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환(ㅍㅍㅅㅅ 대표, 이하 리): 지금까지 저희가 10여 분 인터뷰했는데, 오늘이 난이도가 제일 높습니다. 인터넷 뒤져도 후보님 정보가 거의 없습니다(…) 어쩌다 광명 시장에 출마하게 되었나요?
김성순(광명시장 예비후보): 촛불집회 전까지만 하더라도 제가 정치인이 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어요. 세상을 바꾸자, 이런 얘기가 수십 년간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말 뿐이더라고요. 백남기 농민 장례식장에서부터 길바닥 생활을 3개월 정도 하다가, 촛불집회 참여하고 나서 힘을 받았어요. 시민들 속에서 이들과 함께 세상을 바꿔야겠다, 이런 결심을 하게 되었죠.
리: 그런데 광명에 그다지 연고가 없지 않나요?
김성순: 바로 이웃인 금천에서 초등학교 중학교를 나왔습니다. 광명은 서울 전화번호(02)를 쓰고, 서울 택시도 다녀요. 구로, 금천은 광명하고 동일 생활권이에요. 광명 주민들을 보면 30%는 충남, 30%는 호남, 30%는 구로나 금천에서 오신 분들이고요. 여기 오랜 연고가 있는 주민은 10% 정도? 사실 정치적 연고를 주장하시는 분들은 30년 전에 여기에 이사 와서 지역 정치를 하신 분들인데, 지역에서 정치를 오래 한 것으로 연고를 주장한다면 지금 산재한 문제들이 왜 20년 동안 변화가 없었나 하는 고민이 있습니다.
리: 초등학교 중학교를 금천에서 다녔으면, 고등학교는 어디서 다닌 건가요?
김성순: 그때 부모님이 돈을 좀 버셔서 (웃음) 서초동으로 이사를 갔죠. 거기서 돈 있는 집 애들 많이 보면서 문화충격을 받기도 했죠. 당시에 레코드판을 하나 사려면 한 달 용돈을 꼬박 모아야 되는데, 강남 애들은 음악 이야기하다가 레코드샵 가서 바로 판을 사 오더라고요.
리: 음악 이야기를 하는거 보니 어릴 때 음악을 열심히 들었나 봅니다.
김성순: 음악보다는… 어릴 때 애플 컴퓨터에 빠져서 프로그래밍도 하고 그랬죠. 그때는 프로그램을 카세트테이프로 돌렸는데, 컴퓨터만 하다가 성적 떨어졌다고 압수당하기도 하고. 친구랑 매일 컴퓨터 가지고 프로그래밍하고. 그 친구는 결국 한글과컴퓨터에 갔습니다.
리: 1984년이면 컴퓨터 교재도 제대로 없던 때인데(…)
김성순: 없었죠. 컴퓨터 언어가 베이직이랑 코볼 같은 게 있었는데, 친구가 어셈블리를 할 줄 알았습니다. 중학교 2학년이 무서운 인간들이라 한번 빠지면 앞뒤 안 가리고 깊게 빠집니다. 그때는 용산이 아니라 종로4가 세운상가가 메카였죠. 세운상가에 가면 강남이나 여의도에서 온 내로라 하는 중학생들이 자기가 프로그램 만든 테이프를 팔았고. 그거 구경도 하고. 세운상가 지하에 갤러그 만드는 공장에 가서 구경도 했죠.
리: 그러다가 고등학교 가면서 공부 안 한다고 컴퓨터를 압수당한 건가요?
김성순: 그쵸. 막 서울고 갔을 때 황당했던 게, 저는 공부 좀 한다고 콤비 영영한 사전을 사 들고 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막상 같은 반 애들 절반 정도는 영영 사전을 보는 거예요. 그때 와, 여기 교육열 장난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다들 공부만 하지 딴 건 안 하더라고요.
리: 그렇게 좋은 고등학교 나왔는데, 왜 고졸이죠?
김성순: 졸업하고 군대에 다녀와서 미국에서 학교를 갔어요. 근데 이게 학적을 2년마다 갱신해야 하는데, 돈이 없어서 갱신을 안 했더니 자동 퇴학 된 거죠. 그래서 그냥 선관위에 고졸이라고 냈어요. 없는 걸 만들어서 쓸 수도 없고.
리: 아니, 그래도 도피유학 갈 성적은 아닌 듯한데 왜 미국으로…
김성순: 보통은 대학 다니다가 군대에 가는데, 저는 운동에 일찍 눈을 떴어요. 막내 외삼촌이 민청학련 부의장이어서.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운동권과 교류가 잦았습니다. 초등학교 때 막 집에 수배자들 도피하러 오고. 권호경 목사님이 내 방에서 계속 담배 피우다가 어머니한테 혼나고. (웃음) 손학규 의원님이나 김민기 선생님도 한 사나흘 왔다 가시고. 산업선교회 분들도 자주 왔어요. 그래서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시민학교도 가고. 민통련도 왔다 갔다 하고.
리: 완전 좌빨 집안인데(…) 근데 미국은 왜 간 거죠?
김성순: 부모님의 권유였죠. 너 여기 있으면 자꾸 외삼촌하고 엮인다고 그러지 말아라 그런거죠. 부모님은 휴머니즘이 있으셔서, 어머니가 구로 쪽 노동 운동 하는 분들 많이 챙겼어요. 아버지는 서울시 건축 쪽 공무원이었는데 외가 쪽 연좌제로 아웃이 되고… 어머니는 외삼촌이 웬수 같았겠죠. 그런 외삼촌과 그만 좀 엮이라고 미국으로 가게 된 겁니다.
리: 그 외삼촌은 어떻게 지내시나요?
김성순: MB 때 변절을 통해서 지금은 미국으로 가셨어요. 기독교인들이 MB 때 많이 그랬잖아요. 이제 얼굴도 안 보죠. 그래도 외삼촌이 나중에 목사가 돼서 목사님 인맥은 정말 많아요. 같이 당구도 치고 소주도 마시고… 저는 당구 150 치는데, 당구 400 되는 목사님이 250 놓고 치더라고요. 목사들이 양심적으로 치지 않는 거 보고, 저는 하나님은 믿는데 교회는 잘 안 다닙니다. (웃음)
리: 아니, 외삼촌이란 분은 갑자기 웬 목사를(…)
김성순: 유신 시대 때 빨갱이가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목사라고, 아버지가 외삼촌에게 권유했어요. 외삼촌이 고생 많이 하셨죠. 박정희 말년 때, 감옥에 있다가 업혀 나왔는데, 한 군데를 여섯 시간 때리면 내장이 나가잖아요? 신장이 깨져서 나와서 세브란스 병원에 바로 입원하고 막… 이후에 목사님들이 후원도 해주시고 그랬죠. 김근태 의장님 만났을 때도 이런 배경이 있으니까 친해졌죠.
