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란 매일 같이 맥주를 마시다가 특별한 날에 터트리는 샴페인 같은 게 아닐까?
우리는 로마인처럼 아침부터 와인을 입에 달고 살지는 않지만 특별한 날에는 항상 와인이 함께 한다. 오직 와인만이 가진 품격 때문이다. 평소에 부어라 마셔라 하던 술고래도 와인과 함께라면 한 잔 쨍하고 만족하는 하하 호호 신사가 된다. 조용한 행사장에서 나는 가끔 생각한다. ‘와인이 없었다면 이곳은 취객들로 난리가 났겠지?’
인류의 역사와 함께한 와인. 하지만 실제로 3번 정도는 이 땅에 와인이라는 음료가 없어질 뻔했다. 오늘 마시즘은 지구에서 와인이 없어질 뻔한 순간들을 꼽아보았다. 와인 없는 세상이라니 정말 어마무시하지 않은가.
팍스 로마나: 와인과 국가가 땅에 묻히다
기원전 2세기, 북쪽에 사는 게르만족이 대거 로마로 향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향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문명국인 로마에 가면 따뜻한 보금자리와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로마는 이 맥주나 마실 줄 아는 촌놈들에게 국경 수비를 맡겼다. 이제 로마인들은 야근 걱정 없이 집에서 매일 흥청망청 와인 파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르만족이 가면 나도 간다. 흉노, 무슬림, 바이킹까지 로마의 문을 두드렸다. 열어주지 않으면 부쉈다. 이민족은 집부터 농장까지 모든 것을 약탈했다. 포도밭에는 불을 지르고 캠프파이어를 했다. 와인은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리스부터 로마까지 와인은 아포테카(Apotheca)라고 부르는 부엌에 보관해왔지만 와인 항아리를 지하에 숨겨야 했다. 위급할 땐 버로우가 최고니까.
막상 꺼내보니까 와인이 잘 익었다는 게 반전. 알고 보니 어둡고, 습하고, 온도가 일정한 지하야말로 와인을 보관하기에 최적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았다. 오늘날 와인 셀러(Celler)는 이렇게 탄생했다. 역시 맛있는 것은 숨겨야 제맛인 법이다.
필록세라 해충 사태: 유럽의 포도가 멸종하다
로마는 몰락했지만, 지하에 숨었던 와인은 명맥을 이어갔다. 이제 와인은 유럽을 떠나 미국과 호주 등 신대륙에도 명성을 떨쳤다. 와인이 곧 돈이 되는 시대. 사람들은 더 많은 와인을 만들기 위해 전 세계의 포도나무를 수집한다. 문제는 각국의 대표 해충들도 한자리에 모였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1863년에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영국 과학자가 가져온 미국 포도나무에 딸려있는 해충이 풀려난 것이다. ‘필록세라(Phylloxera)’라고 불리는 이 녀석의 정체를 밝혔을 즈음에는 영국 포도밭이 초토화된 상태였다. 영국을 넘어 프랑스에 상륙한 필록세라는 프랑스 포도농장의 60% 이상을 말려 죽인다.
이 해충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각국에서는 필록세라를 퇴치하는 이에게 현상금을 걸었다. 각종 농약이 나왔고, 여러 박멸 아이디어가 나왔으나 실패. 가장 인상적인 것은 필록세라를 퇴치하기 위해 포도밭을 물에 침수시킨 아이디어였다. 물론 포도도 함께 잃는다는 게 함정.
답은 필록세라를 퍼트린 주범. 즉 미국에서 가져온 포도나무에 있었다. 미국산 포도나무는 필록세라에 저항력이 있었다. 유럽 사람들은 부랴부랴 미국산 포도나무 뿌리에 유럽 포도나무 줄기를 접목했다. 현재 우리가 마시는 대부분의 유럽 와인의 뿌리가 미국이다. 벌레 때문에 족보가 아이러니해졌다.
미국 금주법: 와인 마시면 다 철창행이야
전쟁을 견뎠고, 벌레의 침공도 막았다. 하지만 법의 판결이 남아있었다. 1919년 미국에서 일어난 ‘금주법’ 때문이다. 당시 위스키와 버번 등 독주로 인한 피해가 커지자 내린 결단이었다. 와인 생산업자들은 미국 내에서는 아직 루키인 와인은 금주법에 걸리지 않을 거라 믿었다. 물론 믿음은 실패고 와인은 불법이 된다.
미국 내의 많은 포도농장은 문을 닫았다. 살아 있는 포도농장은 이제 와인 대신 포도 주스를 만들었다. 우리가 잘 아는 웰치스(Welchs)도 이 시대에 만들어졌다. 그들은 포도 주스, 포도 농축액, 포도 블럭 같은 엑기스를 판매했다. 이 건전하고 합법적인 음료에는 다음과 같은 경고문이 붙었다.
경고: 이 포도 엑기스를 항아리에 담고 설탕과 물을 넣어 7일 이상 보관하면 와인이 됩니다.
친절한 경고 덕분에 포도 엑기스의 생산량은 늘고, 와인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줄었다(?). 마시즘에서 소개한 「금주법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술을 마셨을까?」에서도 밝혔듯 이들은 꼼수 음주를 실천했다. 그리고 13년이 지난 후 드디어 금주법이 사라진다. 하지만 한차례 꺾인 미국의 와인 문화는 다시 꽃 피우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와인은 이제부터 꽃길만 걸을까?
지난 50년 동안 와인은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다. 지표면 온도가 꾸준히 상승한 덕분에 포도는 더욱 달고 튼실해졌다. 연도별로 나오는 와인의 품질이 매우 상향 평준화되었다. 이것을 자연의 축복이라고 불러야 할까, 인간의 기름 소비가 부른 의문의 1승이라고 불러야 할까?
분명한 것은 지표면 온도가 조금만 더 올라가면 대다수 포도 산지가 바뀌거나 사라질 거란 점이다. 물론 그날이 올 때쯤이면 와인이나 포도보다 인류의 존망이 더 걱정이겠지만 말이다.
원문: 마시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