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서는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주장한 ‘악의 평범성’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전에 먼저, 영화 〈더 리더〉가 얘기하는 죄의식을 살펴보자.
〈더 리더〉의 죄의식과 속죄, 그리고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의 무게
〈더 리더〉는 유대인 수용자의 나치 감시원이던 ‘한나’와 소년 ‘마이클’의 사랑, 그리고 인간의 죄의식에 관한 작품이다. 2차 세계대전 후 한나는 전범 재판을 받는다. 문제는 이 영화의 다른 관점이다. 대부분 사회적 규범은 2차 세계대전의 유대인의 피해의 참상 혹은 독일 나치의 악행에 집중한다. 당연하다. 그만큼 나치의 만행이 극악무도했으며, 영화나 미디어는 그들의 만행을 조명하고 피해자들의 심정을 담아낼 필요가 있으니까.
그러나 이 영화는 유대인의 아픔을 조명하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나치나 가해자의 이야기를 하지도 않는다. 그냥 인간, 사람, 평범한 사람을 이야기한다. 나치나 유대인이라는 프레임이 아닌 그 안의 인간의 입장. 그래서 관객은 유대인 피해자의 관점이 되기도 하고, 안타까운 친구 청년 마이클의 입장이 되기도 하고, 모든 상황을 그냥 담담하게 이해하기로 한 중년 마이클의 관점이 되기도 한다.
관객은 마이클처럼 심리적 혼란도 일으킨다. 이미 관객은 유대인의 피해와 홀로코스트의 악행을 깊숙이 인지해 그에 대한 죄의 중함에 대해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영화는 인간 한나를 바라봄으로써 죄의 기저, 본질을 생각해보고 도대체 문제가 무엇인가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재판정에서 한나는 유대인들이 갇힌 교회당에 불이 났는데 왜 문을 열어주지 않았냐는 판사의 질문에 울부짖는다.
“그것은 감시원으로서의 임무를 저버리는 것이다. 나의 임무는 유대인을 감시하는 것이다.”
나치나 유대인의 학살의 도덕적 개념은 배제한 채 단지 자신의 일에 충실했다는 것이다. 맞다. 그녀는 그냥 시킨 대로 했을 뿐이다. 내 본연의 일에 충실했을 뿐이다. 악명 높은 홀로코스트처럼 유대인들을 혐오하지도 박해하지도 않았다. 다른 피의자들이 자신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창피함과 수치심에 문맹이라는 걸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하고 만다. 결국 한나는 재판정에서 중한 판결을 받는다.
자신의 행동을 객관적으로 사고하지 못하고, 자기 행동의 영향력은 생각하지 못하고 수동적 행동과 생각이 낳은 결과. 자신의 무지나 생각의 부재로 인한 파급효과(결과)는 사고하지 않은 채 단지 타인이 바라보는 자신의 프레임에서 갇혀서 사고한 결과. 무지는 생각의 폭을 프레임에 갇혀버리게 만든다. 영화는 이런 전개를 통해서 우리가 사는 공동체 사회에서는 무지가 모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을 향한 덫이 된다는 사실을 전한다.
한나의 사고하지 않는 순종적 행동이 자신을 향한 덫이 되는 장면을 현실에 비춰서 볼 수 있지 않을까? 현실 사회에서 우리는 흔히 ‘몰라서…’라는 말로 이따금씩 타인에게 잘못을 저지르고, 아무렇지 않게 넘겨주기를 바라며, 관용과 용서를 강요하고 종용한다. 이것이 얼마나 우리 삶의 태도에 있어 무책임한 언어일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결말에서 한나는 속죄의 과정과 글을 배우는 지식의 과정을 동일시함으로써 생각한다는 것은 사회에서 악이 될 가능성을 없애는 것이라고 넌지시 메시지를 전달해준다. 한편 마지막 나치의 피해자로 나오는 여인이 냉소적으로 한나 및 프랭크의 선의를 거부하는 장면은 영화가 최종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한나의 사후, 프랭크는 한나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그동안 한나가 모은 돈을 유대인 단체에 기부하는 게 어떠냐고 하지만 피해 여성은 면죄부를 주는 거라고 얘기하며 그의 제안과 부탁을 거절한다. 제아무리 피의자가 속죄를 하기 위해 몸부림쳐도 피해자는 그것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는 것 아닐까. 죄의 원인이 단순한 무지더라도, 또한 속죄하더라도 그 행위를 한 자체만으로도 용서받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아렌트가 발견한 ‘악의 평범성’
이번엔 아렌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한나 아렌트〉에 관해 얘기해보자. 영화는 유대인 학살의 주범 ‘아돌프 아이히만’이 패전 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외곽에 숨어 지내다가 1960년 5월 11일 이스라엘 비밀경찰에 체포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주인공 ‘한나 아렌트’는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열리는 아이히만 전범 재판에 《뉴요커》의 특파원으로 참석한다.