진중권과 술 마시고 노무현의 ‘사이버보좌관’이 되기까지
리: 군대에서 나오자마자 미국으로 가는데 미국 생활은 어땠나요?
김성순: 제대하고 미국에 가는데 노가다하러 간 건지 공부하러 간 건지 모를 정도였어요. 건축가 아들이다 보니 노가다를 가서 페인트칠도 하고 그랬어요. 그러다 느낀 게 미국은 공사를 참 느리고 안전하게 하는구나… 미국에서 공사하면서 안전사고가 거의 없었어요. 돈 중심 사회임에도 사람이 워낙 비싸니까 인간 중심이 되는 거죠. 페인트칠하는데 6시간 일하고 당시 돈으로 120불을 받았어요. 돈 때문이라도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는데, 한국이 그거라도 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리: 미국 가기 전에 한국에서 계속 운동을 하겠다 이런 생각은 없었나요?
김성순: 군대 가기 전에 제가 공장에 한두 달 있었는데, 거기 만난 형을 나중에 노사모 때 만나고 그러기도 했죠. 근데 저는 젊을 때는 깡으로 할 수 있어도, 노동운동을 계속할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어요. 지금도 노동운동 하신 분에 대한 존경심이 있는데, 경제적인 문제를 떠나서 육체적인 힘듦의 문제가… 와 나에겐 이게 힘든 거구나… 노동운동을 할 만큼 훌륭하지 않은, 비겁한 사람이라는 깨달음이 왔어요.
리: 비겁하다니, 지금도 그 후에도 각종 사회운동을 하고 있잖아요?
김성순: 그때는 노동운동이 사회를 바꾸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걸 포기하고 미국에 가면서 자괴감이 있었어요. 강경대 사건을 미국에서 보면서, 내가 뭘 하고 있나 그런 생각도 들고. 나중에 한국 와서 다시 공부도 하고, 사람을 만나면서 아, 이제 길이 다양해졌구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된 거죠.
리: 미국 대학은 왜 그만둔 건가요?
김성순: 돈이 없어서요. 수업 널럴한 날 공장 가서 여섯 시간 알바하고 그러는데 좋은 성적이 나올 리가 없죠. 결국 한국에 다시 와서 컴퓨터를 열심히 했어요. 1995-1996년 이때. 인터넷 처음 생기고 심마니 시절에 컴퓨터 쪽을 했어요. 나모 웹에디터 만든 박흥호 선배가 쓸데없는 거 하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하더라고요.
리: 그래서 그 하고 싶은 일이 뭐였나요?
김성순: 사랑도 좀 했고. 시골 내려가서 지역 운동을 할까 하는 생각을 했죠. 결혼 전에는 의기투합이 되니까, 결혼하고 논산에 내려가서 한 달 정도 있는데 갑자기 그분이 돈까스 경양식이 먹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논산에는 그런 게 없으니까, 대전까지 40분 걸려서 가서 코코스에서 돈까스를 먹었어요. 그러니까 갑자기 그분이 “너무 깊은 시골에 와있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당시 아내였던 분도 공대 나와서 자바 언어 쓰는 컴퓨터 선두주자였는데 시골 와서 지역 운동하려니 힘들죠. 나는 계속 하던 거 하겠다, 당신도 하고 싶은 걸 해라, 이러고 헤어졌죠.
리: 돈까스 때문에 헤어지게 된 건가요 (…) 그리고 솔로로 지역 운동을?
김성순: 충남에서 지역 문화 운동을 했습니다. 그 당시가 문화 운동 초창기라서, 정부에서 돈 나오는 데도 없어요. 지역 축제에 껴서 했죠. 청소년들이 축제에 참여할 수 있는 공간도 만들고. 그러다가 인터넷 시대가 왔는데, ‘인물과 사상’이라는 사이트에 좋은 사람들이 많길래 글도 쓰고 논쟁도 하고… 그러다가 진병장이라는 사람이 ‘오프 만남을 합시다’ 해서 나갔더니 일어나는풀, 빵집아줌마, 이런 닉네임 쓰던 분들이 다 유명인사더라고요. 진병장이 진중권, 일어나는풀이 김정란 교수, 빵집아줌마가 노혜경 시인.
리: 와, 그 추억의 정모는 어땠나요?
김성순: 당시 언론에 대한 토론을 많이 했는데, 그러다 안티조선 운동이라는 걸 해보자고 했죠. 그때 진중권의 문화적 깊이에 충격을 받았는데, 퍼포먼스도 잘하고 트렌드도 앞서가고. 안티조선 운동은 예전하고 달리 시민사회운동의 프레임이 없었고, 문화 운동으로서 21세기를 여는 자극적인 운동이었어요. 지금 의원 하는 김광진이가 막내였고…
리: 전설의 안티조선 운동인가요(…)
김성순: 당시 안티조선운동은 뭘 해도 언론사가 기사를 냈어요. 물론 조선일보만 빼고(…) 하다못해 일일 호프만 해도 신문에 나오니까 신났죠. 그때 노혜경 선생이 초등학생 딸 손 잡고 왔는데, 그 친구가 지금 세월호 조사 정리하는 변호사가 되어있고…
리: 세월이란…
김성순: 얼마 전에 출마 준비한다고 미장원 가서 머리 자르다가 갑자기 생각나서 노혜경 선생한테 전화해서 “나 출마해” 하니까 울먹이시는 거예요. “지금 너가 몇 살이니?” 해서 “이제 50 되는 거지” 하니까 “아 우리가 정말 늙었구나” 이런 얘기도 하고. 제가 그때 서른이었거든요. 시간이 빨리 가더라고요. 그러다가 몇 명씩 자천 타천으로 노짱 모임에 들어가게 되었죠. 사이버보좌관이라는 이름으로. 이광재가 주도를 해서 열 일곱 명. 나이 제일 많은 사람이 서른다섯? 다 젊었죠.
리: 경력의 노무현 사이버보좌관이 그건가요? 캠프에 취업하신 건가요?
