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시장근본주의”적 대전환은 1981년 레이건의 대통령 선출로 시작되었다. 유명 영화배우였던 그는 흥미롭게도 할리우드 내에서 연기력보다 정보력 또는 정보활동으로 더 알려졌다. 그는 1940년대부터 아내 낸시와 힘을 합쳐서 할리우드 내의 “공산주의자”를 색출해서 FBI에 비밀명단을 넘겼다. 확인할 방법은 없으나, 찰리 채플린이 졸지에 “공산주의자”가 된 것도, 레이건 같은 이들이 “음지”에서 노력한 덕분이다.
매카시 마녀사냥이 시작되자마자 그는 커밍아웃했다. 맥카시 위원회에서 그는 반공산주의 신념을 공개적으로 확인해 주었다. 당연하게도, 레이건은 노조를 세상의 무엇보다도 혐오했다.
트로이 목마 레이건의 노조 탄압
대통령이 되고 나서 그가 제일 먼저 한 것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레이거노믹스를 통한 경제정책의 대전환이 아니다. 항공사 관제사 노조와의 한판 승부였다. 관제사 노조는 대선 선거 이전부터 단체협상 문제로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당시 민주당 카터 행정부와 사이가 좋질 않았다.
노조는 화가 잔뜩 났다. 그래서 급기야 민주당이 아니라 공화당의 레이건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노조의 요구사항을 전향적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레이건이 약속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들의 지지가 레이건 당선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레이건은 여하간 압승을 거두었다.
레이건의 승리와 함께, 관제사 노조는 다시 단체협상을 요구하고 별다른 진전이 없자 주저 없이 파업에 돌입한다. 13,000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파업이었다. 레이건이 도와줄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맥카시 마녀사냥 시기를 성공적으로 살아온 레이건은 그리 순진한 사람이 아니었다. 돌변한다. 관제사 노조 파업을 국가와 공익에 대한 중요한 도전이라고 선언한다. 48시간 이내에 복귀하지 않으면 해고 절차에 들어갈 것이라 공언했다. 또한, “필수사업장”의 파업에 해당하는 만큼, 해당자를 형사처분할 것이라 했다. 복귀냐 감옥이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최종통보였다. 관제사 노조는 완강했다. 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복귀를 거부했다. 그 순간까지 “설마?” 하는 생각을 했다 한다.
그러나, 레이건은 즉시 해고와 투옥 절차에 돌입한다. 파업참여자는 블랙리스트에 올려서 유사업종에서 일자리를 찾을 수 없게 했다. 철저하고 처절한 응징이었다. 관제사 노조 위워장은 레이건과 악수하며 카메라 플래시를 온몸에 받은 지 불과 몇 달 만에 감옥에 갇히게 된다. 노조도 허가 취소 당한다. 블랙리스트는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1993년 클린턴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자, 그들은 복권된다. 그러나 이미 늦어 버렸다. 남아 있는 자가 손에 꼽힐 정도였다.
노동자니 노조니 소리하지 말라는 영국의 대처
레이건은 영악한 사람이었다. 노조에 대한 혐오증 때문에 한풀이고자 한 게 아니다. 기업과 사용자에게 명확한 메시지를 주었다. 고용과 해고는 기업의 자유다. 기업은 자유로이 하시라는 신호였다. 그 이후 미국의 사업장에서 벌어진 일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는 이제 가고 없고, 레이거노믹스를 말하는 이도 이제는 없다. 하지만, 그가 시작했던 곳에서 이름은 남겼다. 워싱턴의 한 공항은 지금 “로널드 레이건 공항”으로 불린다.
대서양 건너편에서 대처도 마찬가지였다. 광부들과 일대 전쟁을 벌였다. 해고와 투옥의 연속이었다. 대처는 레이건보다 더 솔직했다. 노동자니, 노조니 하는 소리하지 말라 했다. 세상은 어차피 20% 정도가 움직인다고 공언했다. 나머지는 순종의 미덕을 배우라 했다. 이걸 배우지 못하는 자에겐 매질로 가르치겠다는 솔직대담함, 그게 바로 대처였다.
사실 이런 물가안정 중심의 경제 운영이 좋은 정책인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의견이 갈린다. 흥미롭게도 이런 정책을 주도했던 층에서도 그랬던 모양이다. 대처 정부 경제정책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Alan Budd가 인터뷰에서 “실수”로 한 얘기가 이런 면에서 꽤 시사적이다. 1991년 인터뷰에서 이 양반이 그랬다.
“ .. [통화주의 정책이 옳은 방식인가에 대해선 정책당국이나 그 배후에 있던 사람들도 의심이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한가지 동의한 게 있다. 즉 통화주의가 실업을 증가시키는 아주 좋은 방식이고, 실업 증가는 노동자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는, 너무너무 바람직한 방식이다. 마르크스 식으로 표현하자면, 노동의 산업예비군을 재창출하고 자본은 고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자본주의의 위기를 만들어 내려고 했던 것이다.” (출처: Capitalism and democracy at cross-purposes)
21세기의 보수주의는 노동자의 절대항복을 요구하는가?
학문으로서의 “통화주의”와 정치공학으로서의 “통화주의”는 이렇게 구분되고, 또 역사적으로 연결된다. 1980년대의 우울한 에피소드는 그 이후에도 세계 여기저기서 고개를 내밀었다. 2013년의 한국도 그런 것일까? 최근의 사태를 “연출”하고 있는 “고위관계자”들은 왠지 1980년대를 면밀히 연구하지 않았을까 하는 착각이 든다. 세상을 늘 삐딱하게 보는 나의 착각이길 바란다. 진심이다.
chanel espadrilles2012 Best of MFA Awar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