아렌트는 그곳에서 처음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아이히만이라는 인물이 지극히 평범하다는 것에 주목한다. 아렌트는 냉철한 시선으로 아이히만을 바라보면서 악행을 저지른 것은 분명하지만 법을 지켰을 뿐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자신의 지인들에게 피력한다. 하지만 주변 인물은 아렌트가 아이히만을 옹호한다며 나무란다.
이윽고 아렌트는 자신의 생각과 철학을 《뉴요커》에 기고하고, 냉철한 시선에 편집장을 비롯한 매거진의 수뇌부는 관점이 독창적이라며 찬사를 보낸다. 그러나 대중의 시선은 그를 냉정하게 보지 못하고 아렌트가 홀로코스트를 옹호한다고 무차별적으로 비난한다.
흥미로운 점은 아렌트가 그저 제삼자가 아닌 수용소 피해자였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아이히만을 피해자 혹은 피의자 프레임으로 이해하지 않고 단지 인간 본성의 기저를 향해 쫓는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행동 기저를 ‘악의 평범성’이라고 규정하며, 오히려 유대인 지도자들을 비판하는 시선까지 갖는다.
아렌트가 그토록 고집스럽게 주장한 ‘악의 평범성’이란 무엇인가? 악이란 뿔 달린 악마처럼 별스럽고 괴이한 존재가 아니다. 사랑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우리 가운데 있다. 파시즘의 광기로든 뭐든 우리에게 악을 행할 계기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멈추게 할 방법은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악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평범한 것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아렌트가 분석한 ‘인간이 갖는 악마의 습성’은 매우 무섭지만 보통 사람들인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하는 말이다. 우리가 생각한 아이히만도 절대악이 아니며 그도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악의 평범성’에 의하면 평범한 우리도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아렌트가 생각해낸 악행의 기저는 놀라우면서도 섬뜩한 것이다.
‘악의 평범성’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
그러나 이런 차가운 시선은 세상의 공분을 일으키고, 아렌트는 모든 비난을 감수한다. 대중의 시선은 어떤 문제의 본질보다는 겉의 형태를 보기 때문 아닐까, 냉정한 이성보다는 감정적 감성이 앞서기 때문이지 아닐까 추론해본다. 그녀가 피해자의 입장을 모르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녀도 피해자였으니까. 그러나 어떤 프레임을 통해 비치는 현상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전체주의적 생각일 것이다.
즉 나치 피해자의 관점에서는 악에 이분법 논리를 적용하고, 아이히만을 자신들과는 완전하게 반대에 선 절대악으로 규정짓고,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해야 내 피해 및 고통의 논리적 문법이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리나라의 경우,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관리와 순사들에게 ‘악의 평범성’ 논리를 적용하면 쉽게 납득할 수 있겠는가? 당사자에게 이런 순응은 절대 쉽지 않다.
이와 비슷한 사회적 현상이 최근 국내 영화시장에서도 일어났다. 바로 〈군함도 논란이 그렇지 않은가? 영화 속 일본의 악행보다 친일파의 악행이 더 드러나 굉장한 논란이 일었다. 관객이 예상하거나 기대한 장면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에 영화는 기대와 달리 흥행하지 못했으나 애초에 류승완 감독은 이분법적 구분을 벗어나고 싶었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개인적으로는 감독이 연출할 때부터 논란을 알았을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상업영화를 연출하면서 여러 프레임을 부여하는 작가주의적 연출은 배제했어야 하지 않나 싶다. 〈군함도〉가 〈인천상륙작전〉 같은 단순한 구조로 갔다면 흥행하지 않았을까.)
