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를 소비하는 시간보다 콘텐츠를 다 즐기고 난 후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긴 경우, 대개 나는 그것을 ‘좋은 콘텐츠’라고 여기는 편이다. 그런 의미에서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내 기준에 엄청나게 좋은 콘텐츠. 어떤 대목에서는 현웃 터트리면서 읽다가도 또 어떤 대목에서는 ‘헐 내 생각을 읽은 건가?’ 싶어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쉬지 않고 단숨에 후루룩 다 읽었다. 문제는 다 읽고 난 다음이었다. 머릿속에 오만 가지 생각이 마구잡이로 치닫고 맴돌았다. 차분하게 앉아 거대한 먼지구름처럼 피어난 생각의 가닥을 잠재우고 나니, 한 가지 거대한 질문이 남았다. 그건 팔딱거리는 활어회같이 통통 튀는 책의 문장과 내용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꽤 철학적인 것이었다.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프로와 아마추어
‘프로’라는 이데올로기는 가혹하다. 그 이데올로기의 핵심은 책 속의 내용을 빌려 보면 아래와 같다.
평범하게 살면 치욕을 겪고, 꽤 노력을 해도 부끄럽긴 마찬가지고, 무진장, 눈코 뜰 새 없이 노력해봐야 할 만큼 한 거고, 지랄에 가까운 노력을 해야 ‘좀 하는데’라는 소리를 듣고 결국 허리가 부러져 못 일어날 만큼의 노력을 해야 ‘잘하는데’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꽤 이상한 일이긴 해도 원래 프로의 세계는 이런 것이라고 하니까
- 박민규,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127쪽
이 책의 주인공은 아마추어의 세계에 속하고 그 정신을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어쩔 수 없이 자기를 속여가며 프로의 세계에 말려 들어가 고통받으며 표류한다.
나중에 파이트 클럽의 타일러 더든 같은 친구의 도움으로 아마추어리즘의 정수, 이를테면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라는 문장으로 표현되는, ‘삼미의 정신’을 되찾는 유쾌한 여정을 그리는 것이 이 책의 전체 내용이다. 이 책은 경쟁과 성취에 뒤덮인 팍팍한 프로의 세계에 여유와 즐김의 미학을 조명하게 만든다.
정말로 ‘프로의 세계’는 악일까? 그곳은 고통과 번민만 있는 곳인가? 아마추어리즘으로의 회귀 만이 행복으로 가는 그랜드 라인이란 말인가? 골 D. 로저의 말처럼 원피스는 라프텔에만 있는 건가?
내 경우 따뜻한 물로 샤워한 뒤 팬티만 입고 보송보송한 이불에 들어가 넷플릭스 〈마인드 헌터〉를 볼 때 느끼는 ‘편안함’과 ‘여유’가 주는 즐거움이 있다. 또한,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보내는 시간에서 느끼는 ‘공감’과 ‘함께’가 주는 행복도 실재한다. 이른바 ‘아마추어’의 세계에서 느끼는 행복이다. 물론 이것도 좋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나 외의 다른 사람의 ‘인정’과 ‘평가’, 그것을 동력원으로 삼아 빡시게 일하고 성과를 만들어 낼 때 느끼는 ‘고양감’과 ‘자기효능감’도 있다. 나와 함께 하는 동료들이 내게 거는 ‘기대’, 그리고 그것에 부응하고 싶다는 욕망도 엄연히 존재한다.
게다가 서로의 기대에 각자 부응하며, 동료들과 협업해서 뭔가를 이루어냈을 때 느끼는 그 짜릿함은 어마어마하다. 즉 ‘프로’의 세계가 주는 행복과 쾌락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래. 글로 적고 보니 더 확신이 든다.
