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우 문화평론가의 영화 읽기
그녀에게는 많은 게 필요하지 않다. 그저 붓 한 자루만 있으면 된다. 그에게도 많은 게 필요하지 않다. 그저 그녀와 함께하는 삶, 그리고 그 삶을 일궈갈 집 한 채만 있으면 된다.
샐리 호킨스와 에단 호크가 주연한 <내 사랑 Maudie, My Love, 2016>은 캐나다의 나이브 화가 ‘모드’와 생선장수 ‘애버렛’의 사랑을 다룬 전기영화다. 영화는 담담하게 시골에서 살아가는 두 남녀의 이야기를 고요한 음악처럼 담아낸다. 복잡하지 않은 그들의 삶처럼, 영화 역시 애써 스펙터클한 전개를 고집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은근하게 변해가는 그들의 감정선과 삶의 모습이 그 자체로 고도의 역동성을 만들어낸다.
선천적 관절염을 앓는 모드와 고아원에서 자란 남자 애버렛은 모두 ‘평균’에 미달되는 인물들이다. 절뚝거리며 걷는 모드에게 동네 아이들은 돌을 던진다. 숙모에게 맡겨졌지만, 숙모 역시 그녀를 짐으로만 생각한다.
부모 없이 자란 애버렛은 글자조차 모르는 무식한 생선장수다. 전단지나 가정부, 청소도구 같은 단어도 곧바로 생각나지 않을 만큼 하루 종일 육체노동에 몰두해 살아간다. 그들이 과연 제대로 된 삶을 살아나갈 수 있을지, 왜곡 없이 소통하며 사랑할 수나 있을지 의심스럽다. 보통 사람의 기준에서 그들은 ‘잘 살’ 수 없는 존재들이다.
실제로 그들의 처음은 위태롭기만 하다. 모드는 가정부를 구하는 애버렛의 집을 찾아가지만, 무슨 일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애버렛 역시 하루 종일 일에서 시작하여 일로 끝내는 인생만 살아왔을 뿐, 삶의 다른 영역에서 소통하는 방법 자체를 알지 못한다.
그저 모드에게 ‘알아서 하라’고 할 뿐이고,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지도, 쳐다보지도 않는다. 더군다나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습관에 길들여져 있어, 모드의 뺨을 때리기도 한다. 마을 사람들은 모드가 애버렛의 집에 들어가 사는 ‘성노예’ 가정부가 되었다며 수군거린다.
그들은 아마 그런 식으로 평생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시골의 어느 오래된 가정에서처럼, 무식한 남편은 늘 폭력을 휘두르고, 아내는 그에 굴종하며 아이나 키우는 식모노릇 하면서 말이다. 아니면 애초에 결혼할 생각이 없었던 애버렛의 뜻대로, 모드는 가정부 노릇을 하면서 성적으로 이용당하는 ‘장애인 몸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수도 있었던 그들의 삶은 모드가 둘 사이의 관계를 주도하기 시작하자 예정에 없던 일이 된다. 모드는 자신과 성관계를 하려면 결혼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과거 태어난 아기를 집안 식구들이 파묻었던 이야기를 한다. 애버렛은 그 이야기를 듣고 그녀를 범하려는 일을 관둔다.
모드의 ‘관계 주도’는 계속 이어진다. 애버렛에게 뺨을 맞은 날, 그녀는 벽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또한 자신이 ‘머물지, 떠날지’ 애버렛에게 결정하라고 이야기한다. 애버렛은 차마 그녀에게 떠나라고 말하지 못하고, 밀렸던 임금을 지불해준다. 애버렛은 그녀가 필요했다.
