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다. 뜨거운 감자는 2012년 발표한 5집 『Who Doesn’t Like Sweet Things』 이후 6년 만에 새로운 곡을 발표했다. 누군가는 연가라 생각할 수 있는 신곡 <중력의 여자>는 사실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그동안 뜨거운 감자의 음악에서 듣기 어려운 형식의 곡이기도 하다.
팀의 프론트맨인 김C를 만나 <중력의 여자>와 그동안의 음악, 그리고 삶에 관해 물었다. 질문이 던져지면 한참 동안 답이 이어졌다. 달변이었고, 밑줄을 긋고 싶을 만큼 인상적인 얘기들이 많았다.
신곡 <중력의 여자>: 김혜자에서부터 ‘기울어진 운동장’까지
6년 만에 신곡이다. 마지막 앨범이 2012년에 나왔는데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멤버가 이제 나와 고범준이다. 그런데 둘 다 싫증이 났던 것 같다. 그동안 우리 해온 관성적인 음악 때문이다. 둘 다 말은 딱히 하지 않았지만, 익숙한 악기로 익숙한 느낌의 바운더리 안에서 계속 음악을 하니까 자기 반복과 자기복제가 이어지면서 재미가 없더라. 그래서 어느 순간 손악기들을 확 놔버리고 쳐다보지도 않았다. 악기를 팔거나 다른 악기와 바꿔버리기도 했다.
대신, 범준이나 나나 어릴 때부터 전자 음악에 관심이 많아서 앨범마다 한 곡 정도씩은 해 왔는데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마침 나는 그때 독일에 있었다. 독일에서는 그런 게 팝 음악이다. 그걸 듣다 보니 자연스럽게 더 관심이 가더라. 그래서 전자 음악 작업을 본격적으로 하게 됐다.
그렇게 계속 쉬거나 놀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각자 솔로 작업도 했고, 나는 언더그라운드 클럽에서 디제잉도 했다.
그럼 둘이 “다시 해보자”라고 이야기가 된 건 언제였나?
굉장히 자연스러웠는데, 이번 신곡 <중력의 여자> 작업은 김혜자 씨 때문에 이루어진 거다. 김혜자 씨가 출연한 드라마가 있는데 방송되기 전에 나에게 시놉시스를 보내줬다. 그걸 보고 음악을 만들어보면 어떻겠냐 해서 봤다. 그런데 요즘 상황이랑 관계가 있어 보이더라.
2년 전쯤의 드라마였는데, 할머니-엄마-딸로 이어지는 한국 사회 여성들의 고단한 삶을 그린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드라마 속의 김혜자 씨를 보면서 쓴 곡이다. 모르는 사람들에겐 이게 연가로 보일 수 있겠지만, 연가는 아니다. 할머니가 “너희도 언젠가 내 나이쯤 될 텐데 그때 내가 했던 말이 기억날 거야”라며 독백 형식으로 들려주는 이야기다.
드라마가 방영된 건가
방영됐다. 그런데 스토리가 있다. 알고 보니 드라마 음악은 완전한 산업이더라. 드라마 음악을 맡은 사람들이 직접 음악을 만들지 못한다. 사람들의 요구대로 뽑아내야 한다. 그쪽에서는 <고백> 같은 곡을 원한다고 말했고, 나는 그러면 그냥 <고백>을 가져다 쓰라고 말했다. 나는 시놉시스를 보고 내가 느낀 걸 표현할 수는 있지만 원하는 대로 만들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내가 늘 말하는 게 있다. “네 감동이 내 감동보다 낫다고 말할 수는 없어.” 그렇게 서로 생각하는 게 다르다 보니 그 일은 없던 일이 되었다. 드라마와는 관계없이, 내가 느꼈던 감정을 곡으로 완성한 거다.
뮤직비디오도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반대로, 지금은 지원도 없지만 그런 부담에서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작가의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다. 내가 타협할 필요 없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보호막도 없고 예산도 없다. 그 정도 비디오를 찍으려면 몇천만 원이 들어간다. 그래서 어떡하나, 하던 와중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허재영이라는 친구를 알게 되었고, 그 친구가 런던에 있는 편집자에게 비디오 작업을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한 거다. “그런데 돈이 없어”라고 말하고(웃음).
