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부산의 한 임대아파트에 홀로 살던 70대 노인이 스스로 목을 매 숨졌다는 뉴스가 보도됐습니다. 이 노인은 자살을 택한 바로 그날 간암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에 입원할 예정이었다고 합니다.
그분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이유가 자식들이 떠안을 의료비 부담 때문이란 걸 보고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못난 아버지를 용서해라. 내가 수술하면 결국 너희들에게 부담이다”라는 유서를 남길 심정이 어땠을까 생각하니 그저 답답할 따름입니다.
우리나라는 비록 전국민 건강보험제도를 운영하고 있지만 보장성이 취약해 암과 같은 큰 병이라도 걸리면 막대한 의료비 부담을 떠안게 됩니다. 하루벌어 먹고 살기도 힘든 저소득층이나 변변한 수입이 없는 노인과 장애인에게 이런 의료비는 재난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가계소득 대비 10~30%의 비중을 차지하는 ‘재난적 의료비’로 인한 부담을 떠안고 있는 가구 수가 280만가구(2011년 기준)에 달한다고 합니다.
또 14만 가구는 의료비 지출 때문에 살던 전세를 축소하거나 재산을 처분했고, 15만 가구는 은행 대출이나 사채로 의료비를 마련했다는 조사결과도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대선에서 이런 재난적 의료비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4대 중증질환 100% 국가보장’이라는 공약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이 약속이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6월 발표한 4대 중증질환 보장성 강화 계획을 통해 오는 2017년까지 단계적으로 4대 중증질환 치료에 필요한 모든 의료서비스를 건강보험 혜택 안에 넣겠다고 했지요. 그러나 정작 환자들이 큰 부담을 느끼는 선택진료비와 상급병실료, 간병비 등 3대 비급여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대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박 대통령은 농어촌 지역의 공공보건의료 인프라를 확충하고 지역거점 공공병원을 활성화하겠다고 공약했지만 이를 어기고 있습니다. 오히려 지역거점 공공병원 폐업을 방치하거나 공공의료 지원 예산을 축소하고 있지 않습니까.
새누리당 전 대표였던 홍준표 경남도지사가 적자와 강성노조를 이유로 진주의료원 폐업을 밀어붙이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지난 2월 경남도가 진주의료원 폐업을 발표할 당시 입원환자 203명이 쫓겨나다시피 퇴원하거나 다른 병원으로 옮겨갔었죠.올 10월 8일 현재까지 그렇게 진주의료원을 떠난 환자 중 36명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국회에 따르면 내년도 보건복지부 예산 중에서 공공의료 관련 예산이 올해보다 300억원 넘게 축소됐다고 합니다. 농어촌 등 의료취약지역의 응급의료서비스 지원에 사용하는 예산도 30억원이나 감액됐다고 하네요. 특히 이 예산은 의료취약지역에 위치한 응급의료기관이 의사인력을 확보하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인건비 지원으로 사용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드는 예산이 축소되면서 의료취약지 응급의료기관이 의료인력을 유지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이것이 ‘약속을 지키는 민생대통령’의 모습은 아니지 않습니까. 더 기가 막힌 건 이런 의료취약지 주민들을 위해 원격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정부의 발상입니다. 누가봐도 뻔히 관련 산업체에 새로운 시장을 열어주기 위한 의도를 간파할 수 있는데 정부는 끝까지 국민편의 증진과 국민건강 향상을 위해 추진하는 것이라고 우깁니다.게다가 정부는 의료접근성 떨어지는 원격의료 대상자가 400만명이 넘을 것으로 추계하고 있습니다. 의료취약지에 방치된 국민이 이렇게 많은데도 불구하고 정부는 왜 공공의료 확충을 하지 않았는지 따져묻고 싶습니다.
최근에 정부가 발표한 보건의료분야의 투자활성화 대책이란 거 더 우려스럽습니다. 정부는 의료법인 병원들이 기업으로부터 외부자본을 투자받아 합작투자 방식으로 여행사나 외국인 환자 유치, 장례식장 등의 부대사업만 전담해서 운영하는 자회사를 설립할 수 있도록 허용하겠다고 했습니다. 일반 국민들은 물론 전문가인 의사들도 이렇게 되면 사실상 의료법인 병원이 외부자본을 끌어들여 수익사업을 할 수 있게끔 허용하는 영리의료법인 도입의 전단계라고 잔뜩 걱정합니다.
그러나 대통령께서는 이런 투자활성화대책을 보고받는 자리에서 “우리가 얼마든지 공공성을 잘 지키면서도 일자리도 창출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되면 다른 나라는 발전하는데 우리나라는 가만히 있다면 나중에 굉장히 가슴을 칠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셨더군요.
어쩌면 나중에 많은 국민들이 그때 왜 그런 정책을 막지 못했을까 가슴을 치며 후회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병원이 경영을 개선하기 위해 외부의 투자를 받아 수익사업을 벌이는데 어떻게 의료공공성을 해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지금 병원들이 어려운건 적정하지 못한 건강보험 수가와 왜곡된 의료공급체계 때문입니다. 정부가 마련한 투자활성화 대책은 이런 문제를 더 악화시킬 것만 같습니다.
정말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을 정부 말만 믿고 내버려둬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정부는 의료 영리화를 추진할 생각이 없다”는 청와대 관계자의 말을 온전히 믿고 내버려둬야 하는지 확신이 서질 않습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진주의료원에서 쫓겨난 입원환자들께, 내년부터 가까운 응급의료기관이 사라질지도 모른 농어촌 주민들께, 분만을 위해 다른 지역으로 불편한 몸을 이끌고 원정출산을 가야하는 산모들께, 병원비 걱정 때문에 치료를 포기하거나 대출을 받고 사채를 빌린 수십, 수백만 명의 그분들께.
“안녕하시냐고요. 별 탈 없이 살고 계시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