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당은 공화당과 민주당으로 양분되어 있다. 대략 40%대를 오가지만 유권자 중 약 30~35%는 공화당의 골수 지지층이다. 여기도 콘크리트 지지층이 존재한다. 백인 남성, 저학력 및 저소득층, 블루칼라노동자, 기독교근본주의자들이 콘크리트 층을 구성한다. 이 콘크리트가 바로 트럼프의 변함없는 지지자들이다.
1. 강자에게 약한 트럼프의 지지자들
미국은 OECD 국가 가운데 소득이 매우 불평등하게 분배되며 복지제도가 가장 허술한 국가집단에 속한다. 전형적인 ‘자유시장 체제’(liberal market)다. 트럼프의 지지자들은 자유시장 체제를 신적 대상으로 숭배한다. 따라서 그들은 현대 미국의 경제 체제와 소득 분배 방식을 수호하고자 한다.
자유시장에서는 강한 자에게 자유가 주어지고 약한 자에게는 구속이 가해진다. 자본주의 세계에서 자유는 강자의 전유물이다. 공화당 지지자들은 강자들을 존경하고 약자들을 조롱하는 국가를 선호한다. 강한 자는 정의롭고 선하다! 경제적으로 가장 약하고 사회적 지위가 가장 낮은 저학력, 저소득층이 강자의 편이 되어 있는 건 아이러니하다.
2. 기독교근본주의자
이처럼 약자들이 강자를 숭배하는 건 아이러니하게 생각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각 사람은 권세 있는 자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로마서 13:1)’는 기독교근본주의신앙의 포로가 된 이들에게 미국식 ‘약육강식’ 자본주의는 전혀 ‘악’이 아니다. 나는 기독교가 약육강식의 종교라기보다 헐벗고 굶주리며, 갇히고 핍박받는 사람들을 위해 강자와 싸우는 종교라고 생각해왔다. 이들이 진정한 기독교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3. 후안무치한 보호무역주의자
자유시장의 신봉자로 자처하지만 그들이 ‘자유시장’의 지지자라고 말하기엔 좀 거시기하다. 진짜 자유시장 행위자는 국경을 초월해야 한다. 국내시장을 자유화한 만큼 국제시장도 자유화해야 한다. 곧 자유화한 국내시장을 외국에도 개방해야 한다. 자유는 만민에게 부여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트럼프의 지지자들은 그렇지 않다. 자유시장은 미국국경 안으로 제한된다. 무역장벽은 높아지고 외국인노동자는 추방되는 것이 트럼프와 그들의 자유시장이다. 공화당의 콘크리트, 곧 트럼프의 지지자는 자유시장이 아닌 것을 자유시장으로 오해하는 지적 미성숙자들이다.
트럼프와 공화당 콘크리트의 자유시장은 사실 보호무역주의에 기반 둔 ‘보호시장’이다. 본래 보호무역주의는 영국의 자유무역주의의 보편성을 부정하면서 19세기에 등장한 독일의 경제학이론이다. 당시 영국은 ‘세계의 공장’으로 세계무역을 지배하던 강국이었다. 반면 독일은 산업화의 걸음마를 뗀 약소국이었다.
보호무역이론은 약소국의 이론이다. 약소국의 보호무역은 도덕적으로뿐 아니라 경제학적으로 용인됨을 넘어 장려된다. 왜 그런가? 단지 약하기 때문이다! 있는 놈이 더한다고 강자가 보호무역을 도입하면 욕을 듣게 마련이다. 트럼프의 지지자들은 후안무치하다.
5. 비겁한 약자들
트럼프의 지지자들은 비겁하기도 하다. 무슨 말인가? 미국이 아무리 어렵다고 하지만 누가 뭐래도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에 속한다. 2017년 총국내생산(GDP 명목 기준)은 19조 3,621억 달러로 세계 1위에 속한다. 1인당 GDP도 5만 9,495$로 세계 7위다.
우리나라보다 잘 사는 것은 물론이고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 트럼프 지지자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유는 미국이 현재 못 살아서가 아니다. 부유하지만 그 부가 몇몇 사람에게 불평등하게 몰려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지지자들의 삶은 ‘소득재분배’를 통해 충분히 개선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그런 주장을 할 정도로 용감하지 못하다.
