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출장 다니던 무렵, 별로 가기 싫은, 즉 걸리면 떨떠름한 지역이 있었다. 거제와 울산이다. 이유는 딱 하나, 물가가 턱없다는 말이 나올 만큼 비쌌기 때문이다. 여인숙급의 여관에서 자려면 다른 지역의 호텔급 모텔비를 내야 했고 식비도 다른 지역에 비해 은근히 많이 들었다.
그 중에서도 거제가 조금 더 심했다. (울산은 그래도 광역시라 좀 넓어서) “여기는 국민소득 3만불 지역이야.” 전국을 돌아다닌 경험이 많으신 기장님들의 푸념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인심도 좀 차갑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이리저리 만난 거제 주민들에게 “아 거제 인심 사나워요” 하고 너스레를 떨다가 한 번 혼이 났다. “무슨 말씀입니꺼. 피난민 10만 명을 믹이 살린게 거제 사람들인데. 인심이 사납다니.”
흥남 철수 당시 미군이 보여 준 행동은 훌륭했다고 치하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은 군수품을 버리고 흥남 부두에 가득하던 피난민을 태우는 선택을 했고 그것은 매우 인도주의적인 결정이었다. 그 가운데 선원들조차 “승용차에 12명쯤 되는 거인을 구겨 넣는 기분”이라며 얼굴에 핏기가 가시는 1만 4천 명의 피난민을 태우고 온 빅토리 메레디스 호의 경우는 매우 유명하고 역사상 최대의 엑소더스 선으로 기록에 남아 있다.
그런데 그 배는 목표지인 부산항에 들어가지 못했다. 피난민 수에 기가 질린 부산 쪽에서 수용을 거부한 것이다. 그들이 피난민을 부려놓을 수 있었던 것이 거제도였다.
메레디스 호의 항해에 기적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한겨울 아무 방한 장비 없이, 준비한 식량이나 기타 물품도 없이 1만 4천여 명의 피난민 가운데 한 명의 인명 피해도 없이 상륙지에 도착한데다 그 배 안에서 다섯 명의 새 생명이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선원들은 이들을 김치 원, 김치 투, 김치 쓰리… 김치 파이브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 대표격으로 언론에 주로 소개된 사람은 김치 파이브 이경필씨다.
부모는 다른 형제들은 음력으로 생일을 쇤 반면 유독 이경필씨만은 양력 12월 25일 생일상을 차려 주었다. 그는 1950년 12월 25일 오후 하선 직전 배 위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그래도 다행히 거제의 병원에 입원할 수 있었고 산모는 미역국도 얻어먹을 수 있었다. 거제 사람들의 도움 덕택이었다.
이경필씨의 부친은 생전에 사진관을 운영한 것을 비롯 여러 일을 했는데 그때마다 상호로 붙인 것이 ‘평화’였다고 한다. “어서 가라. 나는 남아 있겠다. 늙었으니 죽이기야 하겠음둥?” 이라며 자신을 떠밀던 어머니와 생이별을 시켰던 전쟁이 미워서였을까. 그리고 거제도에서 동물병원을 차린 아들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갈치 한 마리도 나눠 먹으려 했던 거제도민들에게 평생 감사하고 살아라.”
한국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이긴 하지만 전쟁 전 인구는 10만이 채 안됐었지만 전쟁 중 몰려든 피난민의 수는 15만 명이었다. 그 막대한 인구가 거제도에 밀어닥쳤으니 알력이 생길 법도 하건만 거제도 사람들은 땅을 내 주고 미역을 나눠 주고 입던 옷을 건네며 피난민들을 맞았다. 모진 사람이야 있었을 것이고 텃세도 부리는 이도 있었겠지만 대다수의 피난민들은 거제 사람들의 은혜를 잊지 못했다. 내 아버지를 포함하여.
“하루는 부대 앞에서 중학교 1학년 정도 되는 학생이 껌을 사라고 해서 쳐다보니 아이가 아주 똑똑하게 잘 생겨서 그 학생의 내력을 물어보니 피난 중 부모형제들과 모두 헤어져 고아로 피난민 대열에 휩싸여 거제도까지 내려와 구두도 닦고 껌도 판다고 하면서 목에 때가 더덕더덕한 거지와 다름없는 어린 아이가 연신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 울고 있었다.”
거제도 연초 중학교 교사의 기억이다. 거제도 각 학교는 피난민들의 아이를 수용했고 피난민들 가운데에서 교사 자격 있는 이를 뽑아내 교단에 서게 했고 안되면 길바닥에서라도 가르쳤다.
2010년 7월 5일 거제도 일운면 사무소에 난데없는 수건 한 박스가 도착했다. 수건과 함께 보내온 편지에는 발신자의 사연이 담겨 있었다. 보낸 사람은 나이 고희를 헤아리는 형제였다. 6.25 때 열 세 살, 열 살의 형제는 부모와 떨어져 피난선에 올라타 거제도에 떨어진 후 어른도 없이 고달픈 나날을 보내며 어머니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일운면사무소 앞에서 배를 움켜 쥐고 주저앉아 버렸다고 한다. 그때 지켜보던 면사무소직원이 다가섰다.
“느그 피난왔제? 아부지 어무이는 어디 계시노?”
“같이 아이 왔슴다. 어드메 있는지는 알 수 없슴다.”
“밥들은 언제 묵었노.”
그때 동생이 찢어질 둣 울기 시작했다. 더 이상의 대답이 필요없던 공무원은 호주머니를 털어 500환을 건넸다고 한다. “죽이라도 사묵고 기운 차리라.” 그리고 형의 어깨도 두드려 주었으리라. “어머니 오실 때까지 동생 잘 건사해야 할 거 아이가.”
그 500환의 은혜를 형제는 평생 잊지 못했다. 그리고 “죽기 전에 은혜라도 갚기 위해” 수건 서른 장을 면사무소에 보낸 것이다. 비록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몰라 그 공무원에게 보내지는 못하지만 당신의 500환이 우리를 살렸다는 의미로 자기들 이름까지 박아서.
전쟁 통에 정든 고향을 떠나 듣도보도 못한 남도의 섬에 내려야 했던 15만의 북도 사람들. 그들은 대개 거제도를 떠났지만 거제 사람들의 은혜와 인심을 잊지 못했고 그 은덕비를 세워 고마움을 전하고 있다. 흥남철수는 6.25라는 피비린내나는 냉혹한 전쟁의 틈바구니에 피어났던 인도주의의 꽃이었다.
흔히들 빅토리 메레디스 호의 기적이 많이 운위되지만 1950년 12월 25일 수만 명의 피난민들이 내린 거제도에서 베푼 기적은 그만큼 훈훈하고 따뜻했다. 그런 의미에서 1950년 크리스마스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크리스마스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