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이웃 중 다른 사람들에게는 차마 이야기할 수 없는, 충격적인 사연을 가진 이가 더러 있다. 남들과 심각하게 다른 ‘무언가’ 때문에 결핍을 느끼고, 열등감과 상처로 말미암아 속칭 기행적인 삶을 살아온 이들 말이다. 사실 그들 대부분은 인식의 사각지대 속에 있다. 그래서 평소에는 그런 이들이 주변 동네 어딘가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모른다.
그들의 가슴 아픈 속사정이 화제성과 선정성으로 둔갑해 방송을 탈 때 비로소 우리는 그들의 존재를 깨닫는다. 과거 내가 저장 강박(Compulsive hoarding) 증상에 대해 처음 안 것 또한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살았을지 신기하다며 누구나 한마디씩 해댔고 덩달아 솟아오르는 호기심에 TV로 눈길을 돌리니 온갖 물건을 버리지 못해 ‘쓰레기장’이 되어 버린 집에서 숨죽이며 살아가는 누군가의 삶이 방영되었던 것이다.
저장 강박이란 자신이 소유한 물건을 어떠한 이유로 인해 차마 버리지 못하고 생활공간에 계속 쌓아 두는 것을 말한다. 실제 사용 여부와 관계없이 온갖 잡동사니들을 주워 모으고, 그것을 주위에 두름으로써 자신만의 고유한 생활공간을 만드는 것이 저장 강박 증상 보유자들의 특징이다.
사실 주위를 잘 둘러보면 물건 잘 못 버리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그러나 그들 모두에게 저장 강박 증상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물건 잘 안 버리는 그들이라도 더 이상 그럴 수 없는 한계 상황에 도달하면 결국 물건을 버리는 선택을 한다. 혹은 스스로의 의지로 그러할 수 없더라도 주위의 요구에 마지못해 물건을 정리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저장 강박 증상을 가진 이들은 상상 이상으로, 그들이 가진 물건들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들에게 있어 자신이 가진 물건이 버려지는 일은, 곧 자기 자신이 어딘가로 버려지는 일과도 같을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저장 강박 증상에서의 물건을 곧 ‘확장된 자아(Extended Self)’로 본다. 다시 말해, 물건의 소유는 타인을 향한 과시의 목적이라기보다는 내면적 정체성의 확립을 위해 행해지는 것이다.
물건에 개인적인 의미를 담고 정체성을 담아 그것을 곁에 ‘보존’한다. 보존된 물건을 버린다는 것은 곧 자신의 정체성 일부를 버린다는 것과 다름없는 행위다. 그래서 저장 강박 증상 보유자는 자신이 소유한 물건을 버리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왠지 ‘나’를 잃어버리는 것 같은 느낌까지 받는다. 후술하겠지만 물건을 통해 정체성을 구축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물건을 단지 자신의 소유물이 아닌 ‘사귐’의 대상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장 강박 증상은 왜 나타나는가? 연구자들은 먼저 인지적 능력의 손상 문제를 언급한다. 저장 강박 증상 보유자들은 물건의 사용 가치를 판단하거나, 처분 여부에 대해 생각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 특정 물건을 버릴 것인가, 버리지 않을 것인가 문제를 판단할 때 사실 우리가 고려해야 할 부분들은 여러 가지다.
이 물건이 주는 효용성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고민하는 것은 물론 그 효용성을 앞으로 얼마나 누릴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 즉 물건의 기대 수명이 어느 정도나 될 것인지에 대한 합리적 예측이 필요하다. 그뿐이랴. 물건을 버리기로 결정했을 때 비슷한 효용을 지닌 대체품을 얼마나 쉽게 구할지도 생각해 보아야 하며 버리거나 버리지 않았을 때 생활에 어떤 변화가 나타날지 각각의 미래 상황을 시뮬레이션해보는 절차도 중요하다.
그런데 어떠한 인지적 결함으로 인해 이런 의사결정, 추론, 판단 과정들을 원활히 수행할 수 없다면? 가장 ‘안전한’ 선택을 하는 수밖에 없다. 물건을 아예 처분해버림으로써 후에 닥칠지 모르는 통제 불능 상황에 맞닥뜨리느니 차라리 조금 불편하더라도 물건을 소유해 결국 상황을 내 통제권 안에 두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무생물에 대한 적극적인, 그러나 자각 없는 의인화
저장 강박 증상의 핵심 원인은 바로 물건을 향한 과다한 애착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비합리적 신념이다. 저장 강박 증상 보유자에게 물건이란 ‘물건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즉 그들은 물건과의 관계를 단순한 소유자-소유물의 관계가 아닌 깊은 ‘사귐’의 단계로까지 발전시킨다. 대인관계 대신 대’물(物)’관계를 만든다고나 할까.
