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평범한 직장인은 스스로 목적과 목표를 세우는 데 어색하다 못해 인색할 지경이다. 수많은 직장인을 만나봤지만 적어도 ‘이직스쿨’을 찾는 대다수는 ‘길을 잃어서’ 찾아오는 이였다. 직장인이 되기 전에도 직장인이 된 후에도 스스로 설정한 목적 및 목표보다는 남들이 만든 기준에 의해 결정하기 일쑤였다. 유일하게 자의로 결정하는 직업 선택과 결혼도 예외는 아니다. 언제까지 끌려갈 것인가.
목적보다 목표를 쫓다, 아니 좇다
이직스쿨은 (예비) 직장인을 상대로 상담과 코칭을 통해 각자가 바라는 행복한 길을 안내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래서 나름의 행복한 길(Career)을 잃은 이들이 대부분 찾아온다. 그들 중 상당수는 잠시 정해 지거나 혹은 정해졌다고 믿었던 경로로부터 이탈했기 때문에 찾아온다. 물론 대부분은 금세 자기 자리를 찾아간다. 세상이 쉽다기보다는 자신이 가던 길에 대한 확신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천만다행이다. 스스로 목적 및 목표를 세울 수 있으면 그만이다. 적어도 길을 잃을 일은 없기 때문이다. 현재와 같은 불확실한 시대에 ‘정해진 경로 또는 커리어’라는 게 있을까 싶지만, 어느 정도는 정해져 있다. 이미 경험 또는 나이가 많은 이들이 지나간 길을 따라가면 된다. 아니 되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 남들이 보이는 다수의 행동이 내 방향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기준이 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경로와 방향은 대부분 스스로가 만들기 마련이다. 최초 시작은 타인이 만들어놓은 단계를 따라가지만,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나만의 길을 가게 된다. 우리가 방향을 잃는 시점이다. 철저히 목표 중심으로 생각했기에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다 안다고 생각하고 뛰어왔다. 그러나 결국 이 산이 아니다. 체력이 남았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이제는 체력까지 없다.
우리는 방향을 정하는 것에 익숙하게 성장하지 않았다. 학교를 졸업하기까지 선택의 폭과 범주는 국가나 사회가 만들어 놓은 틀 속에 있다. 선택이라고 해봐야 전공 정도다. 이 또한 문·이과 등 더 큰 선택 범주 안의 선택일 뿐이다. 오히려 어떤 전공보다는 그 안에서 몇 등인가가 더 중요하다.
그 순위에 목숨을 걸고 남보다 더 높은 순위에 오르는 것이 목표가 된다. 그렇게 단련된 이가 직장에 와서 과연 스스로 방향을 설정할 수 있을까. 팀원일 때는 그렇게 일을 잘하던 이가 팀장이 되어 일을 하지 못하는 이가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이직스쿨을 찾는 이들의 대부분은 삶 속의 자기 결정권 유무가 불분명했다. 스스로 자신의 진로에 대해 충분히 고민해보지 못한 이들이었고, 단순히 고민만 했고 실제 실천은 거의 하지 못했다. 가장 안전해 보이는 선택을 하는 것을 주변으로부터 강요받았으며 그 선택으로 상처를 받았고 크나큰 후회가 있었다. 스스로 확신 없는 선택을 하면서 선택을 위한 ‘고려의 대상이나 안건’을 만드는 것을 잊은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우리는 어렸을 적부터 목적 없이 ‘목표’만을 좇는 삶을 살아왔다. 아무 이유 없이 몇 개의 숫자놀음으로 동년배와 경쟁을 해야 했고, 주변으로부터 1등을 해야 한다는 무언의 기대와 압박 속에 살아왔다. 그러면서 대통령을 꿈꾸거나 단순히 TV에 나오는 여러 직업을 가진 이들을 동경했다. 지금은 그걸 그냥 한낱 꿈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저 되는대로 살아왔다. 남들에게 지지 않기 위해 뒤처지지 않기 위해. 그러면서 서서히 스스로 목적을 설정하는 방법을 잃어버렸다.