내면의 포트폴리오
인간은 입체적인 존재며 한 인간이 행복을 느끼는 곳은 프로와 아마추어, 양쪽의 세계에 공히 존재한다. 각 세계에서 느끼는 행복의 종류와 형태가 다를 뿐이다. 중요한 건 그 ‘프로’와 ‘아마추어’ 간의 밸런스가 아닐까? 요새 젊은 친구들(…) 말로 하면 워라밸.
그리고 사람마다 개인의 행복을 최대화할 수 있는 최적의 ‘프로의 행복’과 ‘아마추어의 행복’ 간의 비율이 다를 것이다. 그렇기에 극단적으로 ‘프로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겠지. 내 주변에 비교적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은 대개 가족이나 여가, 그리고 커리어와 성취감이 주는 행복의 균형을 잘 유지하는 것 같더라.
그런데 생각보다 소수라는 게… 게다가 한 명의 사람에게 있어서도, 그 사람의 주변 환경과 시기에 따라 그 속의 프로/아마추어 비율도 바뀐다. 미친 듯이 일만 하던 워커홀릭이 결혼이나 자녀의 탄생으로 인해 그 밸런스가 바뀐다든가 하는 경우 말이다. 그렇기에 뭔가 상황이나 심경의 변화가 생겨서 내면의 프로/아마추어 가중치가 바뀌었는데 현실이 그것을 따라가지 못할 때 번민과 고통이 시작되는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나 자신을 아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소크라테스의 말은 쉽지만 정말 어렵다. 이 급변하는 세상은 내 속의 프로/아마추어가 주는 행복의 포트폴리오를 암호화폐 그래프처럼 수시로 요동치게 만든다. 그래서 자기 내면의 프로/아마추어 밸런스를 찾는 건 갈수록 어려운 일이 된다. 그렇기에 더더욱 지금 나의 행복을 최대화할 수 있는 프로/아마추어 밸런스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충분히 시간을 들여 자신의 내면을 꾸준히, 주기적으로 탐구해야 한다.
무슨 법정 스님이 이더리움 사고 가즈아 외치는 소리 하냐고 할 수 있지만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내면을 향한 탐구는 위내시경이나 대장 내시경으로 실제 속을 들여다보는 주기보다 훨씬 더 빈번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내면의 포트폴리오를 자주 업데이트하지 않으면 시류에 휩쓸려 원하지도 않은 걸 추구할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 특히 요즘같이 다 같이 SNS에서 본인의 행복을 ‘뿜뿜’하는 상황에서는 그 확률은 더욱 올라간다.
승진, 투자, 상장, 인수 합병, 이직 등 프로 세계에 속한 것뿐 아니라 데이트, 여행, 여가, 취미, 몸매 등의 아마추어 세계의 속한 것들까지 수많은 행복의 ‘뿜뿜’이 넘쳐난다. ‘뿜뿜’ 자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라캉 말처럼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거라면 혹은 본인 내면이 아니라 남들의 선망과 시기를 겨냥한 거라면 너무 불안하다.
자기 발견이나 자기 탐구 없이 ‘나에게 더 좋은 것’이 아니라 ‘남에게 더 좋게 보일 만한 거’를 추구하며 불행해 하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지켜봤다. 가장 ‘핫’한 학습 주제를 수시로 바꿔가며 매번 그 과정을 SNS에 업데이트했지만 결국에는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자기 계발이 아닌 자기 괴발(…)을 달성하는 것도 수차례 보아왔다.
그런 것을 지켜보면서 과거의 나를 반성도 하고 미래의 나에게 경고를 보내기도 했다. 내적 만족을 탐구하고 그것을 토대로 쌓아 올린 게 아닌 것들이 모래 위의 성이자 공갈빵 위의 토핑이 되는 걸 보면서 나는 더욱더 나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을 늘리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래서 나는 의식적으로 계속 내 속을 탐구하려 한다. 내가 행복해지는 방법은 나만 아니까. 그러니까 앞선 질문의 답은,
내 속에 있으니 계속 찾자.
원문: limyoungj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