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분법적 사고, 그 치명적 매력
우리는 주위의 사물이나 개념들을 몇 가지의 범주로 분류하지 않으면 못 배기는 성격을 지닌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것도 될 수 있으면 정확히 두 가지로 나누어야만 한다. 중간에 무엇인가 들어가는 것은 영 개운하지가 않고 뒷맛이 씁쓸하다. 이러한 예는 주위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몇 년 전 TV에 나온 한 여성이 ‘180cm’ 라는 기준으로 남자들을 정확히 두 부류로 명쾌하게 나누어준 사건은 아직도 많은 남성들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아마 라이거가 한국에서 태어났으면 ‘저건 호랑이냐, 사자냐?’ 라는 물음을 갖고 싸운 사람이 이미 여럿 되었을 것이다. 개중 몇몇은 이미 한 번쯤은 철창 신세를 졌을지도 모르겠다. 이건 농담이 아니다. 사소한 것을 가지고도 술집에서 시비가 붙어서 살인사건이 나는 예를 우리는 뉴스에서 많이 봐왔지 않던가? 라이거는 이분법적 사고를 가진 이들에게 있어서 대단히 불편한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아무튼 이와 같이 뭔가를 단 두 가지 범주로ㅡ대개 이 두 범주는 한 차원 상에서 양쪽 끝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ㅡ나누려는 방식의 사고를 우리는 이분법적 사고(dichotomous thinking)이라 부른다. 아쉽게도 Bayesian은 역사에 대해 조예가 깊지 않기 때문에 이분법적 사고의 원시적 형태가 어떤 것이었고, 어떤 식으로 역사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왔는지에 대해 구체적인 예를 들어주기는 힘들다. (아마 그럴 수 있었으면 되게 폼났을텐데!)
하지만 적어도 현대 사회에서 이분법적 사고가 어떠한 방식으로 나타는지에 대한 예를 들어주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다. 우리 주변에서 매우 쉽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분법적 사고에 대해 조금만 더 민감해진다면, 우리는 이분법적 사고가 이미 주변에 널리 퍼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있어서 조금의 어려움도 없으리라 확신한다.
진보와 보수, 이상한 이분법적 사고
현재 우리 주위에서 이분법적 사고가 위력을 발휘하는 가장 대표적인 예는 정치적 성향의 분류법, 진보/보수의 단 두 부류로 분류하는 방식이다. 물론 이러한 이분법적 분류법의 더욱 원시적인 형태는 군사정권 시기에 ‘너님 콩사탕? yes or no?’ 식의 매카시즘적 사고일 것이다. 하지만 군사정권이 퇴출되고 국민의 손에 의해 뽑힌 민주정부가 들어선 지금도 이러한 사고방식은, 담배가 꺼진 후에도 방 안을 유유자적하는 담배연기마냥 우리의 머릿속에 남아 있다ㅡ아니,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다.
대선을 앞둔 현재의 정국에서 그토록 외쳐대던 ‘정책선거’는 이미 실종된지 오래이며, 선거판의 중심에는 오직 단 두 명의 ‘화신’들만이 서 있다. 그들 중 하나는 ‘군사정권의 후예’ 이고, 다른 하나는 ‘참여정부의 가신’ 이다. 선거판은 오직 진보 대 보수의 대결구도를 중심으로 짜여 있으며, 다른 이슈들은 감히 들어올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질까? 국민들이 정책 검증 능력이 없어서? 다른 후보들이 지명도가 너무 낮아서? 아마 이러한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라 생각한다. 이미 다들 알고 있다시피, 사실 판은 다 짜여 있었다. ‘진보와 보수’의 대결 구도로. 필요한 것은 단지 이 대결 구도에서 얼굴마담 역할을 할 사람 두 명이었다.
그 구체적인 인물이 박근혜냐, 문재인이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이미 사람들의 머릿속에 보수 대 진보의 대결구도가 자리잡은 지금의 상황에서 이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보수의 적장자가 권력을 잡느냐, 아니면 진보의 후계자가 권력을 잡느냐일 뿐이다.