목적과 목표, 구분이 필요하다
우리는 목적(방향)을 잃어버렸다. 아니, 다른 사람, 부모님, 선생님, 어른들이 제시해 준 목표만 쫓다 보니, 사다리 타기, 줄 세우기 경쟁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틀 안에 갇혀 버렸다. 초중고 비슷한 커리큘럼 속에 친구, 형, 동생 등과도 순위 경쟁을 벌였다.
꼭 그래야만 했을까? 스스로 무언가 정하지 못하고 나보다 나이 많은 이의 방향 및 도달 지점 설정에 익숙해져 갔다. 그렇게 대학을 가고, 졸업을 하고 취업을 준비하는 즈음에는 그분들이 취업을 했을 시절과는 다를 정도로 많이 변했음에도 말이다. 취업 또는 여차저차 취업한 시점에 이제 아무도 확실하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이가 없다. 그래서 취업과 커리어는 결코 ‘어른’들의 논리에 치우쳐서 선택하면 안 된다. 특히 지금과 같은 시대에는 말이다.
- 목표(Goal): 어떤 목적을 실현하려고 하는 실제적 상태 및 단계, 위치 등의 구체화된 정량적 지표
- 목적(Objectives): 실현하려는 일 또는 상태, 나아가려는 방향을 뜻하며, 정성적인 의미의 목표라고도 함
이를 커리어 또는 일(job)과 연관 지어 설명하면
- 목적: 직무에 대한 역할(Role)과 책임(Responsibility or Accountability)
- 목표: 특정 시기 및 상황에 따라 본연의 역할과 책임 수행을 위한 달성 및 통제 가능한 정량적인 지표. 매년마다 꼭 해야 할 것(Routine)과 상황에 따라 별도로 수행해야 할 일(Project)로 분류할 수 있다.
단편적으로 현재 하는 일의 목적과 목표는 말할 수 있지만, 대부분 충분한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것이 대부분이고, 설사 갖추었다고 해도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거나 조직에서 만들어준 것이 대부분이며, 다양한 상황에 따라 매번 변화가 필수이지만, 이를 온몸으로 거부하거나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목적 설정에 따른 목표를 구성하고 실행하는 것을 잃어버린다.
이제 조금 스스로가 선택해보려고 하지만 여전히 선택을 위해 넘어야 할 장벽이 높다는 것도 인정한다. 어렵게 들어간 직장도 나름의 기준으로 모두를 줄 세우기에 바쁘고, 누가 더 낫고 누가 더 못한 것의 모호한 경계 속에서 탈락 또는 저성과자라는 쓰디쓴 아픔을 의도치 않게 겪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스스로 목적과 목표를 설정하고, 나아가 스스로가 하는 일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그러면서 조직 안팎의 특정 업계에서의 ‘존재감’이라는 것이 생기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비슷한 일을 하지만 그 속에서 각자가 가진 특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다르게 보일 수 있다. 만약 그 다름을 스스로가 만든 테두리 속에 추구한다면 조금 더 주도적이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러한 제안에 “내가 왜?” 또는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는데…”라는 마음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스스로가 설계한 삶 속의 행복을 즐기지 못하고 남한테 끌려가고만 있다고 느낀다면, 문제가 있다. 단지 무거운 책임과 그에 따르는 과도한 역할을 외면한 채 스스로를 달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이 그러하다는 작금의 현실이 너무나도 안타깝다.
일과 삶 속의 목적과 목표 구분과 실천이 전문가로 가기 위한 시작점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최소한의 방향 설정만은 스스로 해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여러 분야의 다양한 직장인을 코칭하면서 느낀 것은 모두들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스스로의 방향 설정’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겪는다는 사실이다. 성향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그게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던 것 같다. 실수하면 안 되고 실패는 더더욱 용납할 수 없다. 그래서 늘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한다.
다이어트를 예로 들면 이해가 쉽다. 다이어트를 하는 목적을 ‘살을 빼기보다는’ 건강하고 활기찬 삶을 살기 위해서라고 규정짓고 스스로에게 납득할 만한 이유를 제시해줘야 한다. 많은 이가 다이어트를 실패하거나 도중에 그만두는 이유는 일정한 목표만을 좇았기 때문이다.