김성순: 그때는 노짱이 돈이 하나도 없을 때여서 유급은 아니고요. 우리는 주로 이광재 보좌관이 하던 경양식 집에서 모여서 죽치고 있었죠. 거기서 외상 술도 마시고. 그러면 이기명 선생이 오셔서 카드로 외상 긁어주고 가고… 그때 함께하던 친구 중에서는 노무현 대통령 비서가 되거나 청와대 부속실에 간 친구도 있고, 김대중도서관 연구원 간 친구도 있고… 각자 자기 갈 길로 갔죠. 그냥 거기서 만난 네트워크가 힘이 되고 에너지가 된 거죠.
리: 밥벌이도 안되는 걸 몇 년 동안이나 한 건가요?
김성순: 2002년 대선 때, 여의도로 넘어왔어요. 경선 전에 막 노무현 흔들기가 있을 때, 명계남 선배가 참 열심히 했죠. 노무현 살려내자… 이런 취지로. 대선 국면까지 다들 열심히 했어요. 길바닥에서 춤도 추고, 희망돼지 들고 다니기도 하고.
리: 정말 재미있게 사셨네요.
김성순: 행복했던 시간들이에요. 저는 젊을 때 그런 걸 해본 게 너무 자랑스러워요. 재작년 촛불집회 가면서 젊은 후배들에게 한 이야기도, 이거 안 가면 20년 후에 후회한다고. 장이 날마다 서는 게 아니니까 꼭 가라고. 노무현을 만들던 시간, 노무현 대통령을 만들어서 좋다는 게 아니라, 그걸 함께 하는 과정이 좋았어요. 끝나고 같이 물 한 잔 마셔도 취하는 것 같고.
노무현을 만들던 시간, 김근태를 그리워한 시간
리: 노무현 대통령은 본인에게 어떤 사람이었나요?
김성순: 남자가 어떻게 하면 멋있는지 보여준 사람. 사실 우리 팀이 정말 못된 질문들도 많이 했어요. NL 출신, PD 출신 다 있으니까 격렬하게 토론도 하고, 비판도 하고. 현실정치인에게 우리가 많이 못되게 굴었는데, 노무현은 모르는 건 모른다. 창피한 건 창피하다. 이렇게 솔직했어요. 정치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했어요. 멋있는 척하거나 뭔가 이뤄내기 위해서라기보다 정치인은 이미 들어선 길에서 돌 맞을 각오, 계란 맞을 각오 하고 살아야 한다고. 많은 사람이 욕을 하더라도 우린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 곁으로 가야 하고, 그 사람들이 우릴 거부하더라도 그 곁으로 가야 한다는 얘기를 약주 드시고 한 적이 있어요.
리: 와… 간지…
김성순: 그때는 멋있어 보이려고 한 얘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좀 이해가 가더라고요. 술자리에서 가정사 얘기라던가, 서운하거나 기쁜 얘기도 하는데 참 허심탄회하게 말했죠. 늘 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분. 그래서 남자다웠던 분. 그래서 저도 같이 일하는 동생들에게 늘 솔직하게 얘기하려 해요. 제 약점도 얘기하고.
리: 노무현 대통령하고 술도 많이 마셨나 보네요?
김성순: 술을 같이 마시면 늘 대학생인 딸(노정연 씨)이 옆에 붙어 있었죠. 술을 한잔도 안 하시면서 후보 매니지먼트를 하는? 보통 아내가 하는 역할을 딸이 그렇게 열심히 했어요. 아직도 생각나는 게, 술자리 끝나고 들어갈 때 딸이 팔짱 꼭 끼고 가는 모습. 우리 아버지 세대에 그런 모습 보기 힘든데 매력적인 아빠였던 것 같아요. 후보가 늘 줄담배를 피우는데 안주가 담배였죠. 당신이 많이 태우시니까 우리에게도 편하게 “한 대 피울래? 담배 줄까?” 그러면 눈치 보다가 “예” 그러면 “이거 피워라” 하면서 웃으시고.
리: 대선 때는 어떤 역할을 한 거죠? 선거 후에는 그럼 정식으로 자리를 얻어 일하게 된 거고?
김성순: 주로 길바닥을 돌았죠. 응원전도 하고, 인터넷 선거대응도 하고. 말씀드리기 어려운 활동도 좀 하고. (웃음) 선거 끝난 다음에 사실 이기명 선생이 만약 문화부 장관이 되면 그 밑에서 일을 할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죠. 근데 한나라당에서 ‘다른 건 몰라도 이기명은 절대 안 된다’ 이래서. 그때는 뭐 그까짓 거 안 하면 되지 하고 문화 운동 한다고 못 다한 미련을 해봤어요.
리: 가장 기억에 남는 행사가 있다면?
김성순: 평화의콘서트라고 해서 장충체육관에서 한영애, 이상은, 소냐 등 여성 가수만 모아서 콘서트 기획을 했어요. 전쟁의 피해자는 여성이다, 우리가 왜 전쟁에 반대해야 하는가, 라고 해서 소냐가 시작해서 한영애로 끝나는 공연. 그때 초대가수로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하고 개혁당 김원웅 의원도 불러서 막 노래 부르고 그랬어요. 같은 날 강남에서 윤도현, 전인권이 출연한 비슷한 콘서트가 있었는데 그 연출을 탁현민이 했고 저는 장충에서 했어요. 근데 5,000명 꽉 채워서 내가 이겼어요. (웃음)
리: 그렇게 문화 운동을 하시다가 김근태 의장님 밑에 간 거예요?
김성순: 김근태 의장님이 변하고 싶은 타이밍이었던 것 같아요. 네오 GT. 부드러운 김근태 이미지가 필요한 시점. 머리도 자르고 청바지도 입으시고 하셨죠. GT 쪽 형들이 술이 셉니다. 뭐랄까, 아무래도 노동운동 쪽에서 많이 합류하고 그래서. 면접 끝난 다음 형들이랑 술 먹고 두 번인가 기절했어요. 친구가 저 업고 가다가 옷도 찢어지고. 여의도의 추억들이 많아요.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나고.
리: 김근태 의장님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김성순: 여성성이 참 많이 가미되신 분? 스토리만 보면 민주화 운동, 인권, 고문, 그렇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웃음이 많았어요. 사실 정치인들은 무슨 상황이 되면 쑥 앞으로 나서기 마련인데, 이분은 이걸 꼭 내가 해야 하나? 하는 부끄러움도 많으셨던 것 같아요. 인재근 여사님하고 계실 때 보면, 두 분의 아주머니? 두 분이 아침마다 마주 보고 체조를 해요.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그걸 보여달라고 해서 진짜 두 분이 마주 보고 하는데, 행복한 두 명의 아줌마 같아서 굉장히 다시 보였죠. (웃음)
리: 김근태 의장님이 어떻게 보면 노무현 대통령하고 논쟁도 있었잖아요. 계급장 떼고 토론하자고도 하고.