Bayesian이 보건대, 이러한 점에서 지금의 대선판은 차라리 사극에 가깝다. 원래 사극에서는 중심 플롯의 전개가 가장 중요하며, 이에 도움이 되지 않는 부수적인 사건들 따위에는 신경 쓰지 않는 법이다. 중요한 것은 주인공과 악역 사이의 대결구도일 뿐이다. 다른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분법적 사고, 그 근원적인 문제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방식에는 많은 문제가 따른다. 이해를 돕기 위해 다음과 같은 상황을 한 번 상상해 보도록 하자. 여러분들이 국영수 기말고사를 앞두고 있는 고등학생이라 생각해 보자. 문제는 20문제, 한 문제당 배점은 5점, 시험 시간은 50분이다. 우여곡절 끝에 시험이 끝나고 1주일 뒤, 여러분들에게 다음과 같은 성적표가 날아온다.
국어 : 잘함 / 영어 : 잘함 / 수학 : 못함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아마 여러분들이 이런 성적표를 받아든다면, 어이가 상실의 시대로 접어들게 될 것이다. 어쩌면 여러분들은 “지금 선생님 저흴 놀리시는 겁니까?”라고 질문할지도 모른다. 그러한 답변이 납득이 되겠는가? 아마 아닐 것이다. 특히 ‘못함’을 받았는데, 자신의 점수가 반 평균쯤에 위치해 있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이라면 더욱 거세게 저항할 것이다. 그런 학생들은 채점 기준이 무엇인지, 왜 자신이 ‘못함’ 에 속하게 되었는지 꼬치꼬치 캐물을 것이 뻔하다.
하지만 선생님은 이렇게 말한다. “국어, 영어, 수학의 세 과목에서 잘 했는지/못했는지에 따라 여러분은 8가지로 분류될 것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아마 여러분은 아마 교사의 자질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구체적인 점수를 내놓으라고 요구할 것이다. 이는 굳이 실제로 해 보지 않더라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상황임에 틀림없다.
왜 사람들은 위와 같은 상황을 이상하다고 생각하는가? 그 이유는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창시절 동안 성적을 ‘점수’, 즉 일종의 ‘숫자’ 의 형태로 받아왔을 것이다. 그런데 이 ‘숫자’라는 것이 웃긴 게, 어떤 지점을 기준으로 집단을 가른다는 게 사실 말이 잘 안 된다. 운전면허 시험이야 60점을 기준으로 합격과 불합격을 가른다지만, 사실 꼭 60점을 기준으로 하여 합/불을 나누어야만 하는가? 그런 결정에 어떤 논리적인 근거는 없을 것이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수능 최저등급제라는 것이 있다. 만약 어떤 대학에서 최저 등급을 3등급으로 설정했다고 해 보자. 그런데 그 해 수능의 3등급 커트라인(최저점)이 70점이었다고 가정해 보자. 아마 69점을 받은 학생은 떨어졌을 것이고, 71점을 받은 학생은 붙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70점이라는 숫자가, 이 두 학생이 대학에 와서 얼마나 공부를 잘 할 것인지에 대한 절대적 기준이 되는가?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70점이라는 것은 학생들을 줄세우고 선별하는 과정에서 객관적으로 사용할 기준이 필요하기 때문에 설정한, 필요하기는 하지만 임의적인 기준일 뿐이다. 이와 같이, 어떤 특성을 ‘숫자’로 측정할 수 있는 경우, 여기에 어떤 ‘기준’을 세우는 작업은 다분히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선 긋는 사람 마음이라는 것.
진보와 보수,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가?
사실 ‘진보’니 ‘보수’니 하는 것도 일종의 심적 속성이기에, 생각해보면 정도의 차이지 그 사이에 어떤 본질적이고 뛰어넘을 수 없는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태어날 때부터 보수이고, 진보였던 사람이 있었을까? 박근혜가 아무리 박정희의 딸이라지만, 태어나면서부터 보수의 스푼을 물고 태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진보/보수에 유전적 영향이 전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나 진보주의자에 해당되지 않는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약간의 보수주의나 진보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고, 사실 그것도 영역에 따라 일관적인 것도 아니다. 동성애자의 성적 취향을 인정하는 사람이 청소년의 투표권 인정에 대해서는 대단히 비판적인 입장을 갖고 있을 수 있다.
