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나는 연애에 있어서는 순정파지만, 음료에게는 몹쓸 바람둥이다. 나의 혀에 있는 나쁜 버릇 때문이다. 그것은 한 가지 음료에 정착하지 못한다는 것인데… 초코우유를 마실 때도 전에 마셨던 것을 마시지 않는다. 분명 내 취향에 맞는 음료를 알면서도 다른 음료를 찾아 시간을 쏟는다.
최근에는 너무 다양하게 마신 나머지 이제는 새로운 음료를 마셔도 만족을 못 하는 상태가 되었다. 이것은 마치 드라마광인 우리 엄마가 예언 수준으로 드라마를 시청하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나에게 새로운 음료는 놀라움과 감동이었는데, 이제는 보리차 같은 익숙함이 되었다.
음료로 얻은 병은 음료로 해결한다. 국내를 벗어나면 내가 아직 겪어보지 못한 기상천외한 음료가 많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직 못 마셔본 음료가 많다는 것은 참 다행이군. 오랜만에 혀가 활기를 찾았다. 지구의 음료들아 이 바람둥이… 아니 나를 도와줘!
수박오이맛 스프라이트, 이거 판매 가능한 조합입니까?
2018 러시아 월드컵을 보며 모두가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을 응원할 때, 나는 다른 한국인을 응원했다. 바로 마시즘의 구독자(이자 파견요원) S다. 월드컵 시즌에 러시아에 간 그는 수많은 마트와 자판기의 압박수비를 뚫고 한 음료를 찾았다. 러시아에 있다는 전설의 음료 ‘오이맛 스프라이트’ 말이다.
그가 결국 해냈다. 심지어 손흥민의 골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택배를 보냈다. “역시 러시아인들의 오이사랑은 진짜구나” 나는 룰루랄라 포장을 뜯었다. 오이도 맞고 스프라이트도 맞다. 그런데 아니다. 수박이 끼어있었다. 당황스러웠다. 내가 혼란한 음료 구매를 부탁했지만 이 정도로 혼란한 음료를 구해달라고는 안 했는데!
알고 보니 수박오이맛 스프라이트는 올해 나온 신상 음료다. 지난해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던 오이맛 스프라이트를 한차례 업그레이드한 것이다. 심지어 마시는 이들의 건강을 위해 설탕과 칼로리를 없앴다고 한다. 건강은 챙기되, 정신건강을 공격하는 극단적인 음료라. 정말이지 마음에 든다.
이 음료는 저쪽 신사분이 내시는 겁니다
마셔보지 않으면 마시즘이 아니다. 수박오이맛 스프라이트의 뚜껑을 열었다. 오이 향이 먼저 코를 두드린다. 수박은 어디에 있을까? 궁금함에 한 모금 들이켰다. 러시아에는 수박이 덜 익었나 시큼한 수박의 맛이 났다가 짭조름한 뒷맛을 남긴다. 코에는 오이가, 혀에는 수박이, 목에는 스프라이트의 탄산이 전담 마크를 한다. 제법 단단한 팀워크다.
아무래도 당황스러워서 코로 킁킁거려 보고, 한 모금 한 모금을 신중하게 마시게 되는 녀석이다. 이런 맛을 혼자 느끼면 안 되지. 친구에게 오이까지 정성스럽게 얹어서 한 모금을 권했다. 이게 바로 수박오이맛 스프라이트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는 스프라이트를 코끼리처럼 뿜어버렸다.
코카콜라 클리어, 콜라도 탈색하기 있나요?
만약 세상이 망하더라도 콜라는 언제나 검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일본에서 투명한 코카콜라가 나왔다. 일본 녀석들, 복숭아 맛 코카콜라를 만든 것에 이어서 이게 무슨 일이야! 나는 이 천재지변 같은 소식을 확인하기 위해 일본에 파견된 K에게 구매를 부탁했다.
물론 역사적으로 코카콜라가 언제나 검었던 것은 아니다. 냉전 시대 소련의 게오르기 주코프는 최초로 투명 코카콜라를 마신 인물이다. 당시 미국과 적대관계였던 소련에서 코카콜라를 마시는 것은 범죄였는데, 주코프는 미국에 몰래 투명 코카콜라 제조를 부탁했다. 그리고 보드카인 척 투명한 코카콜라를 즐겼다고 한다.
일본에서 투명한 코카콜라가 탄생한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학교나 직장 등 집단에서 어떤 음료를 마시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은 욕구가 이런 투명한 음료를 만드는 것이다. 일본에는 코카콜라 외에도 과일 맛이 나는 투명한 음료, 밀크티 맛이 나는 투명한 음료가 있다.
음료가 투명한 건지 내가 투명인간이 되는 건지
코카콜라 클리어가 도착했다. 다 마신 콜라병에 삼다수를 채워 넣은 게 아닐까 의심할 정도로 투명했다. 향을 맡아보니 레몬의 느낌이 강해서 스프라이트가 아닌가 2차 의심. 마시고 나서야 의심은 누그러졌다. 다만 코카콜라보다는 콤비콜라와 815콜라 어딘가의 맛이 났다.
하지만 코카콜라 클리어의 진정한 맛은 ‘남들 모르게 콜라를 마시는 재미’에 있다. 나는 음료수 반입이 껄끄러운 도서관, 카페, 고깃집, 콜라를 싫어하는 엄마 앞에서 코카콜라 클리어를 마셨다. 아 코카콜라 뒤에 붙은 클리어가 이런 뜻이었구나.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고 물 코스프레 클리어.
하지만 코카콜라 클리어의 위장술이 성공할수록 나 자신도 투명인간이 되는 기분을 느꼈다. 이토록 특별한 콜라를 마시는데 아무도 주목하지 않다니. 결국 콜밍아웃을 하고 나서야 만족스럽게 코카콜라 클리어의 뚜껑을 닫을 수 있었다. 휴, 충분한 관심이었다.
아직 세상은 넓고 마셔야 할 것들은 많아
나의 혀… 아니 우리가 새로운 음료수에 시큰둥했던 이유. 그것은 모든 음료를 ‘맛있다’ 또는 ‘맛이 그저 그렇다’로 분류해야만 하는 따분함에 있었던 게 아닐까? 맛있는 음료는 주변에 충분히 많다. 오히려 맛보다 중요한 것은 음료가 가진 ‘재미’일지도 모른다.
바다를 건너온 수박오이맛 스프라이트와 코카콜라 클리어 덕분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 세상에는 아직 맛보지 못한 기상천외한 음료가 많다는 사실을. 우리의 목마름은 지쳐있을 시간이 없다. 음료를 향한 우리의 모험은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원문: 마시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