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로에 대한 고민은 무척 어렵다. 학창 시절, 그리고 아직은 어리숙하던 대학생, 취준생, 사회 초년생 시절에야 뭣도 몰랐기에 묵묵히 하라는 대로 하며 살아왔지만, 지금은 ‘뭔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 분명 나에게도 하고 싶은 일, 가슴 설레게 하는 일, 행복에 겨워 웃음이 절로 나오게 하는 일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뭐였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니, 어쩌면 그런 일을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현재까지의 인생이 허탈하고, 이제부터의 인생이 막막하다. 웰빙, YOLO, 워라밸 등 온갖 구호들은 넘쳐나는데 내 삶이 바뀐 것은 별로 없고, 나의 본질에 대한 고민도 여전히 제자리다. 이쯤 되면 도대체 답이 있긴 한 것인지 궁금해질 지경이다.
하고 싶은 일? 그런 게 정말 있긴 한가?
요즘 하고 싶은 일을 찾아야 한다는 말을 참 많이 듣는다. 아니다.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딘가에 미쳐보라거나, 1만 시간만 투자하라거나, 가슴이 시키는 일을 하라거나 등 그런 이야기들은 언제나 내 곁을 맴돈다. 심리학을 전공으로 선택하고 나니 이전보다 더 많이 듣는다. 강점 찾기, 진정한 자기 발견, 적성 검사, 직업 탐색, 미래의 나 그려보기 등등. 진로 발견을 도와주겠다는 책, 매체들이 차고 넘친다.
누구나 진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있고, 또 그것을 찾을 수 있다고 유혹하는 말이 도처에 가득하다. 물론 그런 것들이 진로 탐색에 무용하지는 않다. 특히 과학적인 연구 결과에 기반을 두는 심리학자들의 전문적 개입은 분명 개개인이 자신의 적성과 흥미를 발견하고 앞으로의 더 나은 인생의 의사 결정을 해 나갈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도움을 줄 수 있다.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할 일을 찾아 나서도록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 역시 심리학자들이 해줄 수 있는 일이다. 정작 문제는 자신이 진정 하고 싶은 일을 실현하기 위한 그다음의 과정들이다.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 이 일을 해나가면 계속 재미있을 것 같고, 보람도 있을 것 같고, 내 능력도 잘 발휘할 것 같다. 심리학의 전문적인 도움, 그리고 내 오랜 고민으로 빚어낸 값진 성취다.
자, 이제 무슨 일을 하면 좋을지 알았으니 지금부터는 그걸 실현할 차례다. 일단 직장을 언제 어떻게 그만둘 것인가 생각해봐야 한다. 그러자면 수중에 남은 돈이 얼마인가 헤아려 봐야 하고, 당분간 생계유지는 어떻게 해 나가야 할지 계획을 짜 봐야 하고, 내가 사랑하는 주위 사람들 설득하는 작업도 해야 하고, 특히 나는 결혼을 앞두고 있고 상당한 비용 지출이 요구되므로 내 파트너 협조는 반드시 필요한 일인데… 음… 뭔가 맥이 풀린다.
번지점프대 앞의 꿈
흡사 까마득한 높이의 번지점프대에 선 기분이다. 나를 알아가는 재미, 하고 싶은 일을 찾아가는 재미가 나로 하여금 으쌰으쌰 번지점프대 위로 올려보내 주었다. 이제 앞으로 가는 일만 남았다며 기운차게 번지점프대 앞에 섰다. 뛰어내리기만 하면 이제 지금껏 나를 가둬왔던 과거의 수동적 삶, 피상적 삶, 남들 하던 대로 살던 삶과는 작별이다.
아… 그런데 막상 서고 보니 스멀스멀 두려움이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내 주위 다른 사람들의 문제, 먹고사는 것의 문제, 그래도 나름 억지로라도 이뤄 왔던 것들에 대한 미련, 사회 ‘주류’로부터 벗어나는 것에 대한 걱정 등등. 그런 고민들을 하다 보니 어느새 잘 뛰어내리겠다던 마음이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다. … 역시 돌아가는 게 좋을까? 말하자면 진로 탐색과 발견에 대한 일반적 기회들은 분명 내게 용기를 주지만, ‘결정적 한 방’을 주지는 못한다.
결국 인생을 책임져야 하는 것은 오롯이 나 자신이다.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할 때의 만족감과 더불어, ‘하고 싶은 일’을 하지 않았을 때 얻을 수 있는 기회비용의 크기나 리스크 등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솔직히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일’ 하겠다고 나서는 것이 꺼려진다. 부담스럽다. 현실은 현실 아니겠는가. 그런고로 내게는 아직 고민과 준비를 위한 충분한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우리가 번번이 ‘하고 싶은 일’을 쟁취하는 데 실패하는 이유, 하고 싶은 게 뭔지 못 찾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바로 숨을 고를 수 있는 시간의 절대적인 부족이다. 인생을 새로이 계획하여 두 번째 길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분명 그에 걸맞은 시간과 노력과 비용과 고민이 꼭 필요하다.
그런데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사느라, 꼭 해야 한다고들 하는 것을 해야 하느라 ‘하고 싶은 일’ 이루는 데 들일 수 있는 시간과 노력과 비용과 고민의 양을 충분히 만들 수 없다. 어떤 새로운 일이 나하고 맞는가, 아닌가를 가늠해보기 위해서는 그 일을 체험이라도 해봐야 하는데 도무지 그럴 시간을 만들 수가 없다. 그래서 결국 제자리걸음이다. 끝끝내 꿈을 이뤘다고 자랑하는 자기계발서들이나 뒤적거리며 대리만족하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쯤 되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하는 주체가 비단 심리학자들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로 탐색 및 결정에 관여하는 세심한 지적 배려,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다.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내가 몸담은 세계가 변해야 한다. 그것을 보장해줄 세계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을 실현할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벌 수 있다.
정치가에게 진로 상담을
진로 상담은 심리학자 말고, 정치가에게 먼저 받아야 한다. ‘하고 싶은 일 찾아 그거 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게 시간 좀 만들어 달라’고 충분히 목소리를 내야 할 필요가 있다. 가능하면 근무시간도 좀 줄여주고, 휴일도 보장해주고 야근을 덜 하게 해달라고 요구해야 한다. 그래야 남는 시간 동안 자아도 찾고, 직업 체험도 해보고, 책을 통한 간접 경험도 해보고, 미래 인생 계획도 세울 것 아닌가.
바쁘게 살다 보면 눈앞에 닥친 일들 처리하는 것에만 골몰하느라 정작 놓치지 말았어야 할 중요한 것들을 그냥 놔둔 채 지나가기 쉽다. 그러다 보면 뭔가 아쉬운 거다. 소중한 뭔가를 두고 왔다는 느낌. 그러나 너무 멀리 와버려서, 이제는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는 안타까움. 지금부터라도 그러한 것들을 놓치고 싶지 않다면, 진로 탐색을 통해 제대로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싶다면 일단 ‘숨 돌릴 시간’부터 가지는 것이 먼저인지도 모른다.
원문: 허용회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