리: 당원만 다운받고 활동할 수 있나요?
최재성: 그렇습니다. 개인정보는 공개해도 안 해도 좋아요. 자기 위치를 표시할 수도 있고, 메신저와 댓글 기능이 있어서 우리 동네에 어떤 당원이 있는지도 알고 소통도 할 수 있는 거죠. 혁신안 중에 매우 주목할 만한 게 있는데, 권리당원 몇 명이면 전당대회 대의원을 추천할 수 있게 돼 있어요. 이게 시행되면 이 앱이 더 활성화되겠죠.
고향도 아니고, 연고도 없지만 남양주에서 12년 사랑을 받다
리: 최근 20년 동안 민주당에 있었던 선거 중에 두 개가 떠올라요. 첫 번째는 2002년의 국민참여경선이고 두 번째는 2년 전 총선이 될 것 같은데, 국민참여경선 때도 당 활동을 하셨죠?
최재성: 맞아요, 제가 노무현 후보 청년특보단 부단장을 했죠. 지역에서 정치를 준비하는 청년 정치 도전자이기도 했고요.
리: 그리고 2004년에 바로 초선 의원이 되잖아요. 젊은 나이에 쉽지 않았을 텐데.
최재성: 2004년에 노무현 대통령께서 한 번 큰 변화를 일으켰죠. 상향식 공천, 그러니까 위에서 사람 꽂지 말라는 것이었죠. 그래서 5~10% 정도의 전략공천 외에는 모두 경선을 했어요. 그리고 돈 안 드는 선거도 도입했어요. 선거법을 강화해서 벌금을 50배씩 물리고 그러면서 깨끗한 선거가 시작되었어요. 정치 신인들이 진출할 수 있는 제도가 열린 거죠.
리: 그때 상대는 누구였죠?
최재성: 남양주가 분구되면서 당내 현역이 없었어요. 또 남양주는 우리 당에서 국회의원을 한 적이 없는 곳이에요. 다들 저보다 연배가 높았죠. 한 분은 차관급 준공직자, 한 분은 시민운동을 오래 하신 분, 또 이부영 당시 최고의원의 측근, 이래서 다 대선배 분들이셨어요. 하지만 경선에서 제가 이겼죠.
리: 뭐 때문에 이겼다고 보세요? 노무현의 남자?
최재성: 경선 제도가 특이했어요. 시민들을 연령별, 동별로 할당하고 무작위로 전화를 해서, 경선 선거인단을 640명을 모집했어요. 그분들이 체육관에 오셔서 연설을 듣고 투표를 한 거에요. 물론 다들 절실했지만, 진심이 이겼다고 봅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되시고 3일 만에 경선을 치렀거든요. 분노도 일고, 눈물도 나더라고요. 유세할 때 노무현 대통령 얘기만 했어요. 탄핵 안 된다는 얘기만 했어요. 이건 노무현 대통령을 뽑아 준 국민들을 탄핵한 거다. 젊은 정치인들이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극복해야 한다. 그랬더니 유권자들도 눈물을 흘리고, 그랬어요.
리: 본인은 안 울었어요?
최재성: 저도 유세하면서 울었어요. 절실했어요. 당시에는 차관급 선배님이 압승할 거라는 분위기였는데, 현장에서 그 절실함으로 극복을 했죠.
리: 탄돌이를 넘어서 재선까지 성공하셨어요.
최재성: 국회의원은 국민들의 투표에 의해 권력을 위임받아요. 또 전국의 모든 국민이 투표하는 게 아니고, 예를 들어서 송파 을의 유권자들이 투표해서 4년 동안 맡기는 거예요. 결국 지역의 일과 중앙의 일, 두 개 다 열심히 해야 합니다. 한쪽에 치우치는 의원들도 많은데, 저는 비교적 두 가지에 충실했던 편입니다. 그래서 2008년도에 서울·경기·인천에서 우리 당이 국회의원 26석 건질 때 어렵게 살아남은 것 같아요.
리: 남양주는 험지 이미지가 있는데요. 그곳에서 계속 사랑을 받는 걸 보면 상당히 활동을 많이 하셨나 봐요?