어느 경제학자가 쓴 글을 봤는데, 금전적 인센티브가 먹히는 종목이 있고 먹히지 않는 종목이 있다고 한다. 육체노동이나 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인센티브가 먹히는데, 창작집단에는 먹히지 않는다고 하더라. 작곡가에게 천만 원 더 준다고 곡이 잘 써지는 게 아니다. 그럼 다 천만 원 주겠지.
하지만 인센티브가 허상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다. 금전적 인센티브가 있고 권한적 인센티브가 있다. 창조적인 사람들에게 아무런 간섭 없이 권한을 주면 그때 퀄리티가 나온다.
내가 비디오 작업에서 생각한 게 이거다. 모든 권한을 주고 작업했고, 그 사람이 요구하는 대로 프레임, 앵글, 라이트를 다 맞춰서 찍었고, 그 사람이 편집까지 완료해 주었다. 나는 비디오 안의 액터일 뿐이다. 그래서 이 비디오는 내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들의 작업에 음악과 내가 들어간 거다.
뮤직비디오에서 보이는 자세 하나하나까지도 다 그쪽에서 요구한 건가?
거의 그렇다. 아주 디테일한 것까지는 아니지만 의자에 매달려주세요, 이런 거다. 비디오에는 중요한 철학이 하나 관통하고 있는데 오비이락이라고 할까, 미투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작업한 거지만 페미니즘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여기가 여성들에게 평평하지 않은 땅이라는 걸 나도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평등하게 될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부르노 무나리라는 이탈리아 작가의 작품인 ‘불편한 의자’에서 편안함을 찾는 과정을 차용해서 비디오를 만들게 된 것이다.
서로가 만족하면서 재미있게 찍었다. 좋은 대안을 찾은 것 같다. 반대로 그들이 음악이 필요할 때면 나도 그런 식으로 참여햘 생각이다. 비디오 작업이 좋은 크리에이티브 그룹으로 이어진 셈이다.
음악 자체는 브라스가 곡을 이끌어가는 마치풍의 곡이다. 이건 그동안 뜨거운 감자의 음악에서는 쉽게 들을 수 없던 거다.
조금 거리감이 있는데, <고백>이 들어있는 가상의 영화음악 사운드트랙 작업, 우리가 Imaginary Sound Track’이라고 불렀던 작업을 한 후로 음악이 첫 번째가 아닌, 영상이 있고 음악이 있는 듯한 작업을 좋아하게 됐다. 이 곡도 처음에 시놉시스가 있고 거기에서 음악을 만든 거니까 시작은 같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색을 드러내기보다는, 출발점이 그렇다 보니 음악이 다르게 나온다. 만약에 이런 식의 작업이 계속 이어진다면 뜨거운 감자의 음악도 더 다양해질 것이다.
<중력의 여자>를 듣고 가장 먼저 귀에 들어오는 건 ‘브라스’와 ‘왈츠’풍의 구조다. 이런 것들은 시놉시스를 보면서 자연스레 떠오르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게 참 재미있는데, 이런 인터뷰니까 이런 얘기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여자친구가 나에게 음악을 어떤 식으로 만들어 달라고 요구할 때가 있다. 아빠를 목수로 둔 딸이 나무로 기린을 만들어 달라고 하는 것처럼, 내가 음악가니까 여자친구가 그런 요구를 하는 거다. 브라스가 들어간 마칭 밴드 같은 음악이 좋다고 할 때도 있고, 영어 가사로 된 곡을 만들어달라고 할 때도 있다. 요구들이 밀려 있는데 이번에 그중 하나가 해결된 거다.
뜨거운 감자: 2인조 체제에서부터 음악까지
뜨거운 감자 4집부터 일렉트로닉 성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미 그때부터 전통적인 록 세션, 4인조 밴드 구성에 싫증이 나 있던 건가?
