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바쁜 출근길을 역주행하고 있다
전쟁터에 나가는데 탄창을 깜빡하다니! 나는 집으로 돌아가며 두고 오면 안 되는 것들을 생각한다. 지갑? 없으면 굶거나 걸으면 된다. 스마트폰? 어차피 연락 올 사람도 없는걸. 노트북은 조금 다르다. 나는 호시탐탐 노트북을 두고 와서 오늘부터 파업 1일을 외치는 날을 떠올린다. 회사는 각성하라!
출근한 지 10분 만에 돌아온 집. 나의 발걸음은 부엌으로 향한다. 그리고 재빠르게 커피믹스 몇 봉지를 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휴, 네가 없는 회사생활은 상상할 수 없지. 우리 사무실은 왜 커피머신 같은 것을 놓은 걸까?
직장인의 혈관에는 피 대신 커피믹스가 흐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군가의 눈에는 모자란 커피처럼 보이겠지만 커피믹스는 한국만의 독특한 커피다. 오늘 마시즘은 위대한 커피믹스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전쟁에서 꽃 피운 인스턴트커피
한 잔의 커피를 만드는 데에는 생각보다 많은 노력이 들어간다. 원두를 고르고, 굽고, 갈아서 추출한다. 심지어 만들 때마다 맛이 다르다.
1901년, 사토리 가토 박사는 이 모든 과정을 스킵한 ‘녹는 커피’를 개발한다. 인스턴트커피의 원형이 된 이 커피는 물만 부으면 완성이 되는 획기적인 녀석이었다. 문제는 맛도 획기적으로 없었다는 거. 연구가 너무 바쁜 박사들 빼고는 이런 커피를 마실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전쟁이 터졌다. 1차 세계대전, 남북전쟁을 거치며 커피는 병사들을 각성시키는 전략적인 음료였다. 하지만 커피를 제공하는 군납업자들이 커피에 모래를 타는 비리를 저질러 흙 맛이 나는 커피를 마시지 않으려면 원두를 골라 직접 로스팅을 하고, 그라인딩을 해야 했다. 이러다 전쟁은 뒷전이 될 지도 몰랐다.
결국 인스턴트커피가 군대의 보급품으로 결정되었다. 인스턴트커피에 향을 첨가한 네슬레의 네스카페가 대표적이다. 인스턴트커피는 악몽 같은 전장 속에서 군인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짧고 확실한 수단이 되었다. 그리고 전쟁을 따라 행진하던 인스턴트커피는 6.25 전쟁이 끝난 한국 땅에 도달한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커피, 커피믹스를 만들다
우리 조상들은 오래전부터 커피를 즐겼다. 물론 양반 나리의 특권이었다. 커피라는 존재가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은 것은 인스턴트커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우리는 오랫동안 인스턴트커피를 ‘커피’라고 불렀다. 졸지에 일반적인 커피는 ‘원두커피’라고 설명을 붙여 부르게 되었지만.
하지만 한국인이 보기에 인스턴트커피는 빠르지만 만족스럽지 못했다. 사람들은 익숙하지 않은 커피의 쓴맛을 잡기 위해 설탕이나 계란을 투하했다. 또한 사람마다 커피의 배합비율이 달라 커피를 타고도 욕을 먹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그냥 자기가 커피를 타면 되는데.
1976년 12월, 이러한 불만을 일시에 없앤 인스턴트커피의 끝판왕이 나온다. 바로 커피믹스의 발명이다.
인스턴트커피는 물론 분말 크림인 ‘프리마’를 개발한 동서식품은 봉투 안에 커피와 설탕, 프림이 한 번에 들어있는 커피믹스 ‘맥스웰 하우스’를 만들어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한국식 빨리빨리 문화는 전쟁보다 급박하니까.
한국을 빛낸 최고 발명품 5위가 커피믹스?
지난해 특허청에서는 소셜 미디어 사용자를 대상으로 ‘우리나라를 빛낸 발명품’을 설문 조사해 발표했다. 당연히 1위는 훈민정음이었고, 그 뒤로 거북선과 금속활자가 순위를 장식했다. 그런데 5위가 ‘커피믹스’였다.
물론 커피믹스가 커피의 대중화를 이끌었기 때문에 나온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커피믹스는 실제로도 크고 작은 발명이 들어간 과학의 결정체다.
초기의 커피믹스는 녹차 티백처럼 네모난 모양이었다. 하지만 1987년을 기점으로 날렵한 스틱형으로 모습을 변하게 된다. 봉투의 끝에 설탕을 배치해 원하는 대로 당도를 조절하기 위해서다. 멋진 센스다.
커피를 보호하기 위한 비닐 포장도 발전을 거듭했다. 그냥 보기에는 1겹 같지만 3-4겹의 얇은 포장지가 산소, 빛, 수분을 차례차례 마크한다. 그중 1겹에만 머리카락 굵기의 구멍을 뚫어 포장을 쉽게 뜯도록 만들었다. ‘이지컷’이라는 기술이다. 최근에는 유기화합물 센서에 이 기술이 응용되었다고.
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한국 차, 커피믹스
한 여행사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한국에서 가장 맛있는 한국 차는? 53%의 지지율로 커피믹스가 1위를 장식했다. 압도적인 간편함. 그리고 해외의 인스턴트커피와는 비교가 안 되는 맛이 큰 이유였다(수십 년간 커피믹스 시장에서 내부 경쟁을 한 결과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해외로 돌아갈 때 커피믹스를 사 갔다느니, 커피에 민감한 외국인이 커피믹스를 마시고 기분이 좋아졌다느니는 너무 많이 말했다. 커피믹스에 연예인 사진이 걸리게 된 것도 외국인을 대상으로 가짜 커피믹스를 판매하기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최근에는 동남아시아를 거쳐 중남미에도 커피믹스가 수출된다. 커알못이라고 하기에는 커피 생산지에서도 환영을 받으니 참으로 의아한 일. 다만 커피믹스의 창시자이자 압도적 1위인 동서식품만은 국내 잔류를 고집한다. 합작사인 크래프트푸즈에서 ‘맥심’의 상표권을 가졌기에 애초에 동서식품의 맥심은 국내에만 판매한다고 계약을 했다고. 이래서 계약이 중요하다.
커피믹스의 시대는 끝이 날까 도약할까?
하루가 다르게 커피전문점이 생기는 만큼 커피믹스 시장은 줄어들고 있다. 1조 원을 돌파했던 커피믹스 시장은 이제 9000억대로 내려왔고, 커피 맛의 기준 역시 커피믹스에서 아메리카노로 바뀌었다. 커피믹스는 고급 원두를 넣기도 하고, 설탕과 카페인 등을 빼는 고급화 전략을 취하지만 내려가는 흐름을 막기에는 힘들어 보인다.
하지만 생각해본다. 요순시대 같은 평화가 오지 않는 이상 커피믹스가 이 땅에서 사라질 일은 없다고. 커피믹스야말로 39년간 전쟁 같은 우리의 삶을 위로해줄 가장 빠르고 정겨운 친구이지 않은가. 오늘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일상을 대비해 커피믹스를 챙겨 나간다.
원문: 마시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