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감정에 종속적이다. 스스로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한다고 자부하는 건 안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는 그 순간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심지어 꿈을 꾸는 순간조차도 온갖 ‘감정적인 것들’에 휘둘리며 산다. 한편 ‘감성팔이’한다며 어떤 대상을 비난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 지겨운 ‘감성팔이’는 왜 작년에도 오고 올해 또 오는가?
감성을 건드리는 것이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감성은 곧 힘이 되고 돈이 된다. 감성을 건드리는 설득이나 협상은 매우 좋은 조건의 계약을 따내는 데 도움 줄 수 있다. 감성을 건드리는 책은 잘 팔릴 것이고, 감성을 건드리는 음악은 널리 울려 퍼질 것이다. 물론 사회 공익에 이바지하는 바도 크다. 감성을 건드리는 비참한 개인의 슬픈 사연은 사람들로 하여금 기부 및 봉사를 유발한다.
우리는 왜 감성을 곧잘 써먹으면서도, 감성을 그토록 경계하는가? 그것은 감성에 이끌려 내리는 판단이 결과적으로 내게 이익보다는 손해를 가져다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것은 상당히 많은 경우 우리가 어떤 감성에 이끌렸으며 결국 어떤 판단을 내리고 말았는지 별로 아는 바가 없다는 사실이다. 나중에 막심한 손해를 보고서야 후회하며 ‘내가 왜 그랬을까?’ 거듭 읊조리게 될 뿐이다.
감성을 자유자재로 컨트롤할 수 있다면?
감정(정서)을 자유자재로 컨트롤하면 어떠한 점에서 이로운가? 앞서 이야기했듯 우선 정서가 갖는 힘을 잘 이해하고 활용하면 그것을 토대로 ‘돈’을 버는 것이 가능하다. 혹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무언가를 이뤄나가는 것이 가능하다. 타인의 정서를 컨트롤하는 노하우는 조직된 힘을 끌어내는 데 유용하다.
정서 조절 능력을 통해 우리가 정복해야 할 대상은 저기 바깥의 타인만은 아니다. 다름 아닌 우리들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어야 한다. 정서가 불안정한 사람은 행복하지 않으며, 각종 부적응적인 행동 양상을 보이기 쉽다. 스트레스도 잦으며 우울 성향을 보일 가능성 또한 높다. 삶에서 의미를 찾고 만족감을 느끼기는커녕 불안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그저 숨만 쉬며 사는 삶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정리하자면 정서를 조절하는 능력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의 행복이나 삶의 의미 찾기 등을 실현해줄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다.
정서를 잘 다루는 방법
흔히 드는 생각 한 가지는 그것을 마음속에 담아두지 말고, 그때그때 적절히 ‘배출’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스트레스를 경험하거나 우울하거나, 슬플 때 그것을 마음에 담아둔다는 것은 곧 내 안에 독(毒)을 품은 것과도 같다. 해독하거나 배출하지 못하면 나의 내면은 상처 입고 썩어가기가 십상이다.
사실 이 정서 배출에 대한 아이디어의 뿌리는 제법 역사가 깊다. 일찍이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시학』에서 ‘비극은 정서의 배출구 역할을 하고, 카타르시스(catharsis)를 경험하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말한 바 있다. 정신분석학의 효시 프로이트 역시 내면에 억압된 공격성이나 충동 등을 효과적으로 배출하지 못하면 그것이 히스테리로 변모한다고 생각했고, 브로이어의 도움을 통해 이른바 ‘카타르시스 요법’을 주장한 바 있다.
사는 것이 힘들고 우울할 때, 흔히 ‘다 쏟아내고 나면’ 한결 기분이 나아질 것이라 믿는데 바로 카타르시스 개념에 기반 둔 아이디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서를 잘 다루는 방법으로 ‘배출’을 곧 만능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첫째, ‘배출’은 우리에게 마음속 응어리의 해소와 평안함을 약속하지만 그 약속이 우리의 바람대로 이뤄지지 않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실제로 ‘카타르시스’ 개념에 바탕을 둔 심리치료 요법들의 효과에 대해서는 그간 연구자 간 많은 논쟁이 있었다. 부정적인 정서가 극적으로 사라지는 효과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 ‘배출’을 위해 공격성이나 부정적 정서 등에 몰두한 나머지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던 것이다.