그건 아니고, 멤버 간의 성향에 따라 가입과 탈퇴가 반복되다가 결국 범준이와 나만 남은 거다. 둘 다 변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능한 일이고, 나머지 멤버들도 이해한다. 드러머 입장에서는 사람 대신 기계를 쓴다는 걸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거다. 그렇다고 아예 안 쓴다는 건 아니고, 당연히 필요한 순간에는 다시 할 것이다.
그럼 지금 뜨거운 감자는 어떤 음악을 하는 팀이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답하겠나?
그건 정말 대답을 못 하겠다. 그 질문은 곧 ‘앞으로 뭘 할 거냐’ 라고 묻는 것과 같은데, 현재도 잘 모르는데 미래를 어떻게 말할 수 있겠나. 예전부터 그랬지만 난 순간을 표현하는 걸 중요시한다. 그리고 지나간 이야기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좋아하지 않는다.
뜨거운 감자 음악도 그렇고, 솔로 음반도 그렇고 음악을 들어보면 외국 동시대의 음악도 많이 찾아 듣는 게 느껴진다. 전에 홍대에 있는 한 음반점에서도 음반 사는 걸 봤는데, 그렇게 새로운 음악을 찾아 듣는 게 그냥 순수한 애호가의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아니면 음악 작업에 필요해서 그런 건지 궁금하다.
전자다. 그리고 새로운 음악은 대부분 우연치 않게 알게 되는 것 같다. 나와 전혀 인과관계가 없는 사람의 작업기를 읽다가 그 사람이 뭘 틀어놓고 작업했다는 걸 보면 자연스레 찾아 들어보게 된다. 그 음악을 들어보고 다시 비슷한 성격의 음악도 찾아 듣고. 음악은 연결성을 갖고 들어가는 게 중요하다.
참고할 만한 레퍼런스 사운드가 있을 때 이를 자신의 음악에 받아들이는데 거리낌이 없는 편인가? 그런 경우에 누구누구를 따라했다는 비판, 또는 비난을 쉽게 하는 것 같다.
사람들은 이해를 시키고 싶어 한다. 이해를 시키는 데 제일 좋은 건 대명사를 대입시키는 거다. 음악을 말로 설명하는 데 무리가 있으니까 누구누구 같아, 라고 말하는 거다. 하지만 디테일하게 들어가면 다 다르다. 사람들이 음악을 많이 아는 것 같지만, 음악이 가까이 있어서 쉽게 평가를 하는 것뿐이다. 비슷하게 음식이 그렇다. 사람들은 늘 음식을 두세 번씩 먹으니까 자기가 음식에 대해 많이 안다고 생각한다. 내가 봤을 땐 짜고 달고 정도밖에 모르는 것 같은데 말이다.
예를 들어 설치미술에 관해 얘기해보라면 쉽게 말 못 할 거다. 그건 멀리 있는 거니까. 설치미술이 만약 우리 일상생활에 들어와 있다면 쉽게 말할 거다. 백남준이 어떻고 뭐가 어떻고 하면서 말이다. 영화 제목처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쉽게 말하는 식이다.
이제 회사를 나와서 독립적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이런 방식을 택한 이유가 있나?
우리보단 아마 레이블 측에서 부담스러워할 거다. 말을 잘 듣기를 하나, 비즈니스 면에서 손익대비를 봤을 때 유리할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우리가 있다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는 존재감 있는 아티스트도 아니고, 커다란 매력이 없는 거다.
이제 2인조 체제로 안착이 됐다고 봐도 되는 것인가?
설마 우리 두 사람 틈바구니에서 또 할 사람이 있을까. 사람 일은 장담할 수 없는 거지만 쉽지는 않을 거다.
둘이 할 때 장점과 단점을 얘기해준다면.
장점은 역시 선장이 많으면 힘드니까 의견을 도출하는데 복잡하지 않고 큰 문제가 없다는 것. 단점은 역시 또 둘이니까, 자식 많은 형제가 부러울 때 있지 않나. 둘이니까 외로울 때도 있고, 아이디어를 짤 때 누가 있었으면 할 때도 있다.
그동안 뜨거운 감자를 거쳐 간 멤버를 보면 좋은 연주자에 대한 욕심이 많은 것 같다.
