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주요 포털 사이트마다 ‘의료민영화’가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다.
느닷없는 일이었다. 지난 15일 여의도에서 열렸던 전국의사궐기대회의 영향 때문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2만여명의 의사들이 매서운 칼바람이 부는 여의도 공원에 모였다. 그날 여의도 공원 주변에는 의사들을 태우고 온 관광버스가 병풍처럼 둘러쳐 있었다.
현재 우리나라 활동 의사 수는 8만여명이다. 전체 활동 의사 가운데 약 1/4이 여의도 공원에 모인 셈이다. 놀라운 일이다.
여의도 의사집회 현장에는 민중가요 ‘동지가’가 울려 퍼졌다. 의사집단과 갈등을 빚던 전국보건의료노조 위원장이 참석해 연대사를 했다.
집회에 참석한 의사들은 ▲의료악법 철폐 ▲영리병원 허용 반대 ▲최선의 진료 가로막는 원격의료 철회 ▲국민불편 야기하는 의약분업 폐지를 외쳤다.
의사협회 노환규 회장은 연설 도중 미리 준비해온 칼을 자신의 목에 들이대며 의료계의 눈앞에 닥친 위협을 온몸으로 보여줬다. 그는 목에 상처를 입었다. 일부 의사는 삭발을 했다.
여의도 의사집회에 관한 기사가 쏟아지면서 ‘의료민영화’가 실검 1위에 올랐다. 사실 이날 집회에 참석한 의사들이 원했던 키워드는 ‘여의도 의사집회’였지만 네티즌의 선택은 ‘의료민영화’였다.
대체 의료민영화가 뭐길래 의사들마저 머리띠 두르고 나서게 만들었을까.
엄밀히 말해 의료민영화는 틀린 표현이다. 민영화는 국가에서 운영하던 공공기관을 민간기업에 매각하고 경영을 맡긴다는 의미다. 이런 의미에 충실하려면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공공병원을 민간에 매각하려는 시도가 있었어야 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나라는 민영화할 공공병원이 별로 없다. 현재 국내 의료기관 중 약 95%가 민간 자본으로 설립·운영되는 민간병원이다. 정부와 지자체가 세운 공공병원은 고작 5~6%에 불과하다. 공공병원 비율과 국민의료비에서 차지하는 정부 부담만 따져보면 민간의료보험과 영리병원이 활성화된 미국보다 오히려 더 ‘민영화’된 구조다.
사정이 이런데 아무리 양심없는 정부라도 쉽사리 공공병원을 민간에 매각하는 일따위 하기 힘들다. 그러나 이 정부 들어 상식밖의 일이 벌어지긴 했다. 진주의료원 같은 지역거점 공공병원 폐업을 방치한 것도 모자라 일부 지방의료원은 경영실적 부진과 적자를 이유로 구조조정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저런 상황을 따져볼 때 지금 제기되고 있는 의료민영화 우려는 실질적으로 ‘병원영리화’로 표현하는 게 맞다. 정부에서 발표하는 정책의 핵심은 병원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게끔 해주겠다는 거다.
최근 정부가 발표한 보건의료분야 투자활성화대책을 보면 의료법인이 외부자본을 조달해 의료 연관 기업과의 합작투자 방식으로 부대사업 목적의 자법인을 설립하는 방안이 허용된다.
의료법인의 부대사업 범위도 여행·외국인 환자 유치·의약품 개발·화장품·온천·목욕·체육시설 등으로 대폭 확대하고, 의료법인간 인수합병을 허용하는 내용도 담겨있다.
이번 투자활성화대책의 핵심은 의료법인 병원이 외부 자본을 투자받아 진료 외 다른 부대사업만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영리형 자회사를 설립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데 있다.
이미 학교법인 산하 대학병원은 이런 식의 자회사 운영이 가능하다. 서울대병원과 세브란스병원같은 대학병원은 기업체와 합작투자 방식으로 헬스케어서비스 등을 제공하는 자회사를 두고 있다. 학교법인 부속병원에 외에 의료법인 병원에도 이를 허용하겠다는 말이다.