최재성: 저는 남양주가 고향도 아니고요. 학교도 거기가 아니었어요. 저희 와이프가 몸이 안 좋아서 잠깐 살기로 하고 갔던 거예요. 근데 실제로 몸이 좋아지더라고요. 그래서 조금 더 살자, 하다가 계속 살게 됐고, 또 출마까지 하게 됐죠. 정치적으로 보면 경쟁력이 전혀 없는 사람이죠. 그땐 남양주가 실제로 험지였습니다. 지금은 괜찮아졌어요. 조응천 의원님이 계시죠.
리: 의원님은 중앙에서 입법 활동 한 결과가 굉장히 많이 나와요. 사학 개혁도 그렇고, 전두환 추징도 그렇고요. 그렇다면 남양주를 위해 했던 결정적인 활동은 무엇이 있을까요?
최재성: 조례를 만드는 건 시의원들이 하셔야 하는 일이고, 저는 지역 현안사업, 예산사업을 하죠. 대표적으로, 아파트를 300세대 이상 지으려면 학교를 의무적으로 하나씩 지어야 해요. 아파트 시공업자가 지어야 해요. 그런데 그동안은 그 학교용지 분담금을 아파트 분양받은 사람들이 나눠서 부담했어요. 그게 온당치 않게 느껴져서 법을 만들었지요. 결과적으로 세계 조세 사상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환급을 받은 적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남양주에서도 9,000여 세대 정도가 적게는 120만 원에서 많게는 400만 원 씩 환급받았습니다. 그 결정이 재선 직전에 됐거든요. 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이기는 데도 도움이 되었겠죠? 교통, 교육 등에서도 여러 가지 일을 했고요.
리: 도로교통 얘길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은데요.
최재성: 원래는 전철이 없었는데, 두 개의 노선이 들어왔죠. 경춘선 복전철화와 중앙선. 이런 건 계획이 있어도 조기 개통을 할 수 있느냐가 중요해요. 중앙선 같은 경우 조기 개통이 됐죠.
리: 교육 쪽에서는요?
최재성: 학교 예산 규모가 전 국회의원 중에 2등 안이었을 거예요. 제일 많이 지었을 거고요.
리: 경기도만 해도 으리으리한 시가 한두 개가 아닌데, 어떻게 남양주에서 그 정도 규모가 가능했나요?
최재성: 계속 입주하는 곳이라 그래요. 교육 시설이나 환경에 대한 수요가 많은 지역이죠.
리: 속물적인 질문이지만, 남양주는 학군으로 따지면 어느 정도죠?
최재성: 제가 처음 국회의원 됐을 때는 선생님들이 희망근무지 지망할 때 남양주는 3순위 정도였어요. 제가 재선, 3선 할 때 경쟁률이 2배 이상이 됐죠. 교육여건도 좋아졌고, 서울과 가깝고, 주거 여건도 괜찮고, 읍면동 통합 도시라 읍면에서 근무하면 고과에도 반영되고요.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에 비례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여건이 맞아떨어지며 교육의 질도 올라갔지요.
격동의 세월: 열린우리당의 영광과 몰락, 그리고 문재인
리: 3선을 하면서 3명의 대통령과 함께 일을 해 왔어요. 각각의 느낌이나, 실제 일하는 스타일이 어땠나요?
최재성: 처음 국회의원이 됐을 때는 여당 국회의원이 뭔지도 모르고 세월이 지나갔어요. 당이 엄청 흔들렸죠. 2006년 지방선거에 참패한 후에는, 의원들이 대통령을 공격하는 게 취미인 것처럼 경쟁적이었고요.
리: 그땐 여당 내부에서도 그랬으니까요.
최재성: 네, 본회의장 단상에서 여당 의원이 대통령을 비판하고 그랬었어요. 그러다 2007년도에 여당 대변인이 되었어요. 그런데 첫 업무가 노무현 대통령 탈당 발표하는 거였어요. 분열, 갈등이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눈 뜨면 일어나고, 눈 뜨면 일어나고…
리: 대변인 때 처음 탈당 이야기한 그 순간이 기억이 나세요?
