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임의 늪에 빠지다
2006년 4월 한 권의 책이 출판된다. 정치권 및 여의도에서 썰을 풀고 글 좀 쓰는 사람 치고 이 책을 안 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제목은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삼인 출판사), 저자는 조지 레이코프였다.
그 뒤로 프레임(Frame)은 한국 정치의 유행어가 됐다. 특히 당시 열린우리당(이하 열우당)이었던 민주당 계열에서 유행어가 됐다. 그도 그럴 것이 2004년 총선 이후 당시 열우당은 ‘모든’ 선거에서 패배했다. 보궐선거를 포함 23전 23패였다.
열린우리당이 선거에서 참패하면 할수록 책은 불티나게 팔렸다. 당시 민주당 사람들은 참패 원인과 해법을 프레임에서 찾고자 했다. 프레임의 사례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은 미국 공화당이 감세(tax cut)를 세금구제(tax relief)라고 표현한 것이다.
세금구제라는 용어는 이미 선악 구분법을 내재한다. 이런 경우 미국 민주당이 세금구제를 찬성하든 반대하든 세금구제라는 프레임을 강화해주는 효과가 있다. 프레임의 늪에 빠져버린 경우이다.
말장난 이상의 프레임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의 저자 조지 레이코프의 새 책이 출간됐다. 바로 『나는 진보인데 왜 보수의 말에 끌리는가?』(생각정원)다. 이 책의 최대 매력은 쉽고, 얇다는 것이다. 제자인 엘리자베스 웨흘링과의 대담집 형태를 취하기에 대화체다. 분량은 약 270쪽인데 체감 분량은 더 얇다.
그런데 이 책의 진짜 매력은 레이코프의 논리구조 전반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주입식 결론이 아닌, 프레임이 형성되고 작동되는 알고리즘을 알게 도와준다. 책을 읽으면서 “아하~ 프레임 이론이 이렇게 저렇게 작동한다는 것이구나~”라고 생각했다.
레이코프의 프레임 이론에 대한 반론은 말장난이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람은 미국 민주당의 전략 및 정책 전문가였던, 람 이매뉴엘과 브루스 리드가 공저했던 『더 플랜』(안병진 역, 리북출판사)가 대표적이다. 람 이매뉴엘과 브루스 리드는 레이코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결국 정치의 목적은 옳은 언어를 구사하거나 그럴듯한 말을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해답을 찾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는 계산이 아니라 용기가 필요하다.
- 54쪽
실제로 프레임 이론이 한국에 소개된 이후 정치권에서 적용되는 양태를 보면 말장난의 수준에 머무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래서 더더욱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래야만 실전-응용을 제대로 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합리적이지 않다
책의 전체 구조는 ①기본 원리 ⇒ ②기본 모형(진보/보수) ⇒ ③현실 정치에 적용/응용의 순서로 되어 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 기본 원리의 경우 인간의 인식체계와 은유(Metaphor)의 역할을 설명하고,
- 기본모형의 경우 엄격한 아버지(=보수) 모델과 자애로운 어머니(=진보) 모델을 소개하고,
- 현실 정치에 적용/응용의 경우 미국 정치의 다양한 이슈와 연결시켜 설명한다.
레이코프는 ‘인지언어학’의 창시자다. 즉 논리 전개의 뼈대가 인지언어학에 근거한다. 책의 앞부분은 ‘인간이 합리적으로 인식한다’의 전제조건이 되는 4가지 가정을 비판한다. 이는 동시에 인지언어학의 학문적 의의가 될 것이다. 내용이 흥미롭다.
- 첫째, 자신의 사고가 ‘의식적’이라는 가정은 틀렸다. 98%는 무의식적이다.
- 둘째, 인간의 합리성이 우리의 신체와 ‘독립적’이라는 가정은 틀렸다. 추론은 ‘물리적’ 과정으로서, 우리 신체 및 뇌의 물리적 실재에 의존한다.
- 셋째, 추론이 ‘보편적’이라는 가정은 틀렸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방식으로 사유하는 것은 아니다.