지난해 8월 기준으로 국내 의료법인 병원은 1,129개에 달한다. 이렇게 많은 의료법인 병원이 외부 자본을 유치해 영리형 자회사를 설립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런 식의 규제완화는 간접적인 영리의료법인, 즉 영리병원 허용이나 마찬가지다. 의료법인 병원으로 직접 외부 자본이 유입되는 것은 아니지만 자회사를 통해 외부자본을 유치하는 길이 열린다면 그 과정에서 얼마든지 편법이 동원될 수 있다.
가뜩이나 환자 진료 수익만으로 경영이 버거운 의료법인 병원들이 영리형 자회사를 통해 각종 부대사업에 목을 맨다면 환자들을 상대로 어떤 돈벌이를 하게될지 아무도 모른다.
외부자본의 유입은 규모의 경쟁력을 갖춘 대형병원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경영난을 겪고 있는 중소병의원은 문을 닫거나 인수합병의 대상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외부자본 투자를 받은 병원은 더 많은 수익창출에 목을 맬 것이고, 의료체계는 대형병원 중심의 독점공급 형태로 구조조정이 될 가능성이 높다. 환자들의 의료접근성은 떨어지고 비용부담은 늘어난다.
여기에 의사-환자간 원격의료가 허용되면 원격의료 서비스만을 전문적으로 제공하는 전문병원이 등장할 것은 자명하다. 정부는 대면진료를 원칙으로 원격의료 서비스만을 제공하는 의료기관 설립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대면진료 시늉만 내고 원격의료가 본업인 의료기관이 설립될 여지는 충분하다.
의사들이 우려하는 건 바로 이런 상황이다. 현재 건강보험 급여 혜택이 적용되는 의료행위 수가가 실제 원가(병원 시설과 의료장비 운영, 의료진 등 인건비를 반영한 원가)의 70% 수준에 불과하다. 이런 구조 때문에 각종 비급여 진료서비스가 동원되고, 최대한 많은 환자를 짧은 시간에 진료하는 ‘박리다매’의 비정상적인 진료행태를 보이고 있다.
만일 의료법인 병원이 영리형 자회사를 운영하고, 원격의료 전문센터가 등장하면 가뜩이나 왜곡된 의료서비스 공급체계가 더욱 엉망이 될 게 뻔하다. 자본이나 규모 면에서 경쟁력이 떨어지는 동네의원은 몰락할 가능성이 높다. 지리적 접근성이 좋은 동네의원의 붕괴는 곧 국민들의 의료이용 불편을 초래한다.
의료법인간 인수합병이 시작되면 필연적으로 의료인력의 구조조정을 부른다. 병원의 인건비 절감 압력이 더 커질거고, 의사나 간호사의 일자리 질은 떨어진다. 의료서비스의 질 하락을 예상하기에 충분하다.
100여년 전 포드 자동차 노동자들이 컨베이어벨트를 도입한 대량양산 시스템에 떠밀려 생산과정으로부터 소외됐듯이 의료인들 역시 의료행위의 주체가 아닌 주변인으로 내몰릴 가능성이 농후하다.
자본은 탐욕스럽다. 자회사에 투자하는 것으로 성에 차지 않는다. 의료법인에 직접 투자를 욕심낼테고, 정부는 또 의료산업 활성화를 위해 더 많은 규제완화가 필요하다는 논리를 들이대며 새로운 투자활성화 대책을 꺼낼게 분명하다. ‘민영화의 낙인’이라고 정부가 되레 어깃장을 놓지만 틀렸다. 공공의료 확충을 위한 노력이 선행된 적 없기 때문이다.
지난 15일 여의도로 수많은 의사들이 모인건 정부의 병원영리화 정책이 불러온 디스토피아를 예측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물론 환자들에게도 악몽이다. 어쩌면 다시 ‘밤새 안녕’을 묻는 시절이 될지도 모른다.
– 라포르시안 김상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