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파이어 지가 라스트 오브 어스를 가리켜 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 ‘시민 케인’에 비유하면서 칭송하였을 때, 수많은 게이머들은 드디어 게임이 사회 내에서 당당한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고 기뻐하였다. 실제로도 근 5년 동안의 게임 네러티브들은 지난 게임 역사에 비하면 게임의 상호작용성을 인지하면서도 영화의 서사를 차용하여 둘의 시너지를 일으키는 혁신을 이룩하는 데 성공했다.
게임이 다루는 내용은 이제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최소한의 서사가 아닌, 게임을 통해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게임은 나날이 혁신에 혁신을 거듭하며, 게임 산업은 사회에서 존경받는 위치로까지 신분 상승이 일어날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왜 부모와 게임을 공유하지 못하는가?
이런 낙관론에 초치기는 미안하지만, 그런 낙관론에 앞서서 우리 게이머들은 한가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봐야 한다.
“게임이 그렇게 위대한 경지(시민 케인과 더 라스트 오브 어스처럼)에 오를 수 있다면 (혹은 현재 도달했다면), 왜 그런 훌륭한 게임들을 게이머들이 아닌 모든 사람들, 특히 우리와 가장 가까운 부모들과 공유할 수 없는 걸까?”
대단히 멍청한 질문처럼 보이지만, 여기에는 현재 게임 산업이 가진 중요한 ‘문제점’이 숨어있다.
게이머에게 있어 부모란, 아마 게임 바깥에서 만나는 최종보스의 이미지에 가까우리라 생각한다. 그들 대부분에게 있어 게임은 자식의 뇌를 파먹는 악마 정도로 인식된다. 때문에 게이머들은 게임 바깥에서 게임이 던져주는 최악의 시련과 맞먹는 난제들 – 소프트 화형, 콘솔 박살형, 감금, 폭행 등 – 을 맞이하기 일쑤다.
하지만 그런 부모-자식 세대의 갈등과 별개로, 게임이 주는 ‘재미’라는 보편타당한 요소에 초점을 맞춘다면 생각 외로 부모-자식 사이에 게임은 하나의 공통화제가 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식탁에서 뻘쭘하게 날씨 이야기나 학교는 어땠니 같은 추상적인 이야기와 별 공감대도 형성이 안 되는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보다는,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경험’과 재미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게임은 공통의 취미생활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충분하다.
물론 새로운 문화를 나이 드신 부모 당신들 세대들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부모세대들은 바보가 아니다. 솔직히 개인적인 경험에 의하면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식보다 더 현명하다. 하지만 그들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대단히 느리다. 어머니나 아버지께서 스마트폰을 구입했을 때, 자식들이 당신에게 그 용법을 가르칠 때의 ‘답답함’을 떠올려보자. 새로운 것을 배우는 속력이 느려질수록, 결국 옛 것에 더 집착하게 된다. 결국, 나이가 든다는 것은 정치적 성향을 떠나서 보수화될 수밖에 없는 서글픈 운명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부모세대가 게임을 생리적으로 거부하는 것과는 좀 다른 문제다. 기억을 더듬어 보자. 그러면 생각 외로 부모들이 자식이 게임을 하는 장면을 ‘관심 있게’ 지켜보는 일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또한, 부모세대(특히 한국의)는 유흥이나 문화활동에 대해서 대단히 짜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죄악시’한다. 자식들이 게임을 비생산적인 헛짓거리로 파악하는 일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며 아마도 내일도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스트레스를 풀거나 하는 문화 자체가 없다고 결론짓는 오류를 범하지 말라. 부모님들이 뭘 하는지, 유심히 잘 살펴보면 각자 자신만의 방법으로 문화를 즐기고 향유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대부분 자식세대들이 비웃는 ‘드라마’라던가, 아니면 영화나 독서 등에서, 또 의외로 예술영화 관람하는 데서 50~60대 아주머니나 아저씨들을 찾아볼 수 있다. 자식에 대해서 비생산적인 취미를 터부시하며 자식을 몰아붙이기는 게 다소 모순적으로 보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그런 ‘취미 없는 삶’을 영유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정말 부모세대에게 게임을 자신 있게 보여줄 수 있는가?
