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19일 ‘심리학 4.0’ 시리즈의 두 번째 강연인 ‘경쟁심리 보고서: 승부욕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서 승부욕, 경쟁심리의 실체를 심리학적으로 알아보고, 건강한 승부욕을 기르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승부욕은 과연 어디에서 왔으며, 그 실체는 무엇일까요? 학문에 따라,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 설명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심리학 전공자이므로 심리학적인 차원에서 승부욕의 실체를 풀어보고자 했는데요. 이를 위해 제가 채택한 관점은 바로 진화심리학(Evolutionary Psychology)입니다.
진화심리학은 진화학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심리/행동의 원인을 밝히려는 학문으로, 현재의 인류가 지금과 같은 마음의 습관, 기질 등을 가진 것은 그것을 보유하는 것이 생존/생식에 유리했기 때문이라는 전제를 둡니다. 승부욕에 진화심리학적인 관점을 적용하자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가능해질 겁니다.
우리가 경쟁심, 승부욕을 가진 것은 그 기제가 생존/생식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원시 경쟁과 현대 경쟁의 차이
결론적으로 당시의 인류나 지금의 인류나 ‘승부욕 메커니즘’ 자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원시 시대에서의 경쟁 양상과 현대 문명사회에서의 경쟁 양상이 판이하다는 것이고, 그에 따라 원시 경쟁과 현대 경쟁 간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오늘날의 사회문화적 맥락에 맞는 승부욕 구현은 어렵다는 것이 핵심 주장입니다.
승부욕, 왜 발휘하기가 쉽지 않은 것일까요? 그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대의 경쟁이 얼마나 복잡한지를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 자연인 대 자연인의 경쟁이 아닌, ‘경쟁 시스템’ 하에서의 체계적인 경쟁이 주가 되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승부욕을 자극하는 사건들을 우리는 일상에서 종종 만납니다. 내 주위 사람이 나보다 더 잘 나가는 것 같다거나, 선생님이나 부모님으로부터 심각한 조언을 들었다거나, 동기부여에 관한 책이나 강연을 보았다거나, 기타 ‘이대로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결심을 만드는 어떤 사건을 만나는 등.
그러나 우리를 치열한 발전적 과정으로 이끄는 승부욕은 잠시뿐, 불타올랐던 마음은 금세 식어버리고 맙니다.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오길 반복하는 것이죠.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승부욕을 가로막는 요인은 과연 무엇이 있을까요?
마법 같은 하나의 열쇠가 있다면 참 좋으련만 인간, 혹은 인간이 만들어낸 사회라는 것이 그리 단순하게 돌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승부욕에 관여하는 요인들은 매우 다양하며, 그 층위도 여럿이지요. 승부욕이란 개인적인 문제이면서, 동시에 사회문화적인 배경에 영향을 받는 것이기도 합니다.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개인 내적 이유 중 우리가 주목해볼 것 중 하나는 바로 ‘실패 공포(Fear of failure)’입니다. 패배, 잃을 것이 두렵다면 우리는 과감히 목적지를 향해 내달릴 수 없습니다. 지킬 게 많을수록 안정과 타협을 바라는 법이지요. 물론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일입니다. 만용을 경계하고 신중히 목표를 탐색해 나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기제죠.
문제는 실패에 대한 공포가 현실과 맞지 않게 거대해, 우리의 도전 욕구 자체를 억누르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실패에 대한 현재의 두려움은 과연 적정한 수준인가?’ 이 부분에 대한 고민은 꼭 필요합니다. 강연 현장에서는 이 ‘실패 공포’를 더욱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실패 공포에 대한 간단한 심리 테스트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누구에게나 실패 공포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누구나 동일한 실패 공포를 갖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결과적으로 실패 공포를 겪는다는 현상 자체는 동일해 보일지언정 무엇 때문에 실패 공포를 겪는지 원인만큼은 제각각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누군가는 실패로 인해 부모님, 선생님 등으로부터 관심을 잃거나 그들을 속상하게 만드는 것을 무엇보다 두려워합니다. 누군가는 실패 경험을 통해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수치, 당황, 무능감 등이 두려워 실패 공포를 느낍니다. 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가치가 평가절하되는 것이나 미래가 불확실해지는 것이 무엇보다 두려워 실패에 대한 비정상적인 공포를 갖기도 합니다. 과연 나는 무엇 때문에 실패를 겁내는가? 꼭 고민해볼 문제입니다.
승부욕을 위한 사회적 요건: 공정성
한편 승부욕에 관여하는 사회문화적 맥락 역시 간과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온전히 승부욕을 발휘하기 위해 꼭 지켜져야 하는 것은 바로 ‘공정성’에 대한 약속입니다. 심리학자 러너(Lerner)는 그의 공정한 세상 이론(Just world theory)을 통해 인간에게는 자신이 속한 세상이 공정하다고 믿고 싶은 본능적인 욕구가 있다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공정성이 중요한 이유는 곧 세상살이에 대한 우리의 예측 가능성을 높여주기 때문입니다. 내가 비용과 노력을 투자하는 정도에 따라 어떤 결과물을 받아들지 그에 관한 예측이 가능할 때 우리는 더 현실적이고 장기적인 인생 계획을 수립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내 삶에 대한 ‘통제감’을 얻지요. 바로 ‘내 삶의 주인은 바로 나’라는 생각입니다.
공정성이 무너지면 승부욕은 꺼져버리기 쉽습니다. 왜냐고요? 말 그대로 ‘할 맛’이 나질 않을 테니 말입니다. 노력한 만큼 대가를 받으리라는 신뢰와 예측이 가능해야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운동장이 심각하게 기울어져서, 혹은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리스크가 있어 노력해도 안 된다는 생각을 품는다면? 승부욕은 고사하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태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개개인이 승부욕을 발휘하고 열심히 삶의 목표를 가꾸어 나가도록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공정성, 룰(rule)에 대한 각별한 관심이 필요합니다. 헬조선, 금수저, 부의 세습, N포 세대, 신(新)계급이론 등. 이것들만큼 평범한 개개인을 맥 빠지게 만드는 표현들도 없을 것입니다.
마치며
약 90분간 진행된 강연이었기에 내용이 적지 않으므로 일부분만을 요약해 정리해 보았습니다. 언젠가 다른 곳에서, 다른 기회를 통해 승부욕 강연을 다시 할 수 있다면 그때 나머지 이야기들을 빠짐없이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혹은 운이 좋아 승부욕을 주제로 책을 쓰거나 다른 칼럼을 쓰면 그때 승부욕에 더욱 자세한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럼 나중에 다른 강연이나 글을 통해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원문: 허용회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