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죠스>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이 영화를 통해 블록버스터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2018년, <더 포스트>와 한 달 간격으로 국내에 개봉하는 <레디 플레이어 원>은 스필버그가 왜 블록버스터의 창시자인지, 그리고 여전한 현역이자 80~90년대를 휩쓸었던 블록버스터의 제왕인지 증명하는 작품이다.
<레디 플레이어 원>은 스필버그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걸작이자 극장에 앉아 보고 있는 장면 하나하나가 믿기지 않는 작품이다. 이쯤 되면 스필버그 영화의 끝은 어디일지 무섭고, 놀랍고, 경이롭기만 하다. 단순히 킹콩, 트레이서, 짐 레이너, 아이언 자이언트, 건담, 메카고지라 등의 대중문화 아이콘들이 한 영화 안에 존재하도록 했기 때문에 놀라운 것은 아니다.
<레디 플레이어 원>은 영화를 비롯해 게임, 음악, 장르문학 등의 대중문화를 한 자리에서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그 공간이 바로 영화임을 선언하는 작품이고, 그것을 아주 놀라운 방식으로 증명해낸다. 동시에 스필버그 본인을 포함한 대중문화의 모든 창작자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작품이며, 가상-현실의 대응을 탁월한 방식으로 끌어오고, 현실에 대한 반응인 가상과 가상에 대한 반응인 현실을 통해 미국의 현재를 이야기한다. 어쩌면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쏟아진 온갖 리얼리즘 영화의 홍수 속에서 가장 놀라운 방식으로 이를 이야기하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영화의 줄거리는 굉장히 단순하다. 인구과잉과 식량부족 등의 문제로 모두가 의욕을 잃은 2045년, 게임 개발자인 홀리데이(마크 라이런스)가 제작한 VR 게임 오아시스는 전 세계적 히트를 기록한다. 현실에서의 의욕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모든 것이 가능한 오아시스 속에서 살다시피 하며, 그곳이 곧 일터이자 생활공간이 된다.
홀리데이는 죽기 전에 유언을 하나 남겼는데, 자신이 게임 속에 숨겨둔 이스터에그를 발견하는 사람에게 오아시스를 넘긴다는 것이다. 2위인 인터넷 회사인 IOI의 오너 놀란(벤 멘델슨)은 자본을 동원하여 오아시스를 차지하려 하고, 퍼시발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 웨이드(타이 쉐리던)는 H(리나 웨이스), 다이토(모리사키 윈), 쇼(필립 조) 등의 동료와 함께 그보다 앞서 이스터에그를 발견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숨겨진 아이템을 찾아야 한다는 설정은 수많은 판타지 영화나 <인디아나 존스> 풍의 어드벤처 영화들을 연상시킨다. 다시 말해 영화의 이야기는 굉장히 단순하고 직선적이다. 동시에 이러한 이야기를 가장 흥미롭게 풀어가는 감독이 바로 스티븐 스필버그다.
이스터에그라는 설정은 스필버그가 모든 창작자에게 바치는 가장 완벽한 장치이다. 게임 속 이스터에그는 단순히 게임에서 승리하거나 모든 스테이지를 클리어했을 때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게임 곳곳을 탐색해야 게임을 만들어낸 이들이 숨겨놓은 장치를 발견할 수 있다. 게임, 영화, 음악 등 온갖 대중문화가 뒤섞인 오아시스 안에서 이스터에그를 찾아가는 과정은 창작물 자체를 넘어 창작자와 깊은 관계를 맺는 과정이다.
홀리데이의 이스터에그 콘테스트는 이를 위한 과정이며, 웨이드를 비롯한 플레이어들은 홀리데이가 벌여 놓은 콘테스트 안에서 온갖 대중문화와 창작자를 탐구하게 된다. 이는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들 역시 마찬가지다. 70년대부터 2010년대 사이에 등장한 온갖 대중문화 아이콘들을 스크린으로 만나며 누군가는 과거를 추억하고 누군가는 동시대의 아이콘을 만난다. 영화를 꿈이라는 환상을 스크린 위에 그려내는 작업이라면, <레디 플레이어 원>은 모든 창작자와 관객의 꿈이 담긴 작품이다.
‘OO와 OO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와 같은 단순한 발상부터 단순히 대중문화 아이콘을 등장시키는 것을 넘어 이를 활용한다. <백 투 더 퓨쳐>의 드로리안이나 메카고지라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각 영화의 테마음악이 변형되어 등장하는 장면이라던가, 게임 <모탈컴뱃>과 영화 <에이리언>의 레퍼런스를 뒤섞어 하나의 장면으로 완성시키는 광경은 그저 놀랍기만 하다. 특히 영화 중반부 등장하는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 시퀀스는 그야말로 쇼킹하다.