그렇다면 부모 세대들은 ‘전혀’ 게임을 할 수 없단 말인가? 아니 질문을 바꿔서 부모세대는 게임을 하지 않는단 말인가?
이 문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최근 한국에서 스마트폰 게임으로 성공하고 있는 애니팡이나 드래곤 플라이트, 모두의 마블 같은 게임을 떠올려보자. 그들의 성공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남녀’노’소라는 것이다. 게임을 전혀 할 것 같지 않은 어르신들조차도 간간히 스마트폰을 꺼내서 이들 게임을 즐기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것만으로 카톡 인기 게임훈장을 받아야 한다. 그것이 일 매출이 천만원이 넘든 1억이든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전혀 게임을 하지 않을 것 같던 부모세대들이 게임을 할 수 있게 했다는 그 점만으로 대단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 둘은 훈장이나 감사패나 공로패나 뭐하여간 받을 수 있는 유형/무형의 무언가를 꼭 받아야 한다.
도대체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내가 라스트 오브 어스를 할 때의 이야기이다. 한밤중에 라스트 오브 어스를 하는 중이었는데, 아버지가 내 방으로 스윽 들어오시고는 게임을 하는 것을 한 3~4분 정도 지켜보셨다. 늘 있던 일이었지만, 아버지께서 ‘그래픽이 대단하네’ 이러면서 비상한 관심을 보이시는 게 아닌가? 물론 라스트 오브 어스가 그래픽이 좋은 게임이고 훌륭한 게임이기는 하지만, 아버지께 보여드리기에는 너무나 잔인한 게임이었다. 나는 그렇기에 아버지가 불유쾌한 장면을 보기 전에 이렇게 둘러대서 아버지를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좀비 머리통 깨부수는 게임이에요.”
“그러면 그렇지.”라고 말씀하시면서 뒤통수를 가볍게 툭 치고는 아버지는 나가셨다.
이게 바로 첫 번째 문제다. 게임 산업은 그 소재와 내용, 이야기 등등의 ‘외피’를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문화, 특히 서브컬처(애니, 만화, 영화 등등)에 의존하고 있다. 아니, 좀 과장을 덧붙인다면 ‘그게 전부’다.
너무 많은 게임이 폭력을 기반에 두고 있다!
누군가는 ‘게임제작의 폭이 넓어져서 그런 잔혹한 소재를 다루지 않고, 다양한 게임들이 나오고 있다’라고 반론한다면, 나도 인정한다. 확실히 현재의 게임들은 과거에 비해 그 소재 선택폭이 넓어지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라프 코스타의 <재미 이론>을 주제로 독서토론 하던 중에 나 역시도 아버지에게 이를 강변하였으나 아버지의 아주 간단한 반박에 이 변명은 너무나도 쉽게 무너져내리고 말았다.
“네가 여태까지 산 게임들을 되돌아보렴.”
사실 아버지 당신께서 말씀하시기 전에도 나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머니께서 ‘나도 게임 하고 쉴 거야. 너 게임 많이 갖고 있는데 하나만 줘라. 좀 해보게’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나는 기꺼이 어머니께 드릴 게임을 찾기 위해 근 3년 동안 열심히 모은 게임 컬렉션을 뒤졌다. 충격적이었던 것은, 어머니가 즐길 수 있을만한 게임이 없었다는 점과 구입했던 대부분의 게임들이 누구를 쇠꼬챙이로 쑤시거나, 머리통을 총으로 따버리거나, 혹은 대량학살을 벌이는 내용이었다는 것이다.