심리학 분야에서는 현재 카타르시스 개념에 기반 둔 치료 기법이 존재한다. 그러나 카타르시스가 실제로 존재하는가에 관한 논쟁이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극적인 정화를 노리다 감정에 잡아먹히고 말 가능성 역시 상존한다는 의미다.
둘째, ‘배출’을 하려거든 그전에 내가 현재 느끼는 정서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를 제대로 분별해내는 과정이 요구된다. 현재 내가 어떤 정서를 경험하는지 분명히 알지 못해 혼란스럽다면? 무엇에 대한 ‘배출’을 시도해야 할지 막막할 것이다. 그리고 심리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리의 기분을 우리 자신이 비교적 잘 안다는 ‘착각’은 생각보다 중증이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잘 모를 때가 많다. 정황 증거 및 자신의 신체적 감각 등을 바탕으로 열심히 해석해보지만 그것이 언제나 사실로 판명 나는 것은 아니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나도 내가 지금 뭘 느끼는지 모르는 상태라면, 감정을 배출하고 해소한다는 발상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
그래서 정서에 관한 문제를 다룰 때 심리학자들은 정서를 ‘정돈’하는 일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단지 정서의 배출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평소 스스로가 경험하는 정서에 얼마나 자주 주의를 기울이고, 정서의 속성을 분명히 알아차리는지에 대한 부분들이다. 그리고 여기에 대응되는 심리학 개념이 바로 정서 인식 명확성(emotional clarity)이다.
정서 인식 명확성이란 정서를 스스로 잘 알아채고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자신의 정서, 느낌에 얼마나 주의를 기울이는가?’ ‘부적 정서 상태로부터 긍정적 정서 상태로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은 어떠한가?’ ‘자신의 기분에 대한 기분(meta-mood)’은 어떠한가?’ 등의 질문이 정서 인식 명확성의 수준을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정서 인식 명확성에 대한 여러 연구는 정서 인식 명확성이 높은 이들이 보유한 긍정적 심리 자원을 보고했다. 정서 인식 명확성은 일상에서 정서를 억압하지 않고, 솔직하게 표현하는 능력이나 정서를 조절하는 능력, 주관적 안녕감이나 삶의 만족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실제로 정서 인식 명확성이 낮은 이들이 상대적으로 불안을 더 자주 경험한다.
감정을 정돈하라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감정이 짧고 긴 시간 동안 우리의 몸과 마음속으로 들락날락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수많은 감정’들 때문에 불안해 하고 우울해 한다. 감정에 휘둘린 판단을 내리고 실수하기가 다반사다. 그래서 내 감정을 효과적으로 컨트롤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지금보다는 더, 내 감정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작업이다. 특히 감정을 머리 속에서만 맴돌게 하지 말고 ‘기록’으로 남겨 보는 것은 어떨까.
어떤 감정이 떠오를 때면 그에 관한 현재의 내 기분(meta-mood)이나 신체적인 감각 등을 기록해 보는 것이다. 다음으로 현재 내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그 상황에서 내가 ‘왜’ 지금과 같은 감정을 느끼는지 적는다. 마지막으로 지금 상황에 부합하는 적절한 감정 표현이었는가 고민해보면 좋다. 기쁜지, 슬픈지, 우울한지, 불안한지 알 수 없는 애매한 감정 상태를 질질 끌지 말고 신속히 매듭짓는 절차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흘러가는 감정을 그냥 놔두며 살면 감정의 노예가 되기 딱 좋다. 또 한 가지, 감정은 우리의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담으니 이 점을 이해하고 활용하면 어떨까. 특히 우리의 감정 및 표현에는 나에 대한, 나조차도 모르던 정보가 담긴 경우가 많다. 내 감정을 이해하는 것은 곧 나를, 나의 흥미를, 나의 적성과 가치관을 이해하는 한 가지 길이 될 수 있다. 대학원 진학 시절 내게 가르침을 주신 심리학 교수님께서 들려준 말씀으로 이 글을 끝맺는 것이 좋겠다.
저 A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싶다면 A가 언제, 무엇에 대고 화를 내는지 유심히 살펴보라. 바로 그때가 그의 ‘소중한 것’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원문: 허용회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