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나만 믿는다
나는 ‘요즘의 청년 세대’ 치고도 꽤 심한 길치다. 심지어 20년을 살았던 내 고향, 김해에서도 길을 헤매는 바람에 여자 친구는 스스로 나의 내비게이터를 자처하게 되었다. 무려 6, 7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된 거지만 여자 친구도 날 만나기 전엔 스스로를 길치라 여겼단다. 때로는 극약이 최고의 치료제이기도 한 걸까. 아무튼, 이런 나의 길치 성향은 철저히 유전자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엄마는 심각한 방향치라 어디 건물에 들어갔다 나오기만 하면 잠깐, 뇌 회로가 정지되고 동공이 확장되며 두 발은 제자리에서 방황하신다. 작고 동그란 체형 때문에 마치 렉 걸린 16비트 게임 캐릭터처럼 보여 귀여우시기도 하지만, 때론 ‘이 험한 세상, 어찌 살아오셨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엄마가 근거리, 골목적 방향치라면, 아버지는 원거리, 거시적 길치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차량으로 이동하실 때 그 진가가 발휘되는데, 나는 어려서 기억나지 않을 과거에 김해에서 울산까지 5시간이 걸리셨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우리 아버지의 차에는 아직도, 여전히, 내비게이션 같은 건 없다. 시끄럽고, 못 미더우시다나… 우리 아버지의 이런 성향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딱 이거다.
‘난, 나만 믿는다.’
복잡한 쇼핑의 길에서, 지도를 찾다
길치 이야기는 웃자고 한 소리지만, 사실 요즘은 ‘쇼핑 길치’가 난무하는 시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단순한 품목이라도 쇼핑의 방법, 가격의 편차, 제품의 종류가 어마어마하게 다양해졌다. 원래 길치라는 것도 길이 복잡할수록 그 능력(?)이 강해지는 법. 이 세상의 라면이 단 한 종류뿐이고, 그 라면을 판매하는 곳도 한 곳뿐이라면 현명한 소비자가 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무수히 많은 종류의 라면의 맛과 영양, 제조회사, 가격을 비교해야 한다. 누가? 소비자가!
물론 소비자에게 모든 책임과 역할을 전가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대한민국 거의 모든 곳에 대한 지도가 존재하는 것처럼, 특정 제품을 현명하게 구입하기 위한 ‘쇼핑 지도’도 있다. 당장 주요 검색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런닝화’ 라고만 검색해봐도 그 지도를 확인할 수 있다. 브랜드, 색상, 가격, 사이즈 별로 필터링도 가능하니 원하던 제품의 이미지가 추상적이었다 하더라도 꽤 빠르고 편하게 원하는 쇼핑 목적지로 향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유명 연예인이 광고하고 있다거나, 해외에서 히트 친 브랜드라는 정보도 소비자들에게 중요한 이정표 역할을 한다. 적어도 이 시대의 쇼핑 여행자들은, 우리 아버지처럼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쇼핑 지도, 쇼핑 네이게이션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쇼핑 지도, 주민들의 이바구에 귀 기울이다.
그런데, 이 소비자들도, 그런 쇼핑 지도를 무작정 믿지는 않는가 보다. 일반적으로 브랜드, 즉 공급자의 입장에선 ‘브랜드를 알리는 것’이 최우선이다. 그러다 보니 자극적인 홍보 마케팅이나 유명 연예인, 공인·검증된 사실 등을 전면에 앞세운다. 여기까지는 소비자들에게도 잘 먹혀들어 가는 것 같다. 일단 소비자의 한 사람인 나도, 그런 브랜드나 제품이 한 번이라도 더 눈이 가고, 입어보고, 먹어보고 싶은 마음이 드니까. 하지만 소비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높은 인지도가 높은 만족감’을 보장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국내 최대 126만 명의 소비자 패널을 보유하고 있는 리서치 기관인 마크로밀 엠브레인의 2017년 조사결과에 따르면, ‘연예인 브랜드 제품에 대한 태도’ 에 대해 ‘구입할 의향이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27.3%에 그쳤고, ‘국내에 진출한 해외 맛집의 인기가 오래 갈 것 같다’ 는 내용에 ‘동의’ 한 비율 또한 28%밖에 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쇼핑 지도’에서 확인했던 정보에 대한 (유명 연예인, 미슐랭 가이드 평가, 브랜드 네임) 호기심 때문에 한 번 이용하는 경우는 있지만, 그 정보만큼의 만족도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아 보였다.
