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는 한 사람의 의견이 곧 그 사람의 인격이 되는 사회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누군가 내 말에 동의하지 않거나 반박을 하면, 그냥 ‘나랑 의견이 다르구나. 재밌네, 이야기 한 번 해봐야겠네.’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저 xx가 나랑 한 판 붙자는 건가?’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현상의 원인을 가부장제 사회에서 찾는다.
가정에서는 부모, 학교에서는 선생, 교회에서는 목사, 나라에서는 대통령 등 가부장제하의 사회에서 ‘아버지의 지위’를 가지는 사람은 절대 틀리지 않는다. 그들은 항상 옳고, 실수조차도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하는 말에 의문을 품는 행위는 그 ‘권위에 대한 반항’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이 ‘명쾌한’ 질문을 통해 그 권위는 ‘아름답게’ 꽃 피운다.
너 몇 살이야?
이런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은 상하관계에서뿐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에도 자연스레 영향을 미친다. 자신의 입을 틀어막는 ‘아버지들’ 아래 자란, 그리고 ‘의견에 반대하는 것은 그 사람에 대드는 것’이라고 배운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의견에 자신의 의견을 더하려고 함부로 시도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의견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도 굉장히 치욕적으로 느낀다. 나의 권위에 도전한 것처럼 느끼기 때문이다.
‘동의하지 않음’이 곧 당신에 대한 공격은 아니다
바쁘게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방대한 정보를 하나하나 살펴보기가 너무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제한된 정보 속에서 판단한다. 하지만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정보가 진리인 양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SNS에서 엄청난 ‘내공을 가진’ 사람들이 “경제를 공부하면 다 알 수 있다.” 혹은 “경제 좀 공부하고 와라.”고 말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도대체 ‘너무나 복잡해서 쉽게 일반화할 수 없는 사회 현상을 현실 세계와 괴리된 수많은 가정으로 단순화하는’ 근대 학문을 책 몇 권 읽고 어떻게 ‘다 안다’고 말할 수 있는지 도저히 모르겠다. 정치인에 대한 선거, 회사 내 의사결정 등 그 무엇도 완벽하게 알고 판단을 내리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틀릴 수 있다. 우리는 ‘너도나도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 지점에서 대화가 시작된다. 그와 함께 우리가 나누는 대화가 ‘서로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는 행위가 아니라, 더 나은 공통의 이익 혹은 결과를 위해 나아간다’는 믿음도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서로 제한된 지식을 바탕으로 서로에게 상처 주기 밖에 되지 않는다. 이건 너무나 큰 시간 낭비다. 믿음을 바탕으로 한 대화를 통해서 잘못된 지식을 고치고, 더 나은 선택을 하게 된다. 그렇게 다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최근에 부인님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부인님은 유럽계 회사의 상해 지사에서 아시아 태평양 지역 신제품 출시 업무를 담당한다(중국 지역 마케팅팀은 오피스를 함께 쓰지만 업무는 나뉜다고 한다). 같이 일하는 팀원들도 모두 다른 배경에 국적도 다르다. 그리고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과 미팅을 할 기회가 많은데, 한국 사람들과 미팅을 하고 나면 ‘왜 이렇게 상해팀 사람들은 이렇게 공격적(Aggressive)이냐?’라고 묻는단다.
매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다 보니 익숙해져서 몰랐는데, 그 질문을 받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회의 중에 끊임없이 질문하고 의견을 교환하는 게 한국 사람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문화라는 걸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함께 일하는 상사는 한국팀에 ‘질문도 안 하고, 너무 소극적이다’라고 피드백했다고 한다. 한국팀이 준비해 온 자료에 질문하고 피드백한 것은 그 내용에 대한 이해를 위한 것이지, 한국팀이 밉다는 의미가 아니었을 텐데, 한국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질문과 이견에 쉽게 공격적이라고 느끼곤 한다.
느슨하게 쥔 강한 의사 표현
‘느슨하게 쥔 강한 의사 표현(strong opinions, weakly held)'(원래 표현을 기억하지 못해서 고통받았는데 Noelle 님께서 찾는 걸 도와주셨습니다)이란 무엇인가? 간단하게 말하면 한 사안에 대해서 강하게 자신의 주장을 이야기하되, 자신의 의견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으면 언제든지 자신의 주장을 바꿀 수 있는 태도를 말한다.
우선 왜 사안마다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표현해야 하는가. 한 사안에 자신의 주장을 하지 않으면 책임감이 낮아진다. 그러면 그 선택이 안 좋은 결과로 나타났을 때 입 밖으로 꺼내진 않더라도 ‘그러게 내가 하지 말자고 했잖아.’라고 생각하기 쉽다. 물론 내 주장이 최종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승복할 수 있도록 충분한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는 건 필수적이겠다.
이해하기 쉽게 하나 가정을 해보자. 내가 부인과 함께 상해에 온 것을 후회하고 ‘그러게 내가 중국 오지 말자고 했잖아.’라고 생각하거나 말한다면? 함께 논의하고 결정한 내용을 저렇게 말하는 건 정말 책임감이 없는 일이다. 정말 상해에 오기 싫었다면 무슨 수를 써도 가기 싫다고 의사를 분명히 밝히고 그걸 막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별 말 없이 함께 상해에 왔다면 그건 내가 상해에 가자고 강하게 주장하지 않았더라도 결국 우리 부부인 동시에 내 결정이고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서도 그 의견을 ‘가볍게 쥐고’ 있는 것도 중요하다. 즉 언제든 ‘내가 틀릴 수 있다’라고 생각해야 된다. ‘왜 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가?’ 이 질문에 집중해야 한다. 내가 한 번 내뱉은 말을 지키기 위해 아무 의미 없는 주장을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하는 말이 정말 조직을 위한 것인가? 더 나은 결과로 이끌어주는가?
너무나 진부한 ‘건설적인 토론’을 위하여
넷플릭스는 ‘질문하지 않거나’ ‘시키는 대로만 하는’ 사람을 해고하기로 유명하다(정확히는 한 임원이 새로 오면서 기존의 직원들을 이 이유로 대량해고했다고 전해진다). 일이 잘못되면 “그거 제가 정한 거 아닌데요?”라는 말을 할 테니까. 그래서 오늘도 수많은 면접관은 ‘왜 전 회사에서 퇴사했어요?’라는 질문을 그렇게도 하나 보다. 지원자가 전 회사에 불평불만을 털어놓는 순간을 기다리겠지. 그리고 그 문제의 책임에서 나를 떼어놓는 무책임함을 발견하고, 그 지원자의 이름 위에 사선을 긋겠지.
아무 질문도 안 하고 하나하나 시켜야만 하는 사람이나 남의 말은 듣지도 않고 자기 이야기만 하는 사람은 상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그게 직장 동료나 상사라면 더할 나위 없다. 너무나 진부하지만 ‘건설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싶다. 배우기만 하거나, 가르치기만 하는 그런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함께 하는 시간을 통해서 서로 배우고 성장하는 그런 관계 말이다. 강한 자기 의견을 느슨하게 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다.
원문: 마르코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