8년 전, 강남 모 체육관의 바디 챌린지에 참여한 적 있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참여했고 5주 동안의 노력 끝에 1등을 차지했다. 사실 1등을 목표로 한 것은 아니었다. 더 나이 먹기 전에 살을 빼보고 싶었고, 그에 따른 충분한 빌미나 동기가 필요했을 뿐이다. 1등한 이후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목표를 달성했다고 납득했고 충분했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운동도 식이요법도 할 이유가 사라졌다. 목적은 없고 목표만 있었기에 목표 달성 이후에는 지속할 이유가 없어졌다.
목표는 일종의 단계이다. 목적은 그 단계로 계속 나아가기 위한 동기 같은 것이다. 목표는 채찍이고, 목적은 당근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어떤 사안인가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적어도 둘 간의 나름의 조화가 없이는 어떤 행동이든지 오랫동안 지속되기 어렵다.
성격에 따라 간혹 ‘절대적 완벽’을 추구하기 때문에 결정 자체를 미루면서 타이밍을 놓치는 이들도 있다. 왠지 모를 결정의 망설임과 함께 “혹시 실패하면 어쩌지” 하는 실패에 대한 공포심 등이 결정을 미루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미루는 사이에 스스로가 생각하는 완벽함으로부터 멀어짐을 인지 못한다.
또한 결정 과정 속의 복잡한 심경이 스쳐가는 것도 충분히 이해한다. 이렇게 처음 겪는 “상황 또는 감정을 어떻게 관리 또는 통제할 것인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한 번도 걸어보지 않은 익숙하지 않은 길을 익숙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천천히라도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늘 대부분 어디로 갈지는 몰라서 이전 또는 남보다 낫거나 나아지려는 성향 자체를 잊기도 한다. 이른바 가만히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차츰 그 일을 하면서 최초 가졌던 동기를 잃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목적을 잃어버림으로써 적절한 목표를 잃게 되고, 스스로가 만든 경로 안에서 앞으로 나아가려는 것 자체를 스스로 가로막게 될 줄은 전혀 알지 못한다.
물론 모두들 처음이 어렵다. 하지만 어려운 문제를 접하고, 풀어보고,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사람은 성장한다. 실수와 실패, 시도와 도전 그 가운데 성장과 성공을 동반한다. 만약 한 평생 실패를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처음 실패를 겪으면 큰 좌절을 겪지만, 매번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는 롤러코스터 같은 삶을 산 사람은 한두 번의 실패에는 충분한 ‘회복탄력성’으로 언제든 성공 스펙트럼을 넓힐 수 있다. 결국, 다양한 시도와 도전만이 성공확률보다는 실패율을 낮추는 인생의 게임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 목적 및 목표를 설정하고 적절한 시도와 도전이 있어야 진짜 전문가
기업의 목적은 “어떤 기업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싶은가”가 될 것이며, 목표는 “○○위 기업 또는 ○○○ 매출액” 등 산술적인 진출(진입) 또는 단계를 가리킨다. 사람으로 적용해 보면, 목적은 “신뢰가 가는 사람”이 되고, 목표는 “특정 분야에 있어 전문적 식견을 가지고 ○○업계 또는 조직에서 인정받는 사람”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사람의 목표는 ‘정량적’인 부분을 왜 넣지 않았는지 물어볼 수 있다. 물론 넣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만든 목표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지 되묻고 싶다. 남 또는 내가 만든 기준과 관점은 언제든 바뀔 수 있기도 하고, 특정 분야의 순위를 구분하고 집착하는 순간 누군가 짜 놓은 프레임에 갇힐 수 있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에는 그냥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은 거기에 특별한 조건들이 붙기 시작했다. 훌륭하다는 말에 남들과 비교우위를 점할 수 있는 요건이 붙지 않으면 ‘훌륭하다고 인정하거나, 평가받기가 쉽지 않다. 자칫 자화자찬이라도 하면 소위 자뻑이 될 수도 있다.
꼭 그래야 할까? 다른 사람들보다 눈에 쉽게 띄는 것들이 뛰어나다고 해서 과연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럼 적어도 나보다 돈을 더 많이 버는 사람들 또는 더 높은 직위나 명예를 가진 이면 훌륭한 사람인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적어도 최근에 그래 보이는 이들이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뉴스 속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경제적으로는 많이 가졌다고 해도, 인간적 성숙도는 부족해 보인다.
