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속도로 변화하는 서울
서울이라는 도시를 생각할 때, 아무래도 요즘 사람들이 떠올리는 것은 서울이라는 도시가 지닌 역사와 시간의 무게보다는 경제적으로 크게 발달한, 메트로폴리스로서의 서울의 모습인 듯하다. 실제로 ‘한강의 기적’과 같은 전 세기의 수사를 굳이 동원하지 않더라도 서울의 지역내총생산(GRDP)은 2014년에 이미 327조에 다다랐으며, 그 인구수는 1,000만에 육박한다.
늘어난 것은 서울이라는 도시의 경제적 가치나 인구수만이 아니다. 한때 사대문 안을 이르는 말이었던 ‘서울’이라는 말이 지칭하는 지리적 범위 역시 크게 늘어났다. 당연히, 그 안에 살았던, 사는, 살아갈 사람들의 이야기 역시 겹겹이 쌓이기 마련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희뿌연 미세먼지나 도로와 도로 사이에서 부서지고 다시 쌓아 올려지는 철근과 콘크리트 사이에서 잊히기 마련이다. 도대체, 이 서울이라는 공간은, 끝없이 꿈틀대는 거대한 도시는 무엇을 지우려 하고 무엇을 남기려 하는 것인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물론 서울의 거주민, 혹은 다양한 목적으로 서울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서울이 제법 방대하고 유서 깊은 역사를 지닌 도시라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것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으로는 덕수궁 대한문 앞의 수문장 교대식, 그리고 고궁 야간 개장 행사나 최근 들어 서촌 근처에 성행하는 한복 대여점 등을 증거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그들은 여기저기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키는 표석(혹은 표지석)의 존재는 아마 잘 모를 것이다. 나 역시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잘 알지 못했으니까.
2018년의 서울에서 과거를 느끼는 방법
표석이란 본디 ‘어떤 사실을 구별하거나 기념하기 위해 세우는 돌’이다. 당연히 그 표면에 새겨진 문구는 비석 표면의 냉기만큼이나 차갑고 건조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애정이 깃든 눈길 앞에서 한 줄의 메마른 평서문은 긴긴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것은 귀를 쫑긋 세운 사람만 들을 수 있는 이야기이다.
좀 더 자세한 큐레이터가 필요하다면 『미실』의 작가 김별아가 쓴 『도시를 걷는 시간』을 펼쳐보자. 이 책은 서울 시내 곳곳에 감추어진 표석을 통해서 이 도시에 켜켜이 쌓인 시간의 흔적을 쓸어보고 들추어내 본다.
이를테면 동묘의 시끌벅적한 인파 사이, 영교도 앞에서 단종과 영영 헤어지고 만 정순왕후 송씨가 견뎌야 했던 긴긴 여생의 지워질 듯 지워지지 않는 흔적. 혹은 광화문 광장 어딘가에 숨은 기로소 표석에 새겨진, 노년을 마주하는 영조의 두려움과 우울의 자취. 아니면 지기 싫어하는 당찬 소년 순신이 있는 힘껏 달음박질쳐 지나치던 인현동의 골목에 새겨진 숨결 같은 것들 말이다.
그뿐인가. 광대들이 한껏 놀이를 벌이던 장악원 앞에서는 연산군에게 직언을 올린 끝에 유배당한 공길의 이야기를 꺼내는가 하면, 경복궁 방화 사건을 둘러싼 서로 다른 주체들의 기록을 짚어 나가면서, 또 어머니를 살리고 나란히 목숨을 잃어 효자문을 얻은 형제의 사연을 들을 수도 있다.
표석을 매개로 한 과거와의 끝없는 소통을 통해서 21세기의 우리는 조선이라는 사회의 제도와 가치관이 인간의 삶을 재단하고 억압했음을 지금의 우리는 알 수 있다. 또 탐관오리를 끓는 물에 삶아버리는 팽형이 행해지던 거리에서는 명예라는 것이 살아 있다. 그것을 지키려고 하던 시대의 한 단편을 통해 지금 이 시대에 대한 비교도 가능할 것이다.
이렇게 먼 길을 돌아 결국 저자의 발걸음은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 2018년의 서울이라는 도시로 되돌아오게 된다. 이렇게 다시 서울이라는 도시 곳곳에 새겨진 인간들의 숨결을 맨살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발 빠른 서울에서 느린 걸음으로 산책하기
몇 년 전의 일이다. 학부 졸업을 몇 달 앞두고, 당시 뜻이 맞았던 친구들 몇 명과 어느 공모전에 입상해 유럽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아마 파리에서 소르본 근처를 지날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인도와 나란히 뻗어있는 벽의 중간에 동판 하나가 자리했다.
동행에게 물어보니, 프랑스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새겨 놓은 것이라고 했다. 낯선 언어로 된 이름이었던 탓에 정확하게 그 문장들을 떠올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도 분명히 기억나는 것은, 약 3세기 전 그 자리에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목숨을 잃은 구체적인 개인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무척 낯설면서도 신기하게 다가왔던 감각이다.
감히 상상하건대 동판 위에 새겨진 이름의 주인은, 그리고 그 이름을 길 위에 새겨놓을 생각을 한 누군가는 그 이름이 다시 불리기를, 그래서 그 순간이 잠시라도 되살아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아마 서울 거리 곳곳에 놓인 표석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봄 햇살이 제법 따뜻하다. 아무래도 햇살 아래서 가만히 이야기를 품은 표석에 눈길을 건네기에 좋은 날이 오는 것 같다. 만약 당신에게 시간이 난다면 『도시를 걷는 시간』을 펼친 다음, 사대문 안팎을 직접 거닐어 보도록 하자. 역사적 인물과 관련된 표석이 품은 다채로운 이야기와 함께하는 그 산책길은, 분명 외롭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