김성순: 그걸 사람들이 많이 오해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연금에 대한 유혹이 있었고요. 돈이 20조만 있으면 부동산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죠. 근데 김근태 의장님은 이것마저 빼앗기면 노태우 때 증권 부양했듯 다 무너진다는 거고… 의견이 달랐던 건데 말씀이 거칠게 나온 겁니다. 둘 다 가만히 계시다가 빵, 하고 터뜨리는 스타일이에요.
리: 둘 다 성질 있어 보이긴 합니다.
김성순: 근데 가끔 우리 같은 꼬마에게 조언하는 걸 들어보면 두 분 다 거의 같은 말을 하시죠. “이웃한 철학과 늘 손잡고 연대하라. 가장 급하고 아픈 사람부터 도와야 한다.” 이런 얘기. 누구에게 들었는지 모르게 다 똑같아요. “그래서 그 연대론은 어디에서 나온 거예요?” 하고 GT에게 물어보니 “이철승 선배가 해준 얘기야”라고 하더라고요. 내려오는 계보가 있는 거죠. 그러면서 의장님이 덧붙인 게 ‘이웃한 철학과 연대하라고 했지 모든 정당과 연대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용서할 수 없는 세력과는 손을 잡지 말라’고 합니다. 그게 마음에 박혀요. 지금도 지역 활동하고 하면 용서할 수 없는 세력하고도 어쩔 수 없이 웃으면서 지내지만, 절대 손잡을 수는 없는 거죠.
리: 노무현과 김근태라는 시대의 거목과 함께 일한 건 대단한 경험인 것 같은데, 문재인 대통령과 비교하자면 어떤가요?
김성순: 노무현, 김근태, 문재인 모두 학습능력들이 좋은 분들이에요. 정치판은 집중력과 몰입도의 싸움인 것 같아요. 얼마나 다른 의견을 수렴해서 자기 것을 만드느냐의 싸움이니까. 많이 진화된 정치인이 문재인 대통령이죠. 자기를 변화시킨 분입니다. 젊었을 때 사진과 지금 사진을 보면 눈빛의 변화가 보여요. 자신의 감정이나 분노, 인격을 조절해낸 거죠. 커뮤니케이션하는 걸 보면 정말 진화한 형태의 대통령이구나 싶어요. 다음에 어떤 사람이 대통령에 나올지는 모르지만 참 어려울 것 같아요. 국민들 눈높이를 이렇게 높여 놓고 4년 후에 퇴임하면 다음 사람들은 머리 터질 겁니다. 인생 60년 동안 가정 관계, 군대, 청춘 정치 다 완벽한 세팅을 한 사람이니까.
리: 그런 면에서 노무현, 김근태는 참 시대가 아쉬운 분들이죠.
김성순: 예전에 김근태 의장님 팬클럽에서 어떤 사람이 “하늘은 영웅의 입을 빌려 이야기를 시작한다”고 하는데, 김근태 의장님이 2007년에 대선 포기할 때 그 이야기를 기억했던 것 아닌가 싶어요. 자신의 목소리가 하늘을 울리지 못한 것에 대한 허전함 같은 게 느껴졌죠. 노무현 대통령은 당신이 말하는 대로 국민들이 호응을 해주니까 국민이 만든 대통령이 된 거고. 김근태 의장님은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리액션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고. 2008년 촛불집회 때, 청바지 입고 거리에 앉아계시는데 확 늙은 기분? 1년 쉬시니까 많이 힘드셨을 겁니다. 이번에 출마를 준비하면서 마석 모란공원에 다녀왔죠. 저 출마합니다. 꼭 이겨서 올게요, 하고 오는데. (눈물)
그는 이미 최순실을 알고 있었다: 정보의 차원이 다른 사람
리: 그러다 MB정부 들어서는 백수가 된 건가요?
김성순: 의장님이 출마 안 하게 된 상황에서, 문국현 후보 밑에서 일했죠. 그때 좀 중심에서 선거를 해봤습니다.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중요한 일을 많이 맡았고요. 대선이 돌아가는 프로세스를 배운 거죠. 당 의장 선거까지는 해봤지만 대선의 중심에 선다는 게 모든 그림을 한 번에 봐야 하는 건데, 그걸 제대로 본 것 같아요. 그러다가 김영춘 의원님 나올 때 다 같이 나와서 백수가 되고. 2008년은 촛불 때문에 늘 거리에 있고. 이후 남북평화재단에 들어갔습니다. 제가 남북 관계가 끊길 때 민간인으로서는 마지막 협상을 하고 온 사람이라고 하더라고요.
리: 협상이라면 어떤 거죠?
김성순: 남북한 사회단체 간 협상이나, 광역지방자치단체들의 협력 대행 업무를 하기도 했죠. 김문수 경기도 지사 시절에, GM대우가 중고차를 북한에 갖다 주는데 북한에서 정비를 할 줄 모르니까, 김문수 지사가 중고차 카센터를 북한에 지을 테니 그 협상을 해달라고 해서 다녀오기도 했고요. 광역단체에는 남북평화기금이라는 게 있어요. 서울시에는 기금이 1,000억 정도 있습니다. MB 때 한 100억 썼는데 이후에 그런 사업을 하기 어려워져서 박원순 시장 때 꽤 쌓였을 겁니다. 4·27 남북정삼회담 이후에 서울시도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겠죠.
리: 김상곤 교육감님하고 같이 한 경력도 있는데?
김성순: 문국현 캠프 선배가 교육감 대변인으로 가서 같이 하게 되었습니다. 한 달에 한번 가서 혁신교육 홍보를 전문으로 맡았고요. 혁신학교가 무엇인지 해외에 사례 발표도 하고. 김상곤의 혁신 교육을 어떻게 알릴까, 하고 홍보위원으로 일했습니다.
리: 그러다 갑작스럽게 시장에 출마하게 된 건가요?
김성순: 5년 전 문재인 후보 대선에서도 뛰다가 대선 끝나고 모든 업무를 놨습니다. 2년 지났는데 문재인 의원님이 식사하자고 해서 밥을 먹었죠. 당시 제3정당 창당될 것 같다, 당대표에게 힘을 주기보다는 대응전략을 짜야 하는 거 아니냐… 이런 얘기를 하면서 동동주 세 병을 마시는데 문재인의 확고한 의지를 봤습니다. 김무성 지지율이 높을 때였는데, 할 수 있다는 의지를 봤어요. 그때부터 문재인 후보를 도와야겠다고 걱정을 많이 하다가, 주변 몇 명이서 최순실 따라잡기를 시작했어요.