선정성의 문제를 차치하자. 볼 것도 없이 컬렉션 대부분의 게임들은 헐벗은 여자가 나왔을 것이니. 이를 빼도 게임에 있어서 폭력은 거의 ‘절대적인’ 메소드가 되어버렸다. 물론 나는 그 ‘폭력적인’ 게임들이 나쁘다고 이야기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그것이 대량살인을 벌이는 괴물을 만든다고 비난하려는 것도 아니다. 폭력적인 게임이 다른 폭력을 다루는 매체보다 더 폭력적이라고 강변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문제는 이거다. 게임은 다른 매체에 비해서 폭력적인 내용을 다룬 작품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이다. 이건 최근의 변화를 감안하더라도 그렇다. 이에 대해서 ‘아마도 그건 니놈 심성이 비틀려서겠지!’라고 비꼬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라:흔히 이야기하는 파티 게임이나 콘솔로 나온 캐주얼 게임을 사서 거실에서 가족들과 같이 정기적으로 게임을 즐겼는가? 아니 최소한이라도 시도는 해보았는가? 아마 대부분은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웃기는 건 대부분의 게이머들은 이러한 폭력적인 소재가 게임 소재들을 독점하고 있는 현 상황에 대해서 대부분의 게이머들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거나 별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아래 영상은 데드 스페이스 2의 사망, 학살 장면을 모아서 자식을 가진 어머니에게 보여준 다소 가학적인 마케팅 영상이다. 이런 마케팅이 성립할 수 있었던 것은, 게이머 무의식 중에 그런 것이 ‘쿨하다’는 인식이 박혀있기 때문이다.
도저히 부모세대가 끼어들 수 없는 난이도 있는 구조
두 번째 사례. 친구가 갓 오브 워 3를 하던 중에 친구 아버님께서 관심이 생기셨는지, 한번 해보겠다고 하셨다. 이 경우에는 첫 번째 문제가 극복된(?) 사례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래서 친구는 선뜻 패드를 건네줬고 그 결과는… 당연히 얼마 하지도 못하고 포기하셨다고 한다. 너무 어렵다고 말씀하시면서.
하지만 게임 자체가 청장년층이 즐기기 쉽게 점점 빠른 페이스의 구조의 게임들이 늘어나는 점, 앞서 이야기한 첫 번째 문제와 부모세대의 어쩔 수 없는 보수성이 결합하면서 게임은 점점 부모 세대가 배우기 힘든 무언가로 변질되어 버리고 만다.
아버지 당신께서는 울펜슈타인 3D를 하셨다. 둠도 하셨지만 둠의 그로테스크함 때문에 별로 즐기시진 않으셨다. 어떻게 보면 초기 FPS를 즐기신 아버지의 표현을 빌리자면 “여전히 총질하는 게임에 대한 관심이 있으시지만, 요즘 게임은 내가 하기에는 너무 화려하고 빠르다”라고 말씀하시며 게임 하기를 포기하시는 모습을 자주 보이신다.
게이머의 입장에서는 모든 게임이 다르지만, 비게이머에게는 비슷하다
물론 콜 오브 듀티 같은 물건은 은근히 40~50대 남성들도 즐긴다. 이 덕분에 3000만 장을 바라보는 초유의 타이틀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가끔씩 아버지께 콜 오브 듀티를 권할까 생각하다가도, 게임의 구조를 생각하면 여전히 회의감과 망설임이 든다. 아버지의 시각에 따르면 내가 하고 있는 게임 대부분은 ‘좀비 게임’인데, 그것은 총으로 좀비의 골통을 깨부순다는 측면에 초점을 맞춰서 하시는 말씀이다. 이 분류에 따르면 콜 오브 듀티에서부터 라스트 오브 어스까지, 모두 좀비 게임이다.