공교롭게 그렇게 됐다. 하세가와 씨도 그렇고 손경호 씨도 그렇고 (이)기태, (고)경천이, (조)정치, 홍갑이. 우리는 펑크 밴드가 아니다 보니까 연주도 중요하다. 기본적으로 중요하다 생각하니까 그 분야에서만큼은 이래라저래라 다른 소리 할 필요 없는 연주자들과 하게 된다. 기술적으로 요구를 하는 부분은 전혀 없다. 대신 여기서 좀 더 고조됐으면 좋겠다거나 차분했으면 좋겠다는 느낌 같은 것만 전달한다. 테크닉적으로야 뭐, 내가 치면 반주고 그들이 하면 연주일 정도로 큰 차이가 있다.
솔로 음반 [Priority] 소개글을 직접 썼는데, 거기에서 “난 처음부터 이 앨범을 하이파이(hi-fi)로 만들고자 했다”는 구절이 인상적이었다. 보통 뜨거운 감자를 생각하면 하이파이보다는 빈티지하거나 투박한 이미지를 생각한다.
첫 앨범 만들기 전, 고단한 인디 밴드 할 때부터 늘 그랬던 것 같다. 나에겐 음악을 부르는 것보다 만드는 게 훨씬 더 중요했다. 그러다보니 녹음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해서 밴드를 만들고 녹음부터 시작했다. 우리 앨범 사운드는 나와 멤버들이 직접 만졌다. 케이블도 직접 납땜해서 녹음했을 정도로 나에겐 하이파이가 되게 중요했다.
처음부터 좋은 소리로 녹음을 해서 해상도가 굉장히 높은 사운드를 들려주고 싶었다. 데뷔 앨범은 돈도 없었고 도둑녹음을 한 거라 상황이 안 됐지만, 두 번째 앨범부터는 본격적으로 메이저 회사의 도움을 받아서 하이파이를 놓치고 간 적이 없다. 앨범들 들어보면 동시대에 나온 다른 앨범들과 비교할 수 없는 사운드 퀄리티가 나왔다.
그런 부분은 거의 부각이 안 된 것 같다.
괜찮다. 내가 TV에 나오는 일이나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상관없다.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이야기할 수도 없는 거고. 내가 알려주고 싶은 건, 단순히 <고백>이란 곡 자체가 아니라 그 곡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그 소리를 담기 위해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연주자도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스타 연주자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게 오랫동안 하이파이에 공을 들여왔고, 세 번째 앨범은 거의 2년을 녹음했다. 그렇게 하고 나니까 기분이 되게 불쾌해지더라. 갈기갈기 찢기는 기분도 들고 해부당하는 기분도 들어서 <고백>을 작업 할 때는 굉장히 스피디하게 작업하기도 했다. 어떤 게 더 낫다 우열을 가리기는 어려운 것 같고, 순간적인 에너지에 가까운 것 같다.
폭발적인 인기 이후: 베를린으로 떠나다
좀 전에 <고백> 얘기도 하셨고, 아까 <고백> 같은 곡 하나 더 만들어달라는 요청도 있다 했는데, 지금 <고백>이란 곡을 생각하면 느낌이 어떤가?
말 그대로 이렇게 웃게 된다. 인생에 이런 기회가 음악가들에게 다 있지는 않다. 온 나라에 다 울려 퍼지고,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도 나오고 이러면 희한하게 느껴진다. 그럴 때 정말 알려지긴 알려졌나 보다 생각하게 되고. 연습하고 있는데 매니저가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서 1위 후보에 올랐다고 출연요청이 왔다 말하는데, 그런 건 영화에서나 있는 일인 줄 알았다. 정말 뻔한 클리셰 영화에서나 나오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현실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까 신기했다.
한 번쯤은 경험해볼 만한 일이다. 하지만 인기가 좀 지나가고 나서 범준이랑 그런 얘기를 했다. 이거에 대한 기억은 잊자고. 그러지 않으면 계속 답습하게 될 거고, 그런 비슷한 곡을 계속 만들어달라는 요청이 올 거니까 아예 쳐다보지도 말자고 했다.