최재성: 그때는 의원들이 한마디 하면 다 기사가 됐거든요. 대통령 탈당이면 어마어마한 뉴스였죠. 그래서 최고위원님들께 그랬어요. “청와대 나온 뒤 댁에 가셔서 주무실 때까지 휴대폰을 켜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언론에서 계속 취재 들어가면 감당이 안 되죠. 그리고 “제가 결례될지 몰라도 중간중간에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랬어요. 잘못 보도되거나, 노출되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서요. 노 대통령께서 탈당하시는 이유를 얘기하면서 박근혜, 이명박 얘기도 하고 그러셨어요. 그대로 보도되면 난리가 났을 거예요.
리: 어떤 이야긴지 기억나세요?
최재성: 기억은 나는데, 지금도 저는 그 이야기를 안 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외롭고 신념 있는 분이죠. 그분 눈에는, 이명박 시장이나 박근혜 의원이 대통령이 되는 거는 상상 밖의 일이었어요. 탈당하시면서 당부하셨어요. 당에 부담이 되지 않기 위해 탈당은 하지만, 정말 잘해야 한다고. 이명박, 박근혜 씨가 대통령이 된다면 생각보다 큰 불행이 될 거라고.
리: 탈당 자체야 YS나 DJ나 다 했으니까 그럴 수 있다고 보는데, 어쨌거나 열린우리당의 영광과 몰락을 중심에서 지켜보셨잖아요. 그러면서 느낀 점이 있으셨나요?
최재성: 저는 당이 중요하다는 얘기를 잘 몰랐어요. 국회의원 3번 하면서 절실하게 알게 됐죠. 정당이 흔들리면 대통령도, 나라도 다 흔들리는 거예요. 말하자면 정당은 국민들께 우리 후보들에게 정권을 맡겨 주십시오, 우리 철학과 정책 노선으로 책임 있게 해보겠습니다 하는 존재인데 그게 근간부터 흔들리면 정당이 배출한 대통령도 흔들리고, 대통령이 임명한 국무위원도 흔들리면서 결과적으로는 국정이 흔들리죠. 그 정당이 국민의 사랑을 받으려면 또 엄청난 시간과 고통이 수반되고요. 전 세계 정당사에서 그렇게 파란만장한 정당은 없었을 겁니다. 그 대신 세계 모든 정당의 제도를 거의 다 고민하고 시도를 해 봤습니다. 그래서 열린우리당의 정치 실험은 귀중했다는, 그런 양면성이 있는 것 같아요.
리: 어떤 점이 그렇게 실험적이었나요?
최재성: 상향식 공천이 자리를 잡았죠. 노무현 대통령이 국민참여경선으로 당선된 게 그때는 어마어마한 사건이었거든요. 그 뒤로 정당의 경선제도에 있어선, 인류가 개발해 놓은 모든 것을 한 번씩 다 해 봤습니다. 그렇게 갈등하면서도 민주적 정당이 되어간 게 아닌가 싶어요. 또 시민공천 배심원제도도 있었고, 제왕적 당 대표의 권한을 분산한 것도 그때죠.
리: 생각해보면 열린우리당 때도 그렇고 그 후로도 민주당은 많이 흔들리는 정당이라는 느낌을 줬거든요. 한나라당, 새누리당은 옥새 사건 전까지만 해도 안정감 있다는 느낌을 줬는데. 왜 그렇게 흔들렸다고 생각하세요?
최재성: 우선, 민주당은 그야말로 ‘민주당’입니다. 제왕적인 면이나, 구성원들이 마음에 안 드는 걸 그대로 묻어두지 않는 정당입니다. 하지만 자유한국당은 이익공동체입니다. 일본강점기, 독재 시대를 거친 한국의 잘못된 주류가 그대로 이어진 거죠. 맘에 안 드는 게 있어도 우리 기득권, 특권이 깨지겠구나 하면 선을 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기는 사건이 크게 터지고, 그 고통이 다 국민들에게 가요. 박정희 장기집권이 총탄에 의해 중단됐는데, 경제적으로, 역사적으로 풍전등화였던 시기죠. 그리고 또 전두환, 노태우 군부가 쿠데타하고. YS로 이어졌는데 IMF가 왔잖아요. 그리고 박근혜 국정농단까지. 사실은 굉장히 불안한 세력이죠.