리: 네? 갑자기 왠 최순실???
김성순: 처음 정유라 사진 체킹한 게 저였어요. 주간경향의 정용인 기자가 정윤회를 따라다니고… 사실 최순실을 찾을 거라는 생각은 못 했어요. 정윤회 찾고 정유라 찾자고 기자들하고 정보 공유하면서 하다가, 그러다가 성완종 일정표가 나와서, 성완종 일정표에 대해 해석하고, 돈의 흐름이 어떻게 되는 건지 기자들에게 설명도 해주고. 박근혜 주변인들에 대한 리스트를 만들고 그림을 그려갔죠.
리: 대체 님 정체가 뭔가요…
김성순: 사실 이건 노무현 대통령 선거 때부터 하던 게임이에요. ‘오프더레코드’라는 모임이 있어요. 기자들 절반, 우리 같은 사람 절반 모여서 카페에서 한 달에 모이자고 약속하면, 늘 열 명 정도는 거기 모이죠. 그럼 거기서 서로 정보를 두 개씩 털고 갑니다. 뭐 어떤 후보가 와이프를 때렸는데, 여성의전화에서 봤더니 어느 날짜 기록이 찢어져 있더라. 이런 아티클 가져와서 서로 조합하고 맞춰보고…
리: 와……
김성순: 그때는 찌라시라는 개념이 없었는데, 노통 선거하면서 비슷한 작업들이 있던 거죠. 그걸 정유라를 놓고 하다 보니, 정보를 서로 모아서 교환하고. 누군가 최순실을 찾고 뚫고 그랬죠. 마지막까지 정유라를 가르친 레슨 선생 이름은 뭐냐 이런 것도 보고. 오늘도 무슨 시사지 기자가 전화 와서 “드루킹 이름 혹시 알아?” 그래서 나는 모른다고 그러니까 “너가 모르는 게 어딨어” 이러고… 기자들하고 교류가 많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시장도 잘할 수 있습니다. (웃음) 깔때기를 이렇게 꽂네요.
리: 그러다가 정치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계기가 있나요?
김성순: 노무현 대통령이 잘 하셨지만, 결국엔 괴물의 목만 잘랐던 거죠. 괴물이 더 성장해서 노무현 대통령을 집어삼켰고요. 문재인 대통령은 괴물의 목을 두 개 쳤는데, 아직 괴물의 몸통은 전국으로 흩어져서 세포처럼 꿈틀거리고 있어요. 지역 단체장들이 지역에서 그 괴물들을 토막 내면 흔적처럼 사라질 텐데. 판타지 같은 얘기를 하자면, 대한민국이 흑마법에 덮인 느낌이에요. 지역의 토호들, 고인 물을 정리하지 않으면 그들이 다시 성장해서 국민들을 삼킬 거예요. 저라도 나서서 지역의 그런 문제를 정리해 시민들의 얼굴이 밝아지고 활발해지도록 하고 싶어요. 시민들이 웃어야 그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니까요.
광명시에 ‘한국의 디자인 밸리’를 만들겠다고?!
리: 정책적으로는 어떤 비전을 가지고 있나요?
김성순: 첫 번째, 소통입니다. 광명시가 손학규 지사, 전재희 시장 시절부터 재건축 얘기를 했어요. 구도심의 주민분들은 재건축을 통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환상 속에서 재건축하겠다는 정치인을 20년 동안 지지했고요. 그런데 막상 감정평가가 나오고, 철거를 시작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지 않는 거죠. 꿈은 컸는데, 막상 까보니 별거 없는 거지… 재건축을 하면 돈을 벌 것이라는 환상은 사실 현실을 부풀린 얘기였는데, 막상 별 것 없으니 누가 해먹은 게 아니냐 오해하게 됩니다. 소통이 안 되고 불신의 과정에서 의혹이 제기되고, 시민들이 시청에 텐트 농성을 하고.
리: 음… 소통을 좀 더 구체적으로 풀자면…
김성순: 약간의 횡령, 비리 이런 건 어느 현장에도 다 있어요. 근데 정말로 몇백억이 사라지고 그랬다면, 대한민국 검찰이 이걸 그대로 놔두지 않았을 겁니다. 사실문제는 소통이 안 되니까, 불신의 골이 깊어진 거예요. 정치인들이 현장에 가보지 않고. 조합원 총회 가보니 후보들이 별로 오지 않았더라고요. 조합원 총회 때 밖에서 보면 좀 무서워요. 검정 양복 입은 덩치들이 막 밖에 서 있고. 조합원들이 투표용지 들고 있으면 째려보고. 그럴 때 정치인들이 가서 서 있으면 의지가 되는 거죠. 시장이 수행원들하고 와서 서 있으면 깡패가 때리겠어요? 이걸 시민들이 아니까 옆에서 “비 오는데 줄 서 있느라 힘드시겠네요,” 이런 말 한마디 건네고. 그런 게 사람들에게 위안이 될 수 있습니다.
리: 재건축 문제는 사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너무 복잡하지 않나요?
김성순: 사실 법리해석에 오해가 있어서 생기는 문제도 많아요. 도시정비법은 자꾸 진화하는데 옛날 법안 보면서 비용 지출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경우도 있고요. 그럼 조합이 귀찮으니까 대답 안 하고 있으면 조합이 떼어먹은 거 아니냐 이런 오해가 생기고. 그런 오해만 풀어도 많은 문제가 풀립니다. 제가 시장이 되어서 열심히 듣는 것만 하더라도 50%가 해결될 수 있다고 봐요. 나머지 50%는 법과 제도의 문제고요. 개인과 개인의 골이 깊으면 해결하기 어렵지만, 집단과 집단은 이해관계의 문제기 때문에 오히려 개인들보다 소통과 논의를 통해서 화해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리: 두 번째 정책은 뭔가요?
김성순: 둘째는 일자리입니다. 지금 광명시에 지하철역이 두 개에요. 광명사거리역하고 철산역인데, 둘 다 7호선입니다. 사람들이 버스를 타고 다 여기로 모이는데, 8시 전부터 지하철 타려고 뛰어가야 합니다. 서울로 가는 라인이 하나밖에 없으니까. 결론은 서울에 일자리가 몰려있다는 건데, 만약 광명에 일자리가 있다면 버스나 자전거로 출퇴근할 수 있는 건데.