그런데 그때 독일로는 왜 떠난 건가?
그때는 떠날 수밖에 없었다. 워낙 국민적 관심을 받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던 중이었다. 그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그 프로그램도 처음에는 홍보성 차원에서 한 번 출연하는 것으로만 알고 나갔던 건데 고정이 된 거였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다른 멤버들은 다 계약이 되어 있었고 나만 안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만 그만둘 수 있었던 거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과도한 집중과 조명을 받았다. 거리를 다니기도 쉽지 않아지니까, 뜨거운 감자에서도 균형이 무너지는 게 느껴졌다. 멤버들에게도 미안했고. 8살부터 80살까지 아는 사람이 되어 버리니까, 그게 처음에는 밴드에 도움이 될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개인인 김C는 점점 유명해지는데 그게 밴드의 성취와는 관련이 없었다. 그때가 3집이 나왔을 때인데, 2년간 작업한 앨범의 음악과 나의 인기가 균형이 맞지 않는 상황까지 온 거다.
사람들은 <1박 2일>의 김C를 보러 기대를 가지고 공연장에 오는데 정작 음악을 듣고는 놀란다. <각설탕> 이런 곡을 부르니 괴리감을 더 커졌다. 2년간 처절하게 노력해서 우리의 최선인 앨범이 나왔는데 결과적으로 잘 안 되니까, 아이가 아프면 부모가 싸우듯이 원인을 찾게 된 것이다. 안타까운 시기였다. 그래서 그만둬야 할 것 같다고 회사에 말했다. 회사에서는 (방송에) 들어가기도 어렵지만, 방송국 시스템상 그만두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디 다른 나라로 떠나면 모를까’라고 말했고, 나는 ‘그래? 그럼 떠날게’ 이렇게 된 거다. 떠나서 그만둔 것이다.
방송 관계자는 별말 없었나?
나영석 피디와 독대를 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촬영을 해봤는데 내가 형을 모르겠냐”며, 그냥 낮술이나 한잔하고 가자고 얘길 하더라. 회사에서 보내서 오긴 했는데 당신이 그 마음을 먹었다면 그대로 결정되는 거지 누가 말한다고 바뀌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안다고. 그래서 정말 기간도 정하지 않고 준비 하나 없이 가방 하나 가지고 떠났다.
왜 하필 독일 베를린이었나?
거기가 제일 싸다고 해서. 조건이 문화적으로 충족되는 공간이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같은 데를 생각했는데, 유럽 잘 아는 사람이 거기는 집도 작고 물가도 비싸다고, 베를린이 싸다고 얘기를 해줬다. 몇 년을 사람들이 다 알아보고 생활이 완전히 바뀌는 삶을 살지 않았나. 서서히 그런 것도 아니고, 갑자기 이렇게 되어 버렸다. 늘 타던 좌석버스에 올랐는데 버스 안의 모든 사람이 얼음이 됐던 장면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그때 TV를 안 봐서 내가 출연한 프로그램의 인기나 현상을 잘 모르고 있을 때였다.
사람들이 다들 “어?” 하며 신기하게 쳐다봤고, 바로 그다음 날로 회사에서는 매니저를 붙여주고 차량을 제공해줬다. 그날로 대중교통 이용이 끝나버렸다. 되게 혼란스러웠다. 나중에는 ‘내가 음악을 좋아하는 게 맞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회의 속에 살다가 날아간 거였으니까, 베를린에서는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냈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나를 기다려 본 거다. 아무것도 안 하고 채소가게에서 재료 사다가 간단하게 식사하고 그냥 동네 걷는 게 다였다.
음악도 거의 안 들었나?
일단 날 아무도 모르는 곳에 와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그냥 막 돌아다녔다. 저녁 되면 집에 와서 밥 해 먹고. 오후 4시면 어두워지는 동네에서 뭘 하겠나. 그렇게 6개월 정도 있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기타를 들고 뭘 하고 있더라. 결국은 내가 이걸 좋아하는 게 맞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거기에서 15개월 있으면서 솔로 작업과 밴드 작업 결과물을 분리해서 한국에 가져왔다. 돌아오자마자 봄에 솔로 음반을 내고 가을에 <팔베개>가 있는 뜨거운 감자 5집을 내고, 두 장을 한 해에 다 냈다.