반면 민주당은 가치공동체입니다. 특권을 지킬 만한 게 없었어요. 늘 기울어진 운동장의 맞은편에 있었죠. 그래서 지지고 볶는 것 같아도, 막상 국민이나 국가에 사고를 친 건 없어요. 김대중 대통령이 처음으로 수평적 정권교체를 했는데, 외환보유고 달랑 26억 달러에 IMF 환란을 등짐에 지고 출발한 정권이에요. 그래도 가장 빠른 속도로 IMF를 졸업하고, 노무현 대통령 때 한국 경제의 체력을 강화했죠. 그 펀더멘탈로 이명박 때 금융위기를 넘겼고요.
리: 정권을 잡는 시기가 짧아서 사고를 치기도 힘들었던 면도 있죠.
최재성: 그래도요. IMF 환란을 등짐 지고 출발한 김대중 정부가 경제 정책 실패했으면 지금은 어떻게 됐겠어요? 정권을 많이 잡지 못해서 사고 칠 환경이 안 됐다는 건, 권력의 속성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말씀 같아요.
리: 그런데 민주당도 사실 승패에 휘둘리긴 했잖아요? 지난 총선이 굉장히 특이했던 게, 제3당은 갈 데로 가라, 우리는 우리 길을 가겠다고 천명해버렸어요. 거기서부터 오히려 민주당의 상승세가 이어진 게 무척 신기했는데요. 그 정도 승리는 솔직히 의원님도 예측 못 하지 않으셨어요?
최재성: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처음엔 절망적으로 봤어요. 그런데 총선을 치르며 보니, 다르더라고요. 총선을 치르고 제가 문재인 대통령께 그랬어요. 2012년 대통령 후보 문재인을 향한 지지는 야권 후보에 대한 당위적 지지였다. 그런데 이번 총선 지원 나온 민주당 전 대표 문재인은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지지자들이 발을 동동 구르면서 문 대표님 손을 잡으려 하고, 안타까워한다. 탈당 사태로 흔들리던 과정이 동지들이나 지지자들에게는 짠함을 준 거죠. 제가 그분께 그랬어요, 사람들이 대표님에게 박근혜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의 모습을 봤다고요. 어쨌든 박근혜 대통령은 총탄에 부모를 잃었으니, 그쪽 지지자들에겐 짠함이 묻어있는 거예요. 노무현 대통령도 비주류 중의 비주류로 바보같이 도전하다 우리 곁을 떠나신 데 짠함이 있는 거고요. 김대중 대통령은 얘기할 필요도 없잖아요. 사형선고도 받으시고, 바다에 수장될 뻔하시고, 감옥 살고, 망명 살고… 2012년 문재인 대통령에게는 그게 없었어요. 근데 그 이후로 흔들리고 화살 맞는 과정에서도 착한 문재인 대통령을 보며 짠함을 느낀 거죠. 한번은 총선 때 지원을 나갔는데, 후보는 조응천인데 지지자분들이 문재인 전 대표님 손을 잡으면서 꼭 이기세요! 이러더라고요. (웃음) 다만, 앞선 세 분 대통령과 달리 안 보이는 게 있다 그랬더니, 뭐냐 그러시더라고요. 권력 의지라고 말씀드렸어요.
리: 노무현, 김대중, 박근혜…
최재성: 그렇죠. 김대중 대통령은 사선을 넘으면서도 정권을 잡아서 민주주의를 진전시키겠다고 영혼을 바친 분이에요. 자신을 죽이려 했던 독재정권의 핵심이었던 김종필과 DJP연합까지 했어요. 그것이 곧 신념이었고 권력 의지죠. 노무현 대통령도 마찬가지고. 박근혜도 권력 의지죠. 하지만 이제는 권력 의지를 갖고 출마한다는 게 부자연스럽지 않겠어요? 이 디지털융합 문명에서 대통령이란 목표를 위해 안되는 걸 억지로 되게 하려고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래서 문 대표님께 권력 의지가 없다, 결단력이 없다는 얘길 너무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어요. 우리도 이제 좋은 대통령, 착한 대통령, 일 잘하는 대통령을 더 선호하지 않겠어요? 2015년에는 전 국민이 이미 스마트폰을 가지고 거기서 자유롭게 헤엄치는 문명이 절정을 맞은 거죠. 문재인의 존재는 그 문명과 어울렸던 거예요.