그러고 나서 마치 사람과의 관계에서 우정을 나누고, 신뢰를 쌓듯 물건과의 관계 속에서 우정을 나누고 신뢰를 쌓아 나간다. 슬픈 일이 생기면 물건과의 교감을 통해 아픔을 나눈다. 기쁜 일이 생기면 마찬가지로 물건과의 교감을 통해 마치 그 물건이 내 일을 ‘같이 기뻐해 주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물론 물건(혹은 그 너머의 무엇)과 ‘사귐’을 행한다는 발상은 인류 보편의 정서로 간주될 수 있을지언정, 새로운 것은 아니다. 무생물에도 영혼이 있다(혹은 깃들어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 애니미즘(Animism)적 사고관은 물건 너머에 존재하는, 초월적 영혼의 존재 가정을 가능케 하는 등 원시 종교 성립의 근본 원리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런데 만약 이 저장 강박 심리가 애니미즘이 내포한 사고관과 본질적으로 유사하다고 전제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애니미즘 사고관이 물건 그 너머에 있는 어떤 ‘영적 대상’을 향하는 것이라면 저장 강박 증상 보유자 또한 물건 그 자체가 아닌, 그 물건을 통해 만날 수 있는 그 ‘무언가’를 갈구하는 것은 아닐까? 물건을 못 버리는 행위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가 그 ‘물건’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의 눈에 비치는 것은 그 물건 너머의, 자기가 투사한 어떤 갈망 같은 것이 아닐까?
저장 강박 증세라는 것이 공허한 정체감을 내부가 아닌, 외부의 시도를 통해 메우려는 노력이라는 심리학자들의 견해는 이를 뒷받침해주는 듯하다. 요컨대 저장 강박은 물건의 직접적 효용 가치가 아까워서 생겨나는 증상이 아니다. 공허한 마음을 무언가로 채워야 함에도, 그럴 만한 대상이 없기에 ‘물건이라도’ 대리로서 그 곁에 두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물건을 곁에 둠으로써 얻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즉 물건은 ‘어떤 갈망’에 대한 대리였는가? 그들이 어떤 종류의 ‘결핍’을 경험하는지 엿보기 위해서는 실제로 저장 강박 증상 보유자가 소유한 물건으로 어떤 행동을 하는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했듯 저장 강박 증상 보유자들의 주된 특징은 물건에 대한 ‘감정적 애착’이다. 마치 사람을 만나 사귀듯, 사람처럼 물건을 대하는 행동. 여기에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저장 강박 증상 보유자들이 가진 결핍이 다름 아닌 ‘사람’과 관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몇몇 심리학 연구 결과에 따르면 주위로부터 애정과 수용을 충분히 받지 못한 사람이 저장 강박 증세를 보이기 쉽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충분히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받으면 저장 강박 증세가 호전되는 경향을 보인다.
안타까운 것은 타인으로부터의 애정과 수용을 누구보다 갈망하는 것이 그들임에도 어떻게든 그 공허함을 메우고자 선택했던 행동들이 오히려 독이 되어, 타인과의 애정 어린 접촉과 교류를 막아버리고 만다는 점이다.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이 필요 이상으로 생활공간을 침범하는 터라 위생적 문제, 안전 문제, 편견과 고정관념 문제 등으로 인해 저장 강박 증세 보유자와 타인 간의 교류는 어려워진다. 그러다 보니 더더욱 깊어지는 공허감을 해소하고자 애꿎은 물건을 쌓아두는 행동이 더욱 심해지고, 타인과 교류할 가능성은 점점 더 멀어진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릴 필요가 있다
우리는 단순히 물건을 버린다고, 버릴 것이라고, 버렸다고 쉽게 이야기한다(물론 연인/가족과의 추억이 깃든 물건이라면 얘기는 다르다). 쓸모를 다한 물건을 처분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에게 있어 그저 상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이들의 심리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떨까? 그것을 ‘물건’ 대신 ‘사람’이라고 여긴다면. 즉, 사람을 버린다고, 버릴 것이라고, 버렸다고 쉽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쓸모를 다한 사람을 처분하면 된다고 쉽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저장 강박 증상 보유자들과 일반 타인들의 결정적 인식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말하자면 그들에게 있어 물건이란 ‘사람’과도 같은, 소중한 교류의 대상이었으므로 ‘버린다’는 생각만큼 잔인하고 무서운 일도 없다. 단지 물건을 버려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지난날의 애정 관계를 정리하고 그 물건과 ‘이별’을 해야 하는 상황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의인화된) ‘사람’에 대한 도리다.
이별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결심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은 물론, 이별 이후 그 마음을 추스를 기간이 있어야 한다. 너무 멀지는 않게, 그렇다고 너무 가깝지는 않도록. 그렇게 서서 그들이 바깥으로 나올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주는 것. 그것이 ‘이별’을 준비하는 그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아닐까.
원문: 허용회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