사실 그녀를 싫어할 이유도 없었다. 그저 그녀와 관계 맺는 법을 몰랐을 뿐이다. 모드는 ‘순종’을 조금씩 거부하면서, 자신의 주체적인 영역을 만들어간다. 이는 그가 그녀와 온당한 관계를 맺을 수 있게끔 해준다. 부모와 소통한 적도 없고, 고아원 내의 질서, 그리고 명령을 받아 일을 하는 ‘일방성’에만 익숙했을 육체노동자에게 ‘상호성’의 관계는 낯설기만 한 것이다. 그가 상호성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은 모드에게 ‘의존’하면서다.
의존성은 관계의 근본을 이룬다. 연애코치나 강사들 중에서는 때로 연애나 결혼에서 ‘의존하지 말고, 독립하라!’ 같은 말을 설파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의존과 독립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지, 어느 한 쪽을 박멸하는 게 아니다. 모드가 애버렛에게 숙식을 제공받고, 애버렛이 모드에게 집안일을 맡기는 것은 ‘외적인’ 의존관계다.
한편, 두 사람이 함께하며, 애버렛이 처음으로 관계다운 관계를 맺어나가고, 모드가 집안에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며 자신의 시공간을 확보해나가는 일은 점점 ‘내적인’ 의존관계를 이룬다. 애버렛은 자기 삶에 처음으로 들어온 상대에게 의존해가며, 모드는 자기에게 처음으로 그림 그릴 자유를 허락하는 상대에게 의존해간다. 애버렛의 집은 모드가 그린 그림들로 꾸며진다. 그럼으로써 그곳은 더 이상 ‘그’의 공간이 아닌 ‘그들’의 공간이 되어간다.
둘은 결혼한다. 그들에게는 특별히 주변세계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장애 때문에 거의 집에서만 자란 모드에게도, 늘 고된 노동만 하며 살아왔던 애버렛에게도 이렇다 할 지인들이 없다. 그래서 결혼식은 거의 하객 없이 이루어진다. 그들에게는 서로가 세계의 전부나 마찬가지다. 에버렛은 모드를 수레에 싣고 뒤에서 밀며 달린다.
그날 밤, 그들은 처음으로 함께 춤을 춘다. 서로에게 ‘양말 한 켤레’ 같은 커플이라 속삭이며, 고요히 둘이서만 늙어갈 것을 약속한다. 그 순간 마을 사람들이 그들에 대해 무어라 수군거리고 있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마을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가십거리로 중요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서로 외에 누구도 중요하지 않고, 관심도 없다.
모드와 애버렛은 아이 없이 그렇게 평생을 살아간다. 처음 살았던 그 집에서, 처음 살던 그대로 말이다.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더 큰 집으로 이사할 욕심을 내고, 삶을 변화시키고 확장하고자 안달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드가 꽤나 유명해져서, 부통령까지 그녀의 그림을 구입하고, 텔레비전에 나올 정도가 되어도 원래의 삶을 유지한다. 그들은 그 상태로 충만해서 굳이 삶을 바꿀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저 집안을 아름다운 그림들로 꾸미고, 주변의 자연을 걸으며, 저녁을 함께하는 삶으로 충분했다.
그들의 삶을 보고 나서, 우리의 삶은 그에 비해 얼마나 쓸데없을 정도로 복잡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들처럼 삶의 ‘핵심’만을 살아낼 수는 없는 걸까? 왜 그저 사랑하는 채로 머무르며, 그에 전적으로 만족하며, 그렇게 한 평생 곁을 지켜주다 생을 마감할 수는 없는 걸까.
영화의 후반부에서 모드의 숙모는 모드에게 “우리 집안에서 결국 행복하게 살아낸 건 너밖에 없구나.”라고 말한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인생의 무엇인지 모를 욕망을, 타인의 기준을, 우월하거나 평균적이라고 믿어지는 어떤 삶을 좇을 때, 모드는 그저 ‘삶의 핵심’으로 곧장 들어갔다.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을 원 없이 그리고, 자신이 선택한 사람과 원 없이 사랑했다.
어쩌면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어려울지도 모른다. 우리는 온갖 쓸데없는 생각들 때문에 평생 삶의 핵심을 회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