그래서 야권 분열 상황에서, 새누리당 200석 얘기도 나오던 때 참패를 안겼던 것이죠. 실시간으로 지식과 정보가 격차 없이 교환되고 생각이 펼쳐지는, 그 속에서 전략적 조합이 가능해지는 그런 문명. 저는 거기에 충실히 따랐던 것이죠. 그리고 문재인 당시 대통령 예비후보께도 이 민심을 따라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리: 흐음…
최재성: 그런데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국회에 와서 갑자기 개헌을 이야기합니다. 원래 개헌을 꽁꽁 틀어막았던 사람이 박근혜 전 대통령이잖아요? 그래서 정치권은 둘로 나뉩니다. 개헌 받자는 입장, 말자는 입장. 근데 국민들은 한마디로 정리했어요. “최순실 사건 덮으려고 개헌 제안하는 거다”. 이게 상식 아닙니까? 하지만 예전에는 이런 정보를 빨리 공유할 수 없었어요. 그러니 상식적 선택을 못 했던 거죠.
그러다가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나오니까,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국회에서 총리를 추천하라고 했어요. 박지원 전 대표께선 선 총리 후 하야를 말씀하셨어요. 정치판을 이해타산에 따라 흔들려고 했던 거죠. 근데 국민들이 그때 뭐라고 그랬어요? 국정에서 손 떼라, 하야하고 이야기하라고 했죠. 역시 상식 아닙니까? 문명으로 말미암아 가능했던 거죠.
리: 지난 총선이 굉장히 놀라웠던 점이, 제3정당이 끼어있는데도 민주당이 키를 잡았다는 점이었어요. 이번에 제3정당이 확 무너졌던 이유는 뭘까요?
최재성: 저는 하나의 문화라고 봐요. 법과 제도는 문화를 형성하는 데 작용하지요. 그런데 법과 제도가 양당 중심 체계로 갈 수밖에 없게 되어 있어요.
리: 다당제를 더 선호하는 편이세요?
최재성: 꼭 그렇지는 않은데요, 다당제를 일부러 막을 필요는 없다 정도의 생각입니다. 다 장단점이 있어요. 다만 지금 법 제도는 양당제가 아니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3당, 4당이 있었는데 결국 합쳐져서 바른미래당이 되었잖아요? 이건 정거장이에요. 결국 자유한국당이 버스 종점입니다. 양당제로 갈 수밖에 없어요.
리: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 두 리더를 모셨어요. 두 분을 비교해보면 어떤가요?
최재성: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이미 나와 있는 것 같아요. 소신이 뚜렷하시고, 생각과 마음을 숨기지 못하시는, 어떻게 보면 좋은 분이었죠. 굉장히 추진력 있는 분이셨고요. 문재인 대통령은 그 마음의 깊이를 모르겠어요. 생각이 깊으시고 경청을 잘 하세요. 하지만 세간의 이야기와 달리 결단력은 빠르시죠. 진정한 승부사는 문재인이라고 생각해요.
리: 그걸 보여주는 사건이 무엇이 있을까요?
최재성: 싸우자고 덤비지는 않지만, 결과는 상대를 때려눕히는 것보다 나은 결과를 내요. 남북문제가 그렇죠. 북미회담을 상상이나 했어요? 논쟁을 벌이자고 상대와 싸운 게 아니라, 깊은 통찰력으로 매우 성실하고 치밀하게 과정을 밟아나간 거예요. 갈등비용도 적게 들고, 좋은 결과를 얻을 확률도 높아요. 이게 오히려 엄청난 승부사인 거죠.
사회현실에 눈감지 못한 청년, 그대로 초고속 승진까지
리: 옛날이야기로 돌아가 볼게요. 대학 입학 전부터 정치에 뜻이 있으셨나요?