리: 일자리 유치! 그 빡센 걸…
김성순: 사실 공공근로나 사회적 기업 이런 건 일자리 만드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기업을 유치해야 되는 거죠. 기업이라고 해서 재벌, 대기업 공장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고요. 우리가 잘 아는 화장품 10대 브랜드, 패션 브랜드 기업. 이런 기업들이죠. 시에서 얼마나 혜택을 주느냐에 따라서 충분히 유치할 수 있어요. 광명 출신 청년 뽑으면 일자리 기금을 통해 지원금을 준다거나. 구로나 가산이 아니라 광명에서도 일자리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인데, 현재 정치인들이 말하는 일자리 정책은 구태의연한 측면이 있습니다.
리: 광명이 가질 경쟁력으로 무엇이 있을까요?
김성순: 지금 기업들은 충분히 서울 서쪽으로 옮겨갈 유인이 있어요. 물류 문제, 중국 수출 문제 때문에 서쪽으로 오고 싶어 합니다. 근데 평택은 비싸고, 광명은 부지가 충분하죠. 보금자리 주택 짓는다고 400만 평 확보했다가 지난 정권 때 취소되어서 놀고 있는 땅도 있고요. 기업을 유치해서 일자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다산 정약용이 말한 것처럼, 백성은 밥을 하늘로 알고 산다. 정치인은 백성을 하늘로 알고 살아야 한다. 백성의 밥을 확보하지 못하면 좋은 정치인이 아닌 거죠.
리: 그 외에도 다양한 부지가 있는데, 어디에 쓸 계획인가요?
김성순: 재건축 해소된 부지들도 있고, 광명동굴 앞에 17만 평이 재건축 해소가 되었어요. 아파트를 짓자 이런 얘기가 있는데, 저는 굳이 여기 아파트를 또 지을 필요는 없다고 봐요. 에버랜드가 1970년대 버전, 롯데월드가 1990년대 버전이라면 21세기에는 큰 부지가 필요 없는 놀이동산 모델이 등장할 겁니다. 버츄얼 스튜디오나, 3D 기술이 들어와서 작은 공간에서도 판타지를 즐길 놀이동산이 나올 수 있는데, 17만 평이면 충분하죠. 놀이동산은 특별소비세를 걷을 수 있기 때문에 지자체에서도 매력적인 사업이고 고용도 창출됩니다. 아파트 부지보다는 놀이동산 같은 특별한 공간으로 만들어서 광명동굴도 붐업 시키고 안산, 인천 등 서부 지역에서 매력을 느끼고 광명으로 올 수 있는 관광자원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제 공약입니다.
리: 광명을 베드타운보다는 문화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으신 거네요?
김성순: 지금 광산부흥. 광명, 안산, 부천, 시흥이 각자 특성화를 해서 200만 도시로서 서로 자치할 수 있는 그림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본선 때 후보자들끼리 모여서 협약식 같은 걸 해야 하지 않나 싶어요. 애니메이션은 부천, 공장은 안산, 그리고 컨텐츠는 광명으로. 광명을 디자인 밸리로, 다양한 디자이너들이 꿈을 꿀 수 있는 디자인 혁신밸리로 만들고 싶고요.
리: 디자인?!
김성순: 디자인은 설비 측면에서 사무직과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넓은 부지가 필요하지 않아요. 디자이너들이 쾌적한 환경에서 발상을 다르게 할 수 있는 공간. 그 자체가 명품 건물이 될 수 있고요. 전자 산업의 쌀을 반도체라고 한다면, 모든 산업의 두 번째 쌀은 디자인입니다. 어느 제품이든 어느 기업이든 성능 다음으로 중요한 게 디자인이죠. 한국은 디자이너가 많은데, 인건비는 싸고 고용은 불안하죠. 작은 디자인 벤처들을 광명에 모아놓으면, 중소기업들은 따로 디자이너 고용하지 않더라도 여기서 컨설팅도 받고 저렴하게 디자인을 뽑을 수 있습니다. 놀이동산 맞은 편에 이런 디자인 밸리를 만들면 컨텐츠 도시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고 보고, 미래 성장 동력이 될거라 봐요.
리: 오, 이건 아이디어 좋은데요.
김성순: 화장품 업계의 경우, 기업 매출이 500억 단위인데 이 사람들은 늘 있는 레시피에 어떻게 디자인을 더할까 고민합니다. 이런 걸 디자인 밸리에서 공모전을 하면 훨씬 더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죠. 화장품, 패션 기업들을 유치하는 경쟁력이 될 수 있습니다. 디자이너들도 보통 서울 외곽이나 홍대 인근에 사는데, 광명은 그 지역에서 스쿠터로 이동할 수 있는 거리에요. 아직 한국은 디자인에 대한 해석이 산업적으로 왜곡되었는데 이미 네이버에서 일하는 디자이너들도 접촉하고 있어요. 싸이월드 형용준 사장이 자기가 도시 디자인 위원장을 맡고 싶다는 제안도 했고요. 벤처를 많이 한 디자인 출신의 기업가들하고 더 고민해서 좋은 환경을 조성하고 싶어요.
리: 디자인을 강조하시는데 어쩌다 디자인에 꽂힌 거죠?
김성순: 홍보 일을 많이 하다 보니, 설비를 많이 들이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는 게 디자이너라는 생각이 들었죠. 디자이너는 고용도 불안하고 임금도 적어요. 그런데, 한국의 미래 동력으로 과학자나 기술자를 육성하는 데 돈과 시간 투자가 필요하지만, 디자이너들은 지금 굉장히 공급이 많습니다. 이들이 희망을 가지고 일할 환경을 조성한다면 활력 있는 산업이 될 거라고 봐요.
리: 두 번째는 일자리, 다음은 뭐죠?
김성순: 셋째는 교통 흐름이에요. 광명시가 전철역이 7호선 하나지만 서울, 안산, 부천으로 가는 버스 노선은 좋아요. 근데 광명 안에서 도는 노선이 없죠. 마을버스 노선이나, 자금이 되면 트램(노면전차)으로 해소하고 싶어요.