- 넷째, 사람들은 사물과 세계를 ‘있는 그대로’(=축자적[逐字的]으로) 이해한다는 가정은 틀렸다. 사람은 언제나 ‘은유’를 통해서 세상을 인식한다.
은유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은유(Metaphor)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이 질문은 책 전체의 핵심내용이며, 프레임 이론의 근본 원리를 어떻게 이해하는지의 문제가 된다. 책 내용을 인용해보자.
[……] “우리 뇌의 구조적인 세부 사항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실상 이 질문의 대답은 “대부분은 세계 내에서 일어나는 우리의 경험이 결정한다”입니다.
- 35쪽
규칙적으로 활성화되지 않은 신경 연결은 사라지게 되죠. 바로 그러한 신경 연결을 강화할 체험적 토대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 우리의 경험은 우리의 추론 방식을 구조화합니다. 어떤 시냅스를 더 자주 사용할수록 연결은 ‘더 강하게’ 되고, 연결된 뉴런은 ‘더 쉽게’ 활성화됩니다.
- 36쪽
인지과학에서는 이 기제를 헵의 학습(Hebbian Learning)이라고 부릅니다. 체험적 상관관계가 강한 신경적-인지적 연결로 이어진다는 것이죠.
- 36쪽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프레임 이론에서 최초로 작동하는 것은 ‘체험적 토대’라는 것이다. 경험-체험적 토대가 뇌의 신경적-인지적 연결을 강화하는 근원적 힘이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레이코프의 논의를 정리해보면 ①경험의 반복적 축적(=학습) ⇒ ②뉴런의 연결 ⇒ ③뇌의 구조화(시냅스의 강화) ⇒ ④무의식적 추론의 활성화 ⇒ ⑤은유(프레임)의 활성화 순서로 진행된다.
인지언어학에서는 인간이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인지 영역을 ‘근원 영역’, 더 추상적인 인지 영역을 ‘목표 영역’이라고 한다. 은유의 역할은 경험의 세계인 근원 영역을 추상의 세계인 목표 영역으로 ‘옮기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이를테면 은유는 버스의 역할을 한다.
보수와 진보는 모두 도덕적 가치지향을 갖는다
레이코프는 도덕적 의사소통을 기준으로 보수와 진보를 구분한다. 보수의 경우 ‘엄격한 아버지 모델’을 기본으로 한다. 엄격한 아버지 모델의 가정에 의하면 세상은 선/악 이분법으로 갈라지고 아버지의 역할은 ‘악’으로부터 자녀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그래서 권위-위계가 중요하고 자식들은 강인함, 절제, 순종, 복종이 중요하다.
반면에 진보의 경우 ‘자애로운 어머니 모델’을 기본으로 한다. 자애로운 어머니 모델의 가정에 의하면, 감정이입(=공감), 자애로움, 타인과의 협동, 자아실현, 사회적 책임이 중요하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보수와 진보는 모두 도덕적 가치지향을 갖는다. 다만 가치체계에 대한 입장이 서로 다를 뿐이다. 옳고/그름이 아니라 ‘다름’의 문제다.
정치적인 보수/진보의 구도를 도덕적 의사소통의 방식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등장한 계기가 매우 흥미롭다. 레이코프에 의하면 미국 정치에서 그 기원은 1980년 지미 카터와 대결했던 로널드 레이건의 전략 참모이자 여론조사 전문가였던 리처드 워슬린(Richard Wirthlin)이다.
당시 미국 정치에서 통용되는 상식은 사람들이 후보자의 정치 쟁점에 대한 ‘입장’을 보고 투표한다는 것이었다. 여론조사 전문가였던 워슬린은 첫 번째 여론조사를 하고 충격 받는다. 사람들이 레이건의 입장은 매우 싫어했지만, 여전히 그에게 투표하길 원했기 때문이다.
워슬린은 도대체 이게 뭘까 싶어 분석을 계속했다. 워슬린은 사람들이 입장과 프로그램이 아니라 레이건의 ‘가치’에 공감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후 더더욱 레이건은 공개적으로 자신의 도덕적 관점을 밝혔고 가치, 신뢰, 진정성, 정체성을 토대로 하는 선거운동을 전개했다.