최재성: 1982년, 그러니까 제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때 역사 선생님이 소위 민중교육지 사건에 연관된 인물이었어요. 그분이 방학하는 날 책을 두 권 주셨어요. ‘세계사 편력’과 ‘해방전후사의 인식’. 우리가 알던 상식을 뛰어넘는 책이었죠. 그 이후 사회과학 서적을 찾아서 읽게 되었어요.
리: 대학교에 가자마자 좌빨의 길을 걷게 되셨나요?
최재성: 큰 누나는 좋은 대학에 갔는데, 형님이 못 갔어요. 당시는 여자보다 남자가 중요하게 여겨지던 분위기였던 데다, 제가 막내로 편애를 좀 받기도 했어요. 데모 안 하는 데가 어디냐 물어 동국대에 갔지요. 하지만 저는 괴로웠어요. 청년으로서 사회 현실에 눈감아선 안 되는데, 싶었죠. 그래서 출가하겠다고 도망갔다가 실패하기도 했어요. 결국 돌아와서 학생운동을 하기로 결심했는데, 하자마자 회사로 따지면 고속승진을 하죠.
리: 1984년 정도면, 굉장히 삼엄할 때인데요.
최재성: 오히려 학내에서 경찰이 철수했어요. 학도호국단에서 총학생회로 넘어오는 시점이었거든요. 그러나 여전히 권위주의 독재정권이었죠. 3학년쯤부턴 조직에서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는데요. 87년도에는 애국학생회 의장을 하면서 수배되고, 그 이듬해엔 총학생회장이 되어 시위를 주동하면서 또 잡혀갔어요. 그래도 당시엔 6월 항쟁으로 분위기가 달라진 시기라 금방 나왔어요. 그래도 감옥 두 번을 가니까 제적도 세 번 당해서, 군대도 안 가고 10년 만에 졸업을 했지요.
리: 졸업 이후의 진로는 정해져 있었나요?
최재성: 학생운동을 하던 사람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노동현장에 갈 거냐, 시민단체나 재야단체로 갈 거냐로 고민을 하죠. 저는 시민운동 쪽으로 일찍 결정했어요. 저는 좀 관점이 특이했어요. 당시 학생운동이 가두투쟁 위주였을 때 저는 학내 문제, 학내 민주화 등에 집중했거든요. 구성원들의 이해와 처지에 기반 둔 일을 한 뒤 연대투쟁 등을 이어가는 게 옳다고 생각했죠. 시민운동도 이렇게 해서 되겠나 하는 회의가 많았어요. 시민들이 장벽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운동을 통해 민주주의와 같은 가치를 투영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스물여섯, 일곱 때 협동조합을 만들었고 시민 아카데미도 만들었어요. 남양주에서도 인터넷 지역 언론을 만들었고, 팔당 생명산림연대도 보조하고, 구리-판교 톨게이트 요금 인하 시민대책위원장으로도 활동했지요.
리: 결혼은 언제 하셨어요?
최재성: 처음 감옥 살고 나와서 약혼, 두 번째 살고 나와선 결혼했어요. 첫사랑이었어요. 초등학교 6학년 때 스케이트장에서 본 옆 동네 아이였는데, 처음 보고 열 줄짜리 편지를 보냈어요. 첫 편지부터 결혼하자고 썼어요. 그 생각이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어요.
리: 아드님이 그럭저럭 유명한 음악인이에요.
최재성: 아이가 초등학교 때 짜장면이 배달되는 산속에 살았어요. 500m 나가면 아파트고, 500m 들어가면 산이었죠. 등·하굣길에 천천히 걸으며 자연과 이야기하라고 가르쳤어요. 경쟁교육이 너무 잔인한 것 같아서, 중학교는 지리산 대안학교로 보내기도 하고요. 그랬더니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음악, 기타에 빠지더라고요. 그리고는 그걸로 대학에 갔어요. 기타 학원에 1년 보낸 게 제가 시킨 유일한 사교육이었어요.
리: 공부는 잘 안 하던가요?
