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를 왜 못 믿냐고? 어떻게 정부를 믿을 수 있는가?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얘기는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정치학개론 교과서 한 권만 가지고도 충분히 논할 수 있는 내용이다. 아예 처음부터 한 문장으로 요약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신뢰는, 기본적으로, 검증, 감시, 견제 장치를 마련하고 이것들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획득할 수 있다.
코레일의 자회사 설립과 관련하여 온갖 주장들이 오갔다. 노조를 지지하는 측, 노조를 반대하는 측의 논리를 이것저것 정말로 많이도 접했다. 그런데 잘 보니, 그 가운데 유독 도드라지게 설득력이 떨어지는, 그러나 대단히 ‘애용’되는 논리가 있었다. “정부가 민영화를 안 한다고 했는데, 그걸 못 믿는다고 파업하는 게 억지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 논리는 정부와 코레일부터 시작하여 이번 파업에 ‘명분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폭넓게 이용되었다.
하지만 이 논리에는 분명한 문제가 있다. 정부가 안 한다는 걸 무슨 수로 믿는가? 여야의 다툼으로 지분을 민간에 매각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의 법제화가 요원하고, 정관이 정부의 입장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허술한 것임을 생각해보면, 우리가 정부를 믿을 근거라고는 오직 정부의 ‘말’ 밖에는 남지 않는다. 우리는 이것을 정말 신뢰할 수 있는가? 신뢰해도 되는가? 혹은, 신뢰해야 하는가?
정부에 대한 신뢰를 위한 장치들의 모임, 민주주의
인류는 과거 수천 년에 걸쳐 오로지 한 사람에게 권력을 맡기고, 이를 무조건 신뢰하는 것이 얼마나 큰 리스크를 만들어내며,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경험해왔다. 만약 왕(군주)이 사회 전체를 어떤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공명정대하게, 완벽하게 지배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즉 ‘철인’이 지배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효율적이고 이상적인 체제일 수 있겠으나, 현실에 그런 것은 존재할 수가 없을뿐더러, 일시적으로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 지속 가능성을 담보할 수 없다.
그래서 인류는 ‘어떻게 하면 권력 독점에 대한 리스크를 최대한 줄이고 권력에 대한 통제를 확보할 수 있을까’하는 물음에 답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고, 그 귀결이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민주주의 체제이다.
이 체제가 정상적으로 동작하기 위해서는 대단히 많은 장치들이 필요하다. 헌법과 법률을 통한 법치주의와 기본권의 보장, 사법-행정-입법의 삼권분립, 보통선거권, 자유로이 만들어질 수 있는 정당들, 감사원 등등. 공통점이 보이는가? 이것들은 모두 공통으로, 권력의 ‘집중’이나 ‘맹목적 추종’이 아닌 ‘견제’ ‘통제’ ‘감시’에 그 초점을 두고 있다.
대의민주주의 체제 하에서는, 시민으로부터 권력을 이양받은 그 어떤 주체도 독자적으로 아무 제한 없이 행동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경찰은 제멋대로 죄인을 처벌할 수 없다. 정부는 국회의 허락 없이 예산을 마음대로 집행할 수 없다. 사법부는 국회가 제정하지 않은 법률로 심판을 내릴 수 없다. 헌법은 국회가 제정할 수 있는 법률의 범위를 규율하며 공권력을 통제한다. 국민은 행정부의 수장과 국회의 구성원을 선출할 권리를 가진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감시할 수 있을 때, 어떤 하나의 주체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지 못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이 정치체제는 ‘신뢰’를 받을 수 있다.
철도를 민영화하지 않겠다면 필요한 것은 진정성이 아닌 계약서
철도 민영화로 돌아가 보자. 정부는 분명히, 수도 없이 ‘민영화하지 않겠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문제는 정부가 이 약속을 철회했을 때 이를 막을 장치가 전무하다는 점이다. 정부가 ‘민영화하지 않겠다’는 약속에 대해 ‘신뢰’를 얻으려면, 적어도 국회와 협의해서 민간에 대한 자본 매각을 금지하는 법안의 입법을 추진할 필요가 있고, 이런 법제화의 과정을 거쳐 ‘장치’를 마련한 후 자회사 분리를 추진해야 하는 것이다. 어차피 정부나 새누리당이나 ‘민영화 안 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말 민영화를 하지 않겠다면, 야당과 그깟 법률 하나 만드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렵겠는가?
물론 법률이 완벽한 대비책이 되어줄 수 있는 것은 아니나, 없는 것보다는 백 배 천 배 낫다. 정부의 약속만을 믿고, 아무 방지책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정부의 행동을 허용한다는 것은, ‘월급 잘 줄게’라는 말만 믿고 사장과 노동계약을 맺거나, ‘꼭 갚을게‘라는 말만 믿고 차용증도 없이 선뜻 거액의 돈을 누군가에게 빌려주는 것과 완전히 동일한 행위이다.
현 정부가 ‘민영화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문제는 남는다. 박근혜 정부는 정말 민간에 자본을 매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그 다음에 들어설 정부가 민영화를 하고 싶어한다면? 그때는 어떡할 것인가? 이에 대해 저항하면 ‘그건 전 정부의 일이지. 우리는 그런 약속한 적 없는데’라는 말밖에 더 돌아올까?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이제 좀 감이 오는가?
박근혜 정부가 진심으로 저 말을 하는지 안 하는지는, 솔직히 말하면 중요한 게 아니다. 아무 장치도 없이 그들이 스스로 한 말을 지킨다면, 그건 뭐 그것대로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어쨌든 그것도 중요한 건 아니다. 시민에게 필요한 건 ‘진정성’ 따위가 아니라, 계약서 한 장이다. 즉, 그들이 진심이건 아니건 간에, 그들을 제재할 수 있는 어떤 독립된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조건이 갖춰지지 않은 이상, 정부에 대한 불신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은 합리적이고, 정당하며, 이것이야말로 시민적 권리이자 민주주의의 기초적인 작동 원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p.s. 물론 민간에 대한 자본 매각만이 아니라, 자회사 설립-경쟁체제 도입도 충분히 비판해야 하는 부분이다. 민영화를 안 한다고 해서 문제가 없어지는 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