리: 이건 특별한 정책이라기보다는 당연히 해야 되는 얘기 아닙니까?(…)
김성순: 지금 서울 가는 버스 노선은 좋은데요, 아침에 러시아워에 아주 만원버스에요. 금천에서 어린 시절 보낼 때도 그랬지만 새벽 첫 버스부터 만원버스죠. 지금 광명역이 금천구청역으로 연결이 돼 있는데 이게 문제라고 봐요. 광명역이 광명사거리역으로 연결된다면 또 다른 도시 분위기가 잡혔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금천구청역의 부속역처럼 광명역이 붙어 있는데 광명역과 광명사거리역이 연결되어 있으면 버스로 부천, 서울, 구로 가기 더 편하죠. 그럼 광명사거리가 더 번화하고 상권이 활성화 되었을 텐데. 지하로 파서 연결하는 건 돈이 많이 드니 어떤 방식이 좋을까 고민 중입니다.
리: 지하를 파는 건 예산이 너무 많이 들죠. 사실상 불가능할 것 같은데요(…)
김성순: 그래서 트램으로 연결하는 것도 생각하고 있죠. 친환경 전차라고 해야 하나. 현재 40개 정도 도시에서 쓰이고 있는데, 샌프란시스코나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많이 쓰이죠. 이번에 트램을 지원하는 법이 통과가 된다고 해서, 좀 더 교통 상황을 자세히 검토하고 2년 내로 혁신적인 대책을 마련하려고 합니다.
리: 스타필드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형마트, 이런 게 들어오면 중소상인 문제도 있고 부담스러워하시는 분들도 있죠?
김성순: 이마트 같은 경우는 소상인들하고 경쟁하는 경우가 있지만, 스타필드가 들어오면 스타필드에서 구매하러 오는 분들은 또 따로 있는 거잖아요. 지역주민뿐 아니라 멀리서 찾아와서 구매하는 거라서 지역 소상인에게 영향이 가진 않는다고 봐요. 물론 저가 상품 샵들이 입점을 하게 된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명품 옷, 고급 화장품 이런 고가 형태의 샵들은 자신들이 판단해서 시장성 있다고 판단하면 얼마든지 들어와도 좋다고 봐요.
리: 말씀하시는 정책들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예산이 많이 필요할 텐데, 여기가 수원시나 화성시처럼 예산이 어마어마한 지역은 아니지 않나요? 그렇다면 결국 정부 손에 달린 건데, 예산 얼마 따오느냐의 문제 아닌가요? 그 부분에 대해 본인의 장점이 있다면?
김성순: 7,000-8,000억 사이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그런 분들하고 함께 일하면서 그 보좌관이나 측근들, 선배들이 지금 장관, 차관, 국회의원 다 그렇게 되지 않습니까? 결국 문재인 대통령 밑으로 헤쳐 모여 한 거니까요. 지금도 상갓집에서 만나면 ‘형, 나 광명시장 나왔는데 여기 한 10만 평만 벤처 지정하면 어떨까? 여기 지하를 뚫어보면 어떨까?’ 이러면 ‘현실적으로 얼마 필요한지 정리해서 와’ 이런 얘기도 합니다. (웃음) 저는 예산 문제로는 31개 경기도 시군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자신이 있습니다.
리: 그밖에 광명시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김성순: 가령, 광명시에 축구장이 몇 개 있습니다. 그중 시청 옆 비싼 땅에도 축구장이 있는데요, 이 축구장을 매각하는 대신 다른 저렴한 지역에 다른 축구장을 여러 개 만드는 거죠. 지금 축구장 부지 하나 팔아서 나온 수익으로 다른 축구장 여러 개 지을 수 있습니다. 이런 자산 이전을 하겠다는 거죠. 목적은 그대로 살리면서, 비싼 자산은 매각하고 저렴한 땅에 여러 개를 만드는 거죠. 그런 이전 수익으로 사회복지 사업에 힘을 줄 수 있을 겁니다. 1년에 100억 이상은 만들 수 있으리라 봅니다.
시장보다는 ‘광명시 서비스센터 소장’이 되겠다는 사람
리: 몇 개만 더 질문하고 끝내겠습니다. 지금까지 후보님의 삶 중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은 무엇이었나요?
김성순: 제일 어려운 선택은 후보가 된 거고요. 제일 잘 한 선택은 광명으로 이사 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월에 이사 왔는데, 어린 시절 늘 살던 곳이 보이니까 마음이 따뜻해진다고 할까요. 어린 시절 친구들하고 만나서 밥 먹다 보면 옛 생각도 나고. 잘 왔다고 생각합니다.
리: 준비된 대답이(…) 후보자가 되는 게 지금까지 가장 어려운 선택이었다고 하는 데 어떤 갈등이 있었길래…
김성순: 실제로 10년 전에도 출마 권유를 받았어요. 근데 당시 면접하면서, 시민사회 쪽에서 면접 질문을 하는데, 주민들을 정말 가슴에 품을 수 있느냐고 하더라고요. “솔직하게요?”라고 되물으니 그렇다고 하고. 그래서 못할 것 같다고 하고 그냥 면접장 나왔어요. 10만 명, 20만 명, 30만 명을 내가 품을 수 있을까. 품으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이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에요. 급하게 출근하러 뛰어다니는 사람들 보면서, 구루마 끌고 가는 할머니 보면서 마음 아프고, 미안해야 하고. 이런 걸 보면 정말 종교인에 가까운 느낌이죠. 내가 다른 사람들 대신 아플 수 있는 자격이 되나 하루에 열두 번씩 고민하고. 이런 생각이 오만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저들이 비를 맞는데 혼자 우산 쓰고 있는 게 미안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늘 합니다. 4년 임기 내내 이런 고민을 하게 될 것 같아요. 그런 과정에서 제가 더 성장하지 않을까. 정치는 인간을 성장하게 하는 업종인 것 같아요.
리: 출마 제안은 누가 하셨어요?
김성순: 주변에서 한 스무 분 정도. 계속 안 한다고는 했어요. 사실 제가 약점이 좀 있어요. 일단 당하고 몇 년 떨어져 있었고. 현실 정치에 대한 공백기도 있고. 정치인으로서 화목한 가정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거. 이런 여러 약점이 있으니까 이런 부분을 공격당하기도 하고. 그런데 어느 날 밤 친구가 찾아와서 제가 행복하면 좋겠대요. 근데 지역 활동하면서 고민하고 그러는 제 모습이 행복해 보인다고. 다른 친구는 제가 이 동네에서 한 10년 정치한 거처럼 보여서 좋다고. 그래서 잘 선택했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리: 만약 떨어져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김성순: 연연하지 않으려고요. 지역 어른들이 광명 노리고 왔다가 떨어지면 떠나는 정치인 많이 봤다고 해서, 저는 그냥 여기 살 겁니다. 여기 물가도 싸고, 재래시장에 제 팬클럽도 많다고 했어요. 제가 떨어지면 또 다른 분들이 열심히 머리 아프게 고민하시겠죠.