최재성: 비제도권 대안학교에서 고등학교에 보내려니 검정고시를 쳐야 했는데, 본인이 수학 실력이 모자라다며 학원에 가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테스트를 해 보니, 다른 아이들과 같이 공부하기 어렵겠다고 하더라고요. 결국 사교육을 따로 시키진 않은 거죠.
리: 아드님이 음악 낼 때 들어보세요?
최재성: 처음엔 들어봤는데, 요즘은 안 들어봐요. 다작을 하더라고. 와이프는 전국 최고의 팬인 것 같지만요.
“문재인의 복심”: 대통령과 함께 정권을 성공시키는 꿈
리: 의원 때 전두환 추징법, 재벌 증세법 등을 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법안이라면요?
최재성: 제가 어려운 법만 냈던 것 같아요; 그래도 그중에는 전두환 추징법인 것 같네요. 쉬운 것 같은데, 그동안 못했잖아요. 그동안 그 사람은 26만 원밖에 없다며 떵떵거리고 살았죠. 벌금은 안 내면 그만큼을 노역으로 환산해서 살아야 해요. 하지만 추징금은 별도라서, 안 내도 잡아갈 수가 없죠. 저는 입증책임을 전환하는 데 초점을 맞췄어요. 전두환 외에도 불법적으로 재산을 은닉했다고 추정되는 사람은 소환해 조사할 수 있도록 법을 바꾸고, 본인이 그게 아니라고 입증하도록 했어요.
리: MB도 곤욕을 치르겠어요.
최재성: 최순실 재산 환수 얘기도 나왔는데, 전두환 추징법은 전두환을 비롯한 고위공직자의 은닉 재산을 환수하는 겁니다. 민간인인 최순실의 재산을 환수할 순 없지요. 결국 ‘박근혜 환수법’을 만들어야 해요. 박근혜가 직무상 불법으로 취득한 재산을 최순실이 은닉하고 활용하였다면, 박근혜라는 고위공직자를 통해 환수한다거나 하는 것이죠.
리: 너무 소급 적용 아닐까요? 정의롭기는 하지만요.
최재성: 아닙니다. 소급 적용이 아니라, 합당한 법 원리를 찾아내는 것이지요.
리: 참여정부 때 4대 개혁 입법 중 사학 개혁 쪽에서 주로 활약하셨어요. 사실 참여정부의 4대 개혁이 매우 중요했는데 결국 해내지 못했잖아요. 이번 정부도 여소야대 기간이 꽤 오래 갈 텐데, 어떻게 여러 문제를 정부가 풀어낼 수 있을까요?
최재성: 저는 참여정부의 4대 개혁과 이번 정부의 적폐청산이 전혀 다르다고 생각해요. 2004년 다수당이 된 후 4대 개혁을 천명하게 되는데요. 이게 오히려 우리의 진로를 다 알려준 셈이 된 거죠. 게다가 민심이 따라줘야 하는 것이지, 152석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사립학교법은 정세균 원내대표 때 통과했다가, 김한길 대표 때 다시 후진하게 되었죠. 지금은 이런 법을 만들겠다고 천명하는 게 아니라, 국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사안을 대통령, 행정부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부터 해나가고 있어요. 또한 범법에 대해 현재 법을 적용하여 적폐 청산을 이뤄내고 있고요. 법을 바꾸는 것은 그다음 차원인 것이지요.
리: 송파에서 활동하지 않던 사람이 출마했다고 당 내외에서 비판이 있는데요.
최재성: 모든 비판은 근거가 분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전략공천이 아니라 경선을 자청했습니다. 자격이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예요. 작년 11월 이미 말씀을 드린 것이고요. 오히려 이에 반발한다면, 경선에 반대하는 것이나 다름없죠. 송파에 얼마나 살았느냐 하는 건 부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해요.
리: 흐음…
최재성: 저는 남양주와도 연고가 없었지만, 12년 열심히 해서 박수를 받고 떠났습니다. 우리 당 경선 후보인 송기호 위원장도 4개월 전 지역위원장이 되며 입문하셨거든요. 상대 당 배현진 후보도 마찬가지고요. 서울은 연고를 크게 따지지 않아요. 누구나 도전할 수 있는 곳이죠. 다만 도전했다가 철새처럼 다른 곳으로 또 떠나고, 이래선 안 되겠죠. 다만 민주당 입장에서 송파는 어려운 곳이에요. 당선된다면 떠날 이유가 없습니다.