물론, 게이머의 입장에서 이는 매우 부당한 처사다.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장르적으로는 다 다르다. 하지만 게임의 ‘구조’로 보았을 때는 어떤가? 결과적으로는 누군가의 머리통을 깨부순다는 측면에서 다 같다고도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아버지 특유의 장르적 구분에 따르면, 사실 나는 다 같은 게임을 하고 있다. 흔히 대작 게임들이나 밀리언 셀러들이 게임을 포장하는 방식은 전적으로 특정 타겟층을 노리고 만들어진다면 점과 소재와 구조는 다를지 모르지만, 연출 자체에서 비슷한 모습을 보일 때가 많다. 그런 점에서 아버지의 지적은 적어도 아버지의 입장에서 타당하다. 결론적으로, 게임이 구조적으로 쉬워지든, 다양한 소재를 선택하든 결국 게임은 청장년층 남성이라는 타겟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반론도 있을 수 있다. 정기적으로, 꾸준하게 게임을 소비하는 계층은 청장년층 남성들이며, 나머지 계층이나 소비자들의 파워가 약하기에 이런 ‘모두가 즐기는 게임’의 개념은 불가능할 수도 있다. 또한, 게임을 소비하는 세대가 나이가 들면서 게임을 하는 문화가 보편화될 수도 있다. 하지만 게임이 진정으로 현재의 영화나 대중문화와 같은 위치에 있기를 원한다면, 라스트 오브 어스 같이 이를 이해할 수 있는 서브 컬처로서의 지위가 아닌 더 폭넓고 다양한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는 위치로 올라서야 한다.
게임업계는 모두가 게임을 즐기게 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그렇기에 전혀 게임을 할 것처럼 보이지 않는 사람들, 특히 부모세대를 붙잡은 애니팡이나 드래곤 플라이트, 모두의 마블 등의 소위 ‘국민 게임’들은 기존의 게임들이 일궈내지 못한 분야에서 놀라운 쾌거를 이룩하였다.
그것이 베낀 게임이라는 문제나 악랄한 소액 결제(또는 IAP) 문제 등의 사소하고도 중대한(?) 문제들은 잠시 제쳐놓도록 하자. 이런 게임들이 갖는 가장 중요한 문제 제기는 ‘왜 부모 세대들은 게임을 하지 않는가?’ 그 자체이다. 성공한 게임이 굳이 우리가 이야기하는 밀리언 셀러 대작 형태의 게임이 될 필요가 없다. 우리나라 시점에서는 부모세대가 게임을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이들의 성공은 대단히 중요하다.
정리하자. 중요한 것은 다양한 문제와 논점이 존재할 수 있지만, 현재의 게임은 모든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 그렇기에 게임이 모두가 향유할 수 있는 문화가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소재와 내용, 게임 구조 선택에 있어서 그 폭을 늘리려는 지속적이고도 꾸준한 시도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없다면 게임이 인정받는 일은 요원한 문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머니와 동물의 숲
그래서 어머니께 3DS와 동물의 숲을 선물해드렸다. 물론,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몬스터 헌터 4와 진여신전생 4 한글화 때문에 한국 3DS를 구입하였고, PS 비타를 살 때 어머니께서 ‘나도 한번 게임을 해보자’라고 하신 말씀이 떠올라서 한국판 동물의 숲을 구입했다. 어머니께 설명을 드리고, 나 역시도 오랫동안 일판 3DS에 잠들어 있었던 동물의 숲을 하기도 하였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어머니께서는 대단히 흡족해하고 계신다. 집에 돌아올 때마다 어머니가 동물의 숲 마을에서 어떤 일이 있었고, 오늘은 무슨 일을 했으며 게임에 궁금한 점을 물어볼 때마다 나는 어머니가 진심으로 이 게임을 즐기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심지어 이젠 내 서브 3DS로 돌리려고 샀었던 3DS를 아예 어머니께 드리기로 마음먹기까지 하였다.
게임은 게이머의 전유물이 아니다. 모두가 즐길 수 있다. 언젠간 부모와 자식이 다 같이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올 것이다. 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