역사적 경험과 체험적 기반
보수와 진보의 정치적 입장 차이를 ‘도덕적 가치체계의 입장 차이’로 보는 것은 ‘이해관계의 차이’로 보는 입장과 대비된다. 전자는 인지언어학에 기반 둔 레이코프의 프레임 이론이고 후자의 대표적인 경우는 맑스주의를 비롯한 계급론-계층론에 근거한 이론이다. 이 중 무엇은 전적으로 틀리고, 무엇은 전적으로 옳다고 평가하긴 어렵다.
그런데 엄격한 아버지 모델이 보수를 상징하고 자애로운 어머니 모델이 진보를 상징하는 모형은 한국적 현실에도 유효한가? 혹은 레이코프 이론이 한국적 현실에서 타당한 것은 무엇이고, 타당하지 않은 것은 무엇일까?
미국 정치에서 핫한 이슈 중 하나인 낙태 사례를 들어보자. 낙태는 미국에서 찬반이 팽팽하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 2017년 11월에 나온 여론조사에 의하면 낙태죄 폐지가 약 52%, 반대가 약 36%이다. 낙태죄 폐지 찬성 여론이 꽤 앞선다.
동성애 이슈를 보자. 미국에서 동성애 이슈는 부시 대통령 때까지 보수에게 유리한 이슈였다. 미국 보수는 동성애에 비판적이었고 대신 결혼을 ‘보수적인’ 가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동성애+결혼’ 허용 문제가 쟁점이 되자 동성애+결혼을 찬성하는 여론이 과반수를 넘어버렸다.
왜 미국의 낙태 여론과 한국의 낙태 여론은 다른가? 왜 동일한 미국에서도 동성애에 대한 여론이 과거에는 보수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했는데 진보에게 유리하도록 바뀌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역사적 경험과 체험적 기반’이 다르기 때문이다. 미국은 기독교 근본주의가 강한 나라이기 때문에 낙태 이슈가 한국보다 훨씬 더 첨예했다. 한국에서 ‘기독교 근본주의’를 내걸고 총선에 출마했던 정당은 유효득표율 3%도 얻지 못했다.
미국에서 동성애 반대여론이 많다가 동성애+결혼 이슈는 찬성이 훨씬 많은 쪽으로 돌아선 것은 미국 사회운동의 역사적 체험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60~1970년대 미국의 급진주의 여성운동은 ‘결혼거부/출산거부’를 여성해방의 전략으로 채택했다. 그 뒤로 ‘결혼/출산’은 미국 보수의 가치가 되었다. 미국 신좌파 운동의 반발로 신우파와 신보수주의가 등장한 배경이다.
그러나 한국의 여성운동 및 한국 진보는 ‘결혼/출산 거부’를 대규모 사회운동으로 전개한 적이 없다. 그래서 한국에서 결혼/출산은 이견이 별로 없는 중립적 이슈일 뿐이다.
역사적-집단적 경험
그럼 한국의 역사적 경험과 체험적 기반을 고려한다면 보수/진보를 가르는 중심 이슈는 무엇일까? 한국 보수의 경우 성장-안보-친미-반북-대기업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한국 진보의 경우 민주주의-인권-여성-노동-대북 대화론 등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차이점 혹은 논점은 이런 것이다. 레이코프는 ‘은유’가 형성되는 요인으로 경험과 체험적 기반을 제시하며 개인이, 가정에서 겪는, 5세 미만의 경험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역사적 과정을 통해, 특정 집단이, 사회적으로 겪는, 5세 이후의 ‘역사적-집단적 경험’이 어쩌면 더 중요한 것 아닐까?
인지언어학이 유권자 투표이론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겠지만 세계적 보편성을 갖되 한국적 맥락에서도 적용 가능한 ‘한국적 프레임 이론’과 ‘한국의 조지 레이코프’가 필요한 것 아닐까? 레이코프가 훌륭하게 서술하듯이 ①원리 ⇒ ②모델 ⇒ ③응용을 동시에 관통하는 논리체계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