리: ‘문재인의 복심’이란 문구를 밀고 있어요. 다른 후보들도 다들 문재인 얘기만 하는 중이라-_-; 과도한 문재인 마케팅이란 생각도 드는데요.
최재성: 선거란 캠페인으로 유권자의 판단을 구하는 것이죠. 근거와 사실에 기반 둬서요. 다른 후보들이 문재인의 복심이란 캠페인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에요. 문재인의 복심이란 말은 제가 한 말이 아니라, 정권 교체 이전에 언론이, 당원들이 친문패권주의 같은 프레임으로 저를 공격하던 말이었어요. 그것이 이제 정권 교체에 성공하면서, 대통령과 함께 이 정권을 성공시키겠다는 저의 능동적인 의지를 표현하는 슬로건이 된 것이에요. 한 번 선거에 이기려고 붙인 것과는 다르지요.
리: 당선되면 이것만은 하겠다, 세 가지 키워드 정도를 정리해 주신다면요?
최재성: 우선, 혁신이에요. 저는 정치 혁신, 정당 혁신을 주장하고 실현했던 유일한 정치인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정치를 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때로는 동료 의원들의 미움을 사기도 했지요.
그리고 통합. 갈등을 하더라도 결국은 통합의 길로 가기 위해서 정치를 하는 법이에요. 송파는 보수와 진보가 공존하는 곳이에요. 뚜렷한 지역적 경계가 있고, 노인과 청년, 부자와 서민, 첨단 건축물과 백제토성이 공존하지요. 송파는 대한민국의 축소판이에요. 이곳을 통합하는 것은 매우 유의미한 일이 될 것 같아요.
그리고 송파유일구. 지금은 강남 3구라고 묶여 있어요. 송파에는 종합운동장, 가락시장, 탄천 등 다시 디자인할 수 있는 땅이 굉장히 많습니다. 서울에서 이런 개발 가능성을 가진 땅을 많이 가진 곳이 없습니다. 기존의 개발 방식을 넘어서, 이곳을 주거 여건과 삶의 질을 높이는, 미래지향적인 방식으로 재디자인할 거예요. 그렇게 강남 3구의 세 번째 자리가 아니라, 송파유일구로 만들어가는 것이죠.
리: 의원으로서, 이 지역에 이 한 가지만은 꼭 기여하겠다는 게 있다면요?
최재성: 다섯 가지 제안을 이미 드렸습니다. 지금 종합운동장을 전시 컨벤션 및 지원시설로 만들기로 되어 있는데, 저는 이곳을 세계적인 아트존으로 만들고 싶어요. 다양한 공연 시설을 만들고, 무형문화를 생활 속에서 접할 수 있게 하고 싶어요. 문화는 엄청난 시장입니다. 강남, 송파 등 내수뿐 아니라 쇼핑, 관광 등을 생각하면 더욱 엄청난 시장이에요. 민자 유치에도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송파구민의 자긍심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가락시장도 단순한 유통공간이 아니라, 관련 ICT 벤처의 융복합 공간이자 농수산 테마파크로 만들고 싶어요.
리: 마지막으로, 인생에서 가장 잘 한 결정이라고 생각하는 일이 있다면요?
최재성: 정치인으로서는, 문재인 대통령을 만난 것이에요. 어렵게 만났습니다. 2012년 많이 도와달란 말씀을 하셨는데, 주변의 견제로 인해 가지 못했어요. 그렇게 사무처장이 되어 문재인 대통령과 일하고, 마음을 맞추기 시작하기까지 3년이나 더 걸린 거예요.
리: 송파구 맛집 하나만 추천받고 끝내겠습니다.
최재성: 바로 옆에 모심정이라고 있습니다. 국수가 맛있고요, 양선지해장국이 대단히 간결한 맛이에요. 점심때는 2,000원 깎아줘서 6,000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