<레디 플레이어 원>이 지닌 영화적 컨셉이 가장 놀라운 방식으로 발현된 장면이 아닐까? 더 이야기하면 아직 영화를 감상하지 않은 사람들의 감흥을 해칠 것이기에 꼭 극장에서 모든 장면을 확인하길 바란다.
<레디 플레이어 원>의 가장 놀라운 성취는 가상-현실의 대응을 통해 현재를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놀란이 이끄는 IOI는 미국의 은행들이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을 통해 그야말로 ‘돈 놓고 돈 먹기’를 했던 모습을 연상시킨다. 빚이 쌓인 채무자들은 IOI에 끌려가 몸으로 빚을 때워야 하고, 자본 밑의 노예로서 복무하게 된다. 자본은 현실세계에서 추방당해 가상세계로 도피한 사람들을 쫓아 가상세계마저 점령하려 한다.
웨이드의 동료들과 오아시스 게이머들의 연대는 대중문화 아이콘을 반동의 동력으로 삼아 이에 대항한다. 가상의 대중문화 아이콘을 동력으로 삼아 이를 다시 쟁취하고, 이에 대한 반응으로 현실마저 되찾는다는, 그리고 그것을 다시 영화로 만들어내는 <레디 플레이어 원>의 성취는 그저 경이롭다.
인터넷을 비롯한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현실에서 가상을 통해 현실을 쟁취한다는 서사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쏟아진 리얼리즘에 기반한 여러 작품들, 가령 데이빗 맥켄지의 <로스트 인 더스트>, 라민 바흐러니의 <라스트 홈>, 아담 맥케이의 <빅 쇼트> 등의 작품과는 전혀 다른 방식을 취하면서도 강력하게 작용한다.
영화는 이를 위해 홀리데이를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흐려놓는 캐릭터로 상정하여 가상과 현실의 접착을 더욱 강화한다. 또한 후반부에 등장하는 가상세계에 대한 현실세계의 반응숏 교차편집과 이어지는 현실세계에 대한 가상세계의 반응숏 교차편집은 두 세계를 대응시키며 가상(영화를 비롯한 대중문화의 세계)은 현실의 반응이며 그것에 대한 반동으로 현실을 쟁취할 수 있다는 상상력을 보여준다. 이러한 상상력이야말로, 우리가 스필버그와 그의 영화에 기대하던 어떤 궁극적인 지향점이 아닐까?
스티븐 스필버그가 이 작품을 연출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부터 이어진 생각이지만, <레디 플레이어 원>은 스필버그가 아니면 불가능한 작품일 것이다. 수많은 대중문화 아이콘을 탄생시킨 창장자이자 제작자이고, 그 스스로가 하나의 아이콘이 된 사람만큼 이 영화의 상상력에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까? 게다가 <틴틴: 유니콘 호의 비밀>과 <마이 리틀 자이언트>에서부터 이어지는 3D와 CG를 통한 가상세계에 대한 스필버그의 탐구는 영화의 70%가량이 오아시스에서 진행되는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 정점을 맞이한 것만 같다.
스필버그는 디지털을 통해 현실을 이야기하고, 안경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을 통해 그 세계에 대한 믿음을 가진다. 그는 <레디 플레이어 원>을 통해 이러한 믿음이 가장 격렬한 행동과 연대로 이어지고, 이를 통해 가상세계 밖 극 중 인물의 현실, 더 나아가 스크린 밖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들의 현실이 변화할 수 있는 동력이 되길 바란다. 모든 창작자에게 경의를 표하면서도 그들의 창작물과 자신이 쌓아 올린 성취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강력한 믿음이 이 영화에 담겨있다.
<레디 플레이어 원>과 스티븐 스필버그는 그와 동시대에 등장한 리들리 스콧이나 마틴 스콜세지 등의 감독들이 <에이리언: 커버넌트>나 <사일런스> 같은 졸작들로 스스로 쌓아 올린 성취들을 무너트리고 있는 것과는 너무나도 대비된다. <더 포스트>를 통해 트럼프 미국에 필요한 페미니즘과 언론자유를 이야기하고, <레디 플레이어 원>을 통해 블록버스터 역사의 새로운 지평을 연 스필버그의 종착지는 어디일지 궁금해진다.
그럼에도 역시 스필버그가 가장 애정하는 대상은 역시 영화인 것 같다. 영화의 마지막, 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맥거핀이 스필버그가 숨겨둔 이스터에그처럼 등장한다. 스쳐 지나가는 대사 속 짧은 단어 하나이지만(심지어 한국어 자막에서 번역되어 나오지도 않는다), 영화에 대한 스필버그의 식지 않는 애정이 드러나는 요소였다.
<마이 리틀 자이언트>를 보고 “스필버그가 부디 오래오래 더 많은 영화를 만들어주길 바란다”라고 리뷰를 남겼었다. <더 포스트>와 <레디 플레이어 원>을 연달아 관람한 지금, 그 소망은 어느 때보다 간절하다.
원문: 동구리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