베를린 체류가 삶이나 음악을 대하는 태도에 많은 영향을 끼쳤나?
완전히 터닝 포인트가 됐다. 그때 내가 딱 마흔 살이었다. 아직도 섬찟하다. 그때 내가 안 갔다면 그냥 느글느글하게 잘 먹고 잘 살고 있을 거다. 그런데 그 모습이 진짜 끔찍하게 느껴진다. 아마 건물주 같은 거 하고 있었겠지. 계속 돈 벌었으면 못하는 법은 없었을 테니까 그렇게 부를 축적했겠지만, 나한테 또 한 번 선택하라 해도 또다시 베를린을 택할 거다. 그게 더 나에게 가치 있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음악도 그렇다. 그 전에는 그냥 주어지는 대로 했던 것 같다. 베를린에서 처음으로 음악을 분석적으로 듣게 되었다. 클래식 음악도 환경이 그렇다 보니 열심히 들었다. 스코어가 있는 음악과 없는 음악의 차이를 알게 되었고, 왜 저들의 문화가 위대한지를 알게 됐다. 가치를 알게 되고 큰 존중을 느끼게 됐다.
김C, 아직도 할 말이 많은 음악가의 목소리
김C라는 음악가의 장점이 있다면 무어라고 생각하나.
내가 나를 얘기하려니 좀 그렇긴 한데, 가창 형태의 곡에서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전달’이다. 메시지의 전달. 이게 나의 장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잘 들어볼 필요가 있다. 사실 여태까지 음반 작업을 하고 많은 인터뷰를 했지만, 이 사람이 음악을 잘 안다거나 뭔가를 알고 왔다는 느낌은 받아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말하고 싶은 부분에 관해 물어보지 않으니까. 그냥 들리는 대로만 해석을 하는 거다.
말하자면 <중력의 여자> 같은 곡도 그 사람들에겐 연가로 다가갈 것이다. 설치미술에 설명이 뒤따르는 것처럼, 음악에도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 물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그래서 얘기 못 한 부분이 무수히 많다. 나의 강점은 보편적인 것이라 많이들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메시지들이 있다. 굉장히 정치적이고, 굉장히 사회적이고, 굉장히 성적인 메시지들 말이다.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발음도 너무 정확하고 좋다.
(윤)종신이 형처럼 또박또박 노래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뭐라고?”라는 반응이 오지 않을 정도로는 노래하려 한다. 요즘은 한국어와 영어가 혼재되어 있는 가사도 있고 큰 의미가 없는 가사도 있는데, 내가 하는 음악은 전달이 안 되면 안 되는 종류의 음악이다. 그래서 명확하게 전달을 잘 하고 싶다.
새 앨범을 준비하고 있나?
딱히 그렇진 않다. 우리는 올해 살면서 처음으로 디지털 싱글이란 걸 내봤다. EP도 내 개인 솔로 음반만 내 봤지 나머지는 다 앨범 형태로만 내왔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시대를 탓할 수는 없는 거니까, 올해는 싱글 하나 정도를 더 낼 계획이다.
‘앨범’이란 개념을 아직도 고집하나?
그렇다. 이런 것들이 쌓이면 어떤 포맷으로 발매할지는 모르겠지만, 내 솔로 음반도 바이닐로 냈고 범준이의 솔로 작업도 바이닐 발매를 앞두고 있다. 더 가치 있는 유형의 포맷에 담아서 앨범을 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클럽 DJ를 하고 있으니까 집에 바이닐만 수천 장이 있다.
앞으로의 계획은.
지금 현재에 만족하고 있다. 각자 개인 작업도 중요하니까 범준이의 개인 작업도 기다리고 있다. 뜨거운 감자를 좋아해 주는 분들께는 갈증이 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놀고만 있는 건 아니니까, 중간중간 새로운 작업을 선보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