다시 말해 보수나 진보는 어떤 사전에 정해진 ‘세트메뉴’ 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진보’ 라든지 ‘보수’ 라는 속성이 매우 대단한 것처럼 생각하며, 둘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어떤 질적인 격차가 있는 것처럼 여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많은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그리고 많은 자연현상들의 경우) 많은 경우에 심리적 속성은 연속적인 것으로 파악되며,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몇 가지 범주로 나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진보/보수가 종합선물세트와 같은 것처럼 애초에 패키지로 주어졌으면 나았을까?
심리적 속성이 여러 가지의 ‘범주’로 분류되기 힘들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예는 ‘성격’ 이다. 현재 심리학계에서 가장 널리 인정받으며 사용되는 성격 이론은 ‘big five’ 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성격을 구성하는 요소는 크게 다섯 가지인데, 그것들은 개방성(Openness), 성실성(Conscientiousness), 외향성(Extraversion), 우호성(Agreeableness), 신경증적 성향(Neuroticism) 이다.
이들은 대체로 상호 독립적인 요소들로, 인간의 성격을 구성하는 다섯 개의 주축 노릇을 하는 것들이다. 이 다섯 가지를 함께 측정하는 성격검사들이 존재하는데 (한국에는 NEO-PI 또는 MMPI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어 있다), 검사를 받고 난 후 검사 결과는 검사를 받은 사람이 이들 다섯 가지의 차원 상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지를 알려주는 형식으로 주어진다.
즉 MMPI의 검사 결과는 ‘개방성 좋음’ ‘성실성 나쁨’ 이런 식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방성이 숫자로 어느 정도이고, 성실성이 숫자로 어느 정도에 해당되는지의 형식으로 주어진다. 아, 참고로 MMPI 는 검사를 받는 사람이 검사를 받는 동안 구라를 치는지, 안 치는지를 탐지할 수 있는 척도(허위성 척도)까지도 내장하고 있다. 그러니 MMPI 검사를 받는 동안에는 거짓말 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자신에게 이롭다.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된 검사 결과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현재 군에서는 징병검사 시 KMPI를 받도록 되어 있는데, KMPI는 MMPI의 축소판 검사지에 해당된다.)
그런데 인터넷에 널리 퍼져 있는 심리테스트들은 성격을 범주와 같은 것으로 취급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혈액형 성격론이다. 이 녀석은 쉬운 상대다. 그냥 무시하면 된다. 일본에서 가장 먼저 발생하여 한국으로 건너온 것으로 추측되는 이 괴상망측한 검사(?)는, 인간의 성격을 혈액형에 따라 네 가지 범주로 분류(?)해 준다.
물론 이러한 분류방식은 완전히 엉터리이다. 혈액형과 성격이 유전학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연구가 없을뿐더러, 실제로 혈액형 별로 성격이 다른지에 대해 국내에서 연구가 진행되었는데, 이 연구에서는 그러한 연관에 대해 사실무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외에 별자리 심리유형을 비롯한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거의 모든 심리검사가 전혀 근거가 없다. 그런 것들은 그냥 무시해 버리면 된다.
모두가 신뢰하는 MBTI, 하지만 신뢰도는 바닥?!
그러나 다음 상대는 상당히 만만치 않은 상대다. 인간의 성격을 범주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두 번째의 성격검사는 놀랍게도 한국에서는 이미 널리 퍼져있는 ‘MBTI’ 이다. 이 검사(?)는 의외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검사이다. Bayesian은 트위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자기소개 란에 MBTI 유형을 적어놓은 것을 볼 수 있었다. INTP이니 뭐니 등등…
안타깝게도 이러한 분류법은 완전히 엉터리이다. 현재 MBTI는 주류 심리학계에서 완전히 사장된 심리검사라 할 수 있다. 만약 이것을 사용하면서 권위를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반쯤 돌팔이라 봐도 좋다. 아까 예로 든 시험 이야기는 MBTI를 빗댄 것이다. MBTI는 네 가지 차원에 대해 둘 중 하나의 부류로 사람들을 할당해 주는 검사로, 총 16가지의 성격 유형으로 사람들을 나누어 준다.