앞으로의 세상은 꼭 특정 조직에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전문가로 인정하는 분위기는 점차 사라질 것이다. 과거 제조업에서만 유효했다고 믿었던 피터의 법칙(Peter’s Principle)이 현대의 한국 사회 기업 속 리더들의 무능함을 설명하는데 가장 적합한 이론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최근의 여러 사건만 봐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각자의 모습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비슷해 보이는 목표를 좇아 남보다 더 나은 삶을 살려고 하는 것들이 줄어든다. 무작정 경제적 목표만을 달성하려고 했던 모습에서 많이 벗어난 듯한 모습이다. 여전히 주류는 ‘돈’이지만, 그 안에서 어떠한 이들이 사회 지도층이자 리더가 되어야 하는지 사회가 점차 성숙되어 가고 제자리를 찾는 느낌이다.
당연히 미래 사회 속 전문가도 이런 흐름 속에서 만들어질 것이다. 스스로 ‘방향’을 설정할 수 있고, 그곳으로 나아가기 위한 여러 단계별 목표 제시를 통해 개인 및 조직을 리드할 수 있어야 전문가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자신이 맡은 바 일만 잘해서는 한계가 분명히 있다.
과거에 주목받았던, 운영을 잘하는 일반적인 제너럴리스트는 점차 설자리를 잃어갈 것이다. ‘제너럴 스페셜리스트’ 또는 ‘스페셜 제너럴리스트’가 자신의 조직 및 사회생활을 오래도록 이어나갈 것이다. 나아가 특정 분야의 전문가 또한 소멸될 것이다. 그와 연결된 수많은 연결성도 고려하고 동시에 이론과 실전으로 무장한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살아남은 사람들이 결국 세상을 리드하고, 그들로 인해 긍정적으로 변화할 것이라 믿는다.
목적에 의한 목표 선택이 가능한 이가 더 많은 기회를 갖는 세상
결국 지금 당장 더 많이 받고, 덜 받고 가 중요한 게임이 아니라, 누가 더 얼마나 오래도록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존중 및 존경받으면서 살아남느냐가 중요한 세상으로 변모할 것이다. 이미 우리 30-40대 전후의 사람들이 100세까지 사는 삶이 앞으로 전개될 것인데 앞의 베이비 붐 세대처럼 50 전후, 늦으면 60 전후에 은퇴를 생각하는 이들처럼 삶을 설계한다면 오산이다.
남은 수십 년의 삶을 책임질 수 있을 만큼의 기반을 그 이전까지 마련할 수 있다면 괜찮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만약 아니라면, 단순히 커리어를 몇 년 또는 몇십 년을 두고 도박을 하는 선택을 해서는 안될 것이다. 오히려 남은 반 세기를 과연 어떤 일을 하면서 살게 될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일을 하고 싶지 않다”는 답은 답이 아니다. 답이 잘못됐다. 적게는 수십 년에서 최대 100년 가까이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내린 결론 치고는 너무 성급하다. 그 보다는 어떤 일을 해야 더욱 오래도록 할 수 있고, 그 일을 오래도록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나는 ‘어떤 류의 전문가’가 되어야 하고, 그 전문가가 되기 위해 오늘 그리고 이번 주 올해 안에 어떤 목표를 달성해야 하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 안에서의 다양한 시도와 도전은 필수적이다. 당연히 원하는 목적 및 특정 상태를 위한 한 두 번의 시도로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쉽게 되는 거라면, 남들이 갖고 싶어 하거나, 바라는 특별한 가치를 가졌을 리 없다. 소위 가치가 없다고 봐야 한다.
기왕이면 뚜렷한 방향성을 담보한 상태의 목적은 “내가 되고 싶은 전문분야에서 ○○○ 수준을 갖는 것”으로 하고, 이를 위해 현재 소속된 직장 속의 역할과 책임을 어느 정도나 수행해야만 가능한지를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이를 스스로 만들어내지 못하거나 이런 식으로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면 스스로 오랜 기간의 직장 생명을 보장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이와 같은 준비를 평소에 얼마나 빨리 그리고 체계적으로 준비하는가에 따라 내 인생의 항로가 달려있다. 살아남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다. 지금 강한 사람은 아무 의미 없다.
원문: 김영학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