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우 문화평론가의 영화 읽기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다. 사회 안에는 더 쓸모 있게 여겨지는 존재들이 있다. 더 머리가 좋고, 더 건강하고, 더 체제에 잘 복종하여 사회가 선호하는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만이 쓸모 있는 존재는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 쓸모의 자리가 있다.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노인도 혼자 남겨진 아이에게 동화책 읽어주며 보살피는 일을 할 수 있다.
홀로 지내는 아이에게, 또 노인에게 서로는 세계가 될 것이다. 그런데 왜인지 이 사회에서는 그렇게 절실한 서로의 쓸모가 만나기 쉽지 않다. 각자는 파편화되고 분리되어, 저마다 타인을 갈망하며 살아간다. 연결이 간절한데도, 좀처럼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우리 사회의 수백만 명이 고독 속에 살아가며, 매년 수천 명이 고독사에 이른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2016)의 주인공 다니엘은 점점 사회에서 쓸모없어지는 노인이다. 평생 성실히 일하며 목수로서 경력과 실력을 쌓아왔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듯 몸에 고장이 나기 시작했다. 주치의는 그가 심장병이 있으므로 한동안 쉬면서 몸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그 말을 듣고 국가에 질병 수당을 신청하지만 심사에서 탈락한다.
이에 재심사와 항고를 진행하려는데 관료주의적 절차를 밟아나가는 게 쉽지 않다. 전화 연결이 잘 되지 않을 뿐더러 온라인 사전 신청 등이 평생 목수 일만 해온 노인에게는 불가능에 가깝다. 또한 재심사와 항고 때까지 구직수당이라도 받으려 하지만 조건이 까다롭다. 의무적으로 구직활동을 하고 증명해야 한다.
다니엘은 나름대로 국가가 요구하는 대로 절차를 밟아나가려 하지만, 번번이 국가가 원하는 방식 그대로를 해내지는 못한다. 국가는 평생 일해 온 한 시민을 그의 입장에서 배려하고 보살피려 하기보다는 형식적이고 까다로운 절차를 통해 돈을 타내려는 구걸자로 만들어버린다. 그 사이 다니엘은 생활고에 시달린다.
주치의가 일하지 말라고 했으니 무턱대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구직수당을 받기 위한 구직활동의 일환으로, 그는 나름대로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공사판 등에 이력서를 나눠준다. 하지만 국가는 다니엘의 구직활동이 ‘증명’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급을 중단한다. 결국 그는 집안의 오래된 가구들을 팔아치운다.
그 와중에 그는 국가에 지원을 신청하러 갔다가 그처럼 쫓겨나는 한 여성, 케이티를 알게 된다. 그녀는 집값이 싼 동네로 이사와 홀로 아이 둘을 키우고 있다. 다니엘은 그녀의 집수리를 조금 도와준다. 또한 그녀의 가족이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는 것을 알고 약간의 돈을 놓고 오기도 한다.
점점 다니엘은 케이티 가족의 쓸모가 되어간다. 케이티가 돈을 벌기 위해 나가 있는 동안 아이 둘과 시간을 보낸다. 직접 나무를 깎아 만든 모빌을 선물해주고 자폐적이 되어가는 아이의 말벗이 되어준다. 케이티의 가족 역시 다니엘에게 하나의 쓸모가 되어준다. 부인이 세상을 떠나고 홀로 살던 다니엘에게 이웃사촌, 작은 가족이 생긴 셈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이기를 바란다. 다른 누군가에게서 가치와 필요를 얻고, 그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서로 의존하며 기대는 힘으로 강해지고, 삶의 충만함을 느낀다. 대체로 우리에게는 거대한 것이 필요하지 않다. 사회에서 대단한 역할을 하며 칭송받는 일이 필요한 게 아니다. 그저 서로의 세계가 되어 줄 한 사람이면 우리의 삶은 유지된다.
저 사회의 수많은 타인이야 어떻든 내 옆에서 나의 가치를 알아주고, 내 눈빛을 집요하게 바라보며, 나와 함께 숨 쉬고, 나로 인해 살아 있노라고 말하는 그 누군가가 한 명만 있으면 되었다. 자신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여주고, 자기 존재를 그 자체로 인정해주고, 함께 밥을 먹고 아름다운 것을 볼 사람 한 명이면 되었다.
다니엘 블레이크는 허무하게 죽는다. 고생 끝에 잡힌 항고 날, 재판장에서 재판을 앞두고 화장실에서 숨을 거둔다. 그의 말년에 가장 악독한 것은 그를 헛고생시켰던 그 지리멸렬한 절차 따위였다. 차라리 자기가 좋아하는 모빌을 조금 더 깎아 만들고, 케이티의 가족과 함께 웃고, 옛 친구들을 만나 술 한잔하며 충분한 시간을 보냈다면 그의 죽음이 그렇게 허무해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국가는 그의 삶에 관심이 없었다. 단지 더 이상 유용하지 않은 한 존재가 복잡한 절차 때문에, 추가적인 비용 없이 죽었다는 사실을 더 다행이고 효율적이라 여길지도 모른다. 이 한편의 짤막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대단한 것을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저 우리 삶의 기본에 대해 말할 뿐이다.
평생에 걸쳐 성실히 일하고, 그러다 늙고 병 들면 국가의 보호가 필요하다. 이는 평생 사회를 유지하는 데 지불해 온 노동력과 세금을 돌려받는 일일 뿐이다. 그에 더해 우리 삶에는 그저 서로를 보듬어 줄 한 사람의 이웃, 친구가 필요할 뿐이다. 지극히 단순한 이 삶을 달성하는 것은 왜 그리도 힘든 걸까? 무엇이 이 삶을 그리도 어렵고 복잡하게 만드는 걸까? 이 사회는 왜 그토록 ‘단순한 기본’으로부터 우리를 멀리 떨어뜨려 놓는 걸까?
다니엘이 케이티에게 내밀었던 작은 손길 하나는 사실 그리 어려울 게 없다. 병든 이에게 잠시 생활비를 제공하는 것도 간단한 일이다. 그런데 그 작고 간단한 손길의 부재로 무수한 사람들이 오늘도 좌절하며 삶을 포기하고 있다. 이 사회가 만들어놓고 있는 삶은, 또한 성실했던 한 시민을 허무한 죽음으로 이끈 이 사회는 확실히 어딘가 잘못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