리: 경선 경쟁이 있는데, 경선에서 떨어지면 상대 후보를 지원할 건가요?
김성순: 물론이죠. 쉽게 말하면 사주대로 살면 되는 거고. 또 다른 후보들이 먼저 출발했고, 지지 기반을 다진 상황에서 제가 그걸 뛰어넘지 못한 반성의 시간으로 한 팀이 되어서 같이 뛰어야죠. 다른 후보들도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리: 스스로 생각하는 ‘김성순답다’는 건 뭘까요?
김성순: 좀 따뜻한 거. 정치인이라면, 주민들과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어떤 분이 와서 야 왜 우리 아들이 이렇게 세금 많이 나왔지? 하면 그건 이거 때문에 이렇다고 설명하고. 12개월 할부로 낼 수 있다고 알려주고. 아 세금에 할부도 있어? 하면 신청하는 법 알려주고. 이런 별거 아니지만 말 한마디 쉽게 나눌 수 있는 사람. 어떤 주민분이 벌금이 나왔다고 해서 ‘이러저러해서 나온 겁니다’ 하고 설명을 잘 해줬더니 그냥 400만 원 벌금을 내셨대요. ‘그거 이렇게 저렇게 하면 좀 깎을 수 있을 텐데요’ 하니까 아니라고, ‘설명 잘해줘서 내가 잘못한 걸 알았다’고 하면서 내셨대요. 사실 누군가 왜 벌금이 나온 건지 설명을 안 해줬으면 기분 나쁘죠. 뭘 잘못했는지 모르고 벌금 내라고 하면. 결국 스킨십의 문제라고 봐요. 다른 후보들보다 제가 광명 내에서 그런 스킨십이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리: 재혼 생각은 없으신가요?
김성순: 만나는 분이 있고요, 아직 초창기입니다. 소개팅하고 몇 번 만나는 중이고요. (웃음)
리: 40대 후반에 소개팅하는 건 어떤 기분인가요 (…)
김성순: 사실 여성 어머니 분을 먼저 알게 되었는데, 그분이 소개팅을 해주신 거예요. 그래서 서로 좀 아는 상태에서 편안하게 만나고 있습니다. 천천히 가야죠. 이 나이에는 사랑이라는 단어 말고, 애정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거 같아요. 같이 행복한 시기를 보낸다기보다는 같이 얼마나 평안하고 행복하게 말년을 준비하는가. 어차피 30년밖에 못사니까.
리: 만약 당선된다면 광명시에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나요?
김성순: 언제든지 불러낼 수 있는, 사회행정 서비스센터 소장 같은? 우리 골목에 문제가 생기면 직원이 오고, 직원이 와서 안 되면 소장이 책임져야죠. 상상을 해보자면 시청 현판 옆에 광명 시민 서비스 센터라고 써 붙이고 싶기도 해요. 괜히 오버한다고 욕도 먹겠지만 서비스센터 소장이라고 기억해주면 좋겠어요.
리: 은근슬쩍 교육이랑 복지 공약 이야기한 거 아닌가요(…) 무상 교복이라든지.
김성순: 그건 양기대 시장님이 다 해놓으신 건데요, 여기서 이걸 어떻게 디벨롭할지 의견 수렴해야 할 부분이 있죠. 디자인이라든가.
리: 아까 디자인 밸리 이야기했는데, 결국 청년이 들어와야 하는데. 교육 문제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김성순: 얼마 전에도 교육장님하고 만나서 정책 교류했는데, 중학교 확보하고 특성화 학교 투자하고. 고등학교만 나와도 직업 가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고 정부가 발표했으니, 그걸 어떻게 광명 현실에 맞게 특성화할까 고민 중입니다. 공부를 선택한 애들은 학원비 지원하고, 음악 선택한 학생들은 거기에 맞게 지원하고. 직업 선택한 친구들은 그걸 지원해서, 아이들이 자신이 못하는 것에 몰려서 버둥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을 찾고 희망을 만드는 게 특성화라고 봐요. ‘현실적으로 광명시 학생들을 파악하고 거기에 맞게 한다’가 제 고민입니다.
리: 정말 소통을 좋아하시는군요.
김성순: “늘 듣겠습니다.”가 제 슬로건인데 정치인이 뭔가 자기가 먼저 단정하고 할 수 있다, 하겠다고 하는 건 나쁜 거라고 봐요. 내 생각도 있지만, 주민들에게 물어보고, 그게 맞다고 하면 실천하는 거고. 항상 자기 생각대로 하다가 사람들이 나중에 반대한다고 수습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오히려 비용이 더 비싸져요. 듣는 비용은 저렴합니다. 왜 시장이 집무실에 앉아있나요? 결재는 차에서 하고, 시장은 현장을 계속 돌고. 현장에서 정책을 파악하고 결정하는 거죠.
리: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김성순: 제가 출사표를 쓰면서 “고향을 만들어갑니다”라고 했어요. 광명시 주민 출신지가 호남 30%, 충남 30%, 인근 30%, 광명 10%. 모두 향우회가 있어요. 하지만 우리가 돈 벌어서 고향 갖다 줄 것도 아니죠. 이제 자녀 세대에게 고향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거죠. 광명이 고향인 아이들. 광명에서 좋은 추억을 만들어야겠죠. 광명에서 학교 다닐 때는 급식도 최고였고, 교복도 주고. 안전하고, 여성이 살기 좋은 도시고. 우리 엄마가 나 낳을 때 얘기 들어보니까 광명은 임산부에게 택시비도 주더라. 이런 광명을 고향으로 추억하게 만드는 디테일들. 개인적으로는 전화하면 꼭 나오는 시장으로 기억되면 좋겠습니다.
리: 마지막으로… 중요한 질문인데 광명시 맛집 좀 알려주시죠 (…)
김성순: 봉자네 순대국이 있고… 광명시장에 홍두깨칼국수가 있습니다. 가성비는 홍두깨가 최고죠. 칼국수, 잔치국수. 냉면 사발에 칼국수를 줍니다. 밤일로에 가면 푸주옥이라고 설렁탕 집이 있는데 아주 맛있습니다. 이 동네 주민들은 코다리 좋아하셔서, 코다리 집이 군데군데 많고. 새마을시장 가면 도로 점거하고 술 드시는 분들이 많은 가게가 있는데 거기도 자주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