이러한 분류방식에는 여러 문제가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이렇게 단 두 부류로 나누는 것은 아까 언급했던 것과 같이, 49점과 51점 사이에 무슨 큰 차이가 있는 것인 양 왜곡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오히려 사람들 중 대부분은 각각의 차원 상에서 중간 정도에 해당되는 성격 특성을 갖고 있다. 어떤 차원에서 보통 사람들과 특별히 다르다고 간주될 만한 정도의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하지만 MBTI는 이렇게 연속선상에서 파악되어야 할 특성을 이분법적으로 분류하면서, 두 집단 사이에 큰 차이가 존재하는 것마냥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매우 잘못된 것으로, 심리측정학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두 번째 문제는 신뢰도(reliability)의 문제이다. 좋은 심리검사라면 같은 사람에게 반복적으로 시행했을 때 비슷한 결과가 계속하여 나와야 한다. 만약 어떤 아이에게 IQ검사를 반복적으로 시켰는데 80, 120, 100 이런 식으로 숫자가 나온다면 아무도 IQ검사를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놀랍게도 MBTI의 신뢰도는 별로 좋은 편이 아니다. 인터넷 축약판의 경우에는 신뢰도가 더욱 낮다. 아마 답을 고를 때 동전던지기를 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렇게 신뢰도가 낮은 검사를, 그것도 집단 분류의 목적으로 사용할 경우, 오분류(misclassification)의 위험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MBTI의 네 차원 중 하나인 외향-내향의 차원에서 평소에는 대략 100점 만점에 55점 정도를 받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이 사람이 어느 날 MBTI를 할 때 평소와는 컨디션이 좀 달라서 49점을 받았다고 쳐 보자. 이런 일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MBTI의 결론에 따르면 이 사람은 외향적인데도 불구하고 내향적인 것으로 분류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를 산출하는 성격검사는 믿을 수 없다.
이 외에도 몇 가지 테크니컬한 문제들이 존재하지만, 여기서는 이 두 가지를 지적해 두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요약하자면 첫째, MBTI는 연속선상에 있는 속성을 범주적인 것인 양 왜곡함으로써 성격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막는다. 둘째, MBTI는 신뢰할 수 없는 검사다. 이 두 가지 이유만으로도 MBTI를 쓰지 않을 이유는 사실 충분하다. 솔직히 Bayesian의 마음같아서는 재미로라도 별로 해볼 가치가 없는 검사라고 말하고 싶은데, 만약 독자들이 MBTI를 할 기회가 있더라도 절대 깊이 믿지는 않았으면 한다.
자, 그럼 마지막으로 원래 하던 얘기로 돌아가서. 과연 ‘진보’ 와 ‘보수’ 가 이분법적으로 분류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 MBTI의 경우를 참조했을 때, 그리고 사례들을 바탕으로 과감히 추측하건대 대답은 ‘No’이다.
그러면 왜 우리 사회에 이토록 진보와 보수 간 골이 깊어져 있고, 갈등이 심화되는가? 나의 두 번째 추측은 ‘그것은 여러 심리학적 기제를 통해 일어난다’ 이다. 사람들이 어떤 문제에 있어서 한 쪽의 입장을 갖게 되면, 그것을 바꾸기 힘들게 되고, 나아가 점점 그 입장을 강화하게 되는 여러 가지 심리학적 근거들이 있다. 지면 관계상 여기서 모두 소개할 수는 없으므로 다음 글로 대체하도록 한다.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간단하지 않으며, 또한 쉽게 파악되는 것도 아니다. 이분법이라는 간편한 잣대를 현실에 들이댐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정보가 그 과정에서 손실되는지에 대해서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부디 우리가 살아가게 될 먼 미래에는 그러한 이분법적 사고가 조금이나마 완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