그래서일까? 실제로 소비자들이 어떤 제품을 구입할 때 가장 선호하고 신뢰하는 정보가 ‘공인된 전문가들의 평가’가 아니라 ‘제품 리뷰’라는 설문 조사 결과가 나왔다. 실제로 동 기관의 조사에서 ‘나는 제품 구매 시 항상 리뷰를 확인한다.’ 는 조사에서는 무려 78.6% 비율의 응답자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또한 설문 조사에 응한 소비자들은 리뷰의 내용에 따라 제품 구입 여부를 결정하는 경우가 절반 이상이었고, 게다가 몇몇 소비자들은 진짜 리뷰와 가짜 리뷰를 구별할 수 있는 ‘혜안’을 갖고 있다고 답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소비자들은 쇼핑 지도를 보면서도, 그 동네에 살아보지도 않은 지리 전문가의 말보다는 그 동네 주민의 이바구에 더 귀를 기울인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나는 나만 믿는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핵심이 남아있다. 소비자들이 쇼핑 지도를 찾고, 그중에서도 제품 리뷰에 더 귀를 기울인다는 사실을 액면 그대로만 이해하면 공급자는 ‘리뷰’ 에 방점을 찍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모든 여정의 중심에 ‘소비자 자신’ 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애초에 공인·검증된 전문가의 의견을 제쳐두고 제품 리뷰를 찾아보게 된 기저에는 ‘전문가에 대한 낮은 신뢰도’ 가 깔려 있다.
그러니까 소비자들의 행동 양식을 도식화하면
- 전문가 말을 믿는다
- 뒤통수를 맞는다
- 실제로 제품을 사용한 리뷰를 믿는다
- 그중에서도 가짜 리뷰는 걸러낸다
정도가 되는데, 그 시작이 ‘불신’ 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도식이 여기서 끝날 리가 없다는 것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도식의 끝은 결국, 다시, 소비자 자신. 즉, ‘나의 판단’ 으로 끝난다. 심지어 전문가가 제공하는 정보라도 그 정보를 ‘비전문가’인 내가 다시 확인한다는 소비자 응답 비율이 60%를 넘는다. 소비자들은 더 이상 주어진 정보에만 ‘의존’ 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닌 것이다.
이런 소비자들의 소비 양식은 점점 더 영민해질 것이다. 경험이 축적되니까. 아무리 뛰어난 내비게이션을 달고 있어도, 우리 동네 길은 내가 더 잘 안다(혹은 그렇다는 믿음을 잃지 않는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직접 다녀보고 걸어보고 살아봤으니까. 쇼핑도 다르지 않다. 몇 번 사보면, 쇼핑 지도에는 미처 기록되지 못한 갖가지 팁과 유용한 정보들을 습득하게 된다. 그 중 호의적인 몇몇은 그런 팁과 정보들을 리뷰에 남길 것이고, 또 다른 소비자들은 그것을 공유한다.
그러므로, 소비자들은 결국, 다시, ‘나는 나만 믿는다’로 회귀한다. 알아서 잘 하는 소비자들은 별로 걱정되지 않는다. 다만 공급자들은 한 가지만 새겨들으면 된다. 더 이상, 좋은 품질과 디자인, 합리적인 가격 같은 내실 없이 유명 연예인이나 전문가의 정보만으로는 브랜드를 유지할 수는 없다는 거다. 소비자들은 ‘진실의 입’을 갖고 있다.
함부로 장난치다가, 그 진실의 입에 손이 물릴 수도 있다.
원문: 8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