악의 평범성의 동기
‘악의 평범성’은 왜 발현되는가.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경우를 빌어서 평범한 인간이 악이 되는 트리거는 바로 인간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 이른바 ‘무사고(無思考)’에 있다고 했다. 무사고란 어떤 것일까? 알고 모름일까? 적어도 아렌트의 논리에 의하면 아니다. 아래 아렌트의 말을 보며 살펴보자.
생각이라는 바람을 표명하는 건 지식의 돛이 아니라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악함을 말할 능력, 사람들이 생각의 힘으로 예기치 않은 일이 닥칠 때 파국을 막는 거예요.
생각한다는 건 많이 알고 조금 알고의 문제가 아니다. 깨어 있는가, 옳고 나쁜 것을 구별할 수 있는가, 인간다움을 생각할 수 있는가. 지식의 두께가 아니라 이런 문제다. 우린 깨어 있어야 한다. 갇혀 있으면 안 된다. 아닌 건 아니라고 해야 한다. 옳은 건 옳다고 해야 한다.
물론 행동으로 옮기는 건 용기의 문제와 사회과학적인 문제가 결부될 수 있기 때문에 한발 더 나아가는 문제다. 그럼에도 최소한 구별할 수 있는 생각은 해야 한다. 앞서 얘기했던 ‘몰라서 그랬다’가 최고로 비겁한 변명이고, 용서받을 수 없는 말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
모르는 건 죄가 아니지만 생각하지 않는 건 죄가 된다. 배우지 않아서 생각하지 못한 것 또한 마찬가지다. 그래서 계속해서 생각해야 한다. 올바르게 생각하기 위해 알아야 한다.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현혹돼서 옳고 그름을 생각하지 못한다.
우리 자신은 당당할 수 있을까?
한나 아렌트의 철학으로 ‘악의 평범성’을 따라가 보았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에게 ‘악의 평범성’이란? 평범한 우리 자신이 이 문제에서 당당할 수 있을까? 솔직히 얘기해보자. 내가 아이히만의 상황이라면. 내가 일제 강점기 시절의 관료라면. 내가 민주화 시절 경찰 고위 간부라면.
자, 좀 더 현대적 상황에 적용해보자. 내가 기업의 부조리, 비자금 혹은 청탁을 주고받는 상황의 중심에 있는 기업체의 간부라면. 그것도 관조자가 아닌 수행 역할이라면. 학교 폭력이 이루어질 때 내가 주변인이라면. 투사처럼 거부하면서 아닌 것에 맞설 것인가, 아이히만처럼 그저 시키는 대로 했다면서 무죄를 주장할 것인가. 만약 당신이 이런 상황이라면 악이 된 아이히만을 무작정 비난할 수 있을까.
‘악의 평범성’은 애석하게 최근 우리 주변에서도 일어났다. 박근혜 국정농단 사건 때 일부 청와대 비서관이 그랬고, 세월호 사건 때 이준석 선장이 그랬다. 소설이나 영화, 먼 과거 역사 속 이야기가 아니다. 악은 멀리 있지 않다. 인간 자체의 속성이 악이 될 수 있는 존재다. 악이 되지 않으려면 노력해야 한다. 생각해야 한다. 흔히 생각하는 ‘진정 사람다움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생각해야 한다.
깨어 있어야 사회 속에서 사람같이 살아갈 수 있다. 그러지 않고 그냥 사는 대로 생각하면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 것이다. 생각하지 않으면 선도 사회적 외력에 의해 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절대선도 절대악도 없다는 진리에 이르면 나의 삶과 다른 이의 삶을 움직이는 방향타가 될 것이다. 촛불 혁명도, 최근의 #MeToo #WithYou 운동도 시민이 깨어 있었기에 일어난 운동이다.
용기 이전에 아닌 것을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고. 다시 말하지만 ‘악의 평범성’이 발생하는 이유는 생각하지 않아서다. 생각하지 않는 것, 사고하지 않는 것이 어떤 비극을 초래할지 항상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악은 보편적이라는 ‘악의 평범성’보다 ‘무사고’에 더 중요성을 두고 ‘무사고의 위험성’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영화 〈한나 아렌트〉 속 하이데거의 대사를 마지막으로 첨부하며 마무리하고자 한다.
생각이 행동할 힘을 부여하진 않아요. 우리가 사는 건 살아 있어서고, 우리가 생각하는 건 생각하는 존재여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