기독교근본주의자와 함께 겸손과 순종, 그리고 체념의 지혜를 체득해 강자에게 약하게 된 이들이 강자들에게 이런 요구를 할 리가 없다. 자기를 포기해버리고 고통을 내부화하는 지질한 자들이다. 루신이 『아큐정전』에서 그토록 조롱해 마지않던 ‘아큐’들이다. 그들이 살아갈 유일한 방법은 ‘정신승리법’이다.
6. 지질하고 비겁한 자들의 화신, 트럼프
하지만 정신으로 버티기에는 한계가 있다. 미국의 부자들도 이를 잘 안다. 그렇다고 부자들이 자신의 것을 떼어내 줄 리가 없다. 하물며 이 겸손하고 순종적인 기독교근본주의 저소득층들이 더 달라고 보채지도 않는데 말이다.
이 나약하고 지질한 자들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결국 트럼프가 발 벗고 나섰다. 지질한 자들의 뜻대로 미국 부자들의 부에 손대지 않고 이들의 처지를 개선하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 가장 주변부에 처한 외국인노동자들의 몫을 가로채 이 겸손하고 지질한 자들에게 ‘분배’하는 것이다.
투쟁을 포기하고 자유시장을 자국 강자들에게 헌납한 후 밀려드는 공허와 빈곤의 고통을 최약자인 외국인노동자들에게 떠밀다 못해 그 몫으로 벌초해간 것이다. ‘왕따 폭탄 돌리기’는 지질하고 비겁한 룸펜들의 ‘생존발명품’이다. 공화당 콘크리트들은 트럼프에 열광했다. 지질할 뿐 아니라 비겁한 자들이다.
7. 평화와 통일
요즘 심각한 혼란에 빠져 있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북미 간 대화 분위기가 조성된다. 가깝게는 평화를 위해, 멀리는 통일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군대도 안 가보고 자식들 군 면제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유당 정치인과 엘리트들은 전쟁이 일어나도 상관이 없겠지만 나는 사정이 다르다. 잘못하면 하나밖에 없는 아들마저 예비군으로 소집되어 전쟁이 희생양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 같은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닐 것이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을 혐오하는 평화주의자다. 따라서 나로선 이런 분위기가 참 반갑다. 요즘 통일에 부정적인 사람이 많지만 단기적인 관점에서 나도 비슷한 생각이다. 남북한 격차를 고려해 볼 때 즉각적인 통일은 엄청난 혼란을 유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혼란비용’을 과대평가하는 사람들은 ‘분단비용’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단기적 시각으로 판단할 때도 분단되어 있음으로써 현재 지불하는 엄청난 비용을 고려해 반대의견을 제시하라는 말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나는 통일이 대단히 필요하다고 본다. 정치적으로는 나라가 커야 방어는 물론 협상력도 커지며, 경제적으로 볼 때 시장이 커지고 성장의 기회도 많아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여러 가지 이유로 이런 대화 분위기를 매우 반갑게 맞이하고 싶다.
8. 이방카, 김여정, 홍준표 그리고 문재인
그런데 대화 당사자들의 면면이 매우 특이하다. 현재 미국은 공화당 콘크리트의 이념에 의해 지도된다. 트럼프는 무지하고 지질하며 비겁한 이념의 화신이다. 그러니 말과 행동이 거칠고 교양이 없다. 지지자들은 이런 언행에 열광한다. 무슨 짓이라도 할 것 같다. 불안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다. 막가는 건 예사다.
내가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막가파 행동은 트럼프의 딸 이방카가 백악관 보좌관이 되어 한국 정상과 만나 그 중대한 문제를 의논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라면 과연 이런 게 통할까? 대통령 딸이 아무리 똑똑하더라도 그러지는 못할 것이다. 권력의 사유화와 집중!
그런데 대화 대상자인 북한도 이에 뒤지지 않는다.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이 특사로 파견되었다. 내 이성으로 판단하기를 예전부터 포기해버린 북한이라지만 정말 어이가 없다. 남들 눈 정도는 의식할 만도 한데, 아랑곳없다. 둘 다 ‘막하막하’(!)다.
이런 정신 나간 두목들의 ‘친인척 애송이’들을 상대해야 하는 문재인 대통령을 보고 있으면 신기하다 못해 존경스럽다. 나라면 똑바로 세워놓고 한 마디 훈계한 후 쫓아냈을 것이다. 평화를 얻어내기 위해 인내하고 희생해야 할 게 참 많구나.
그런 자들이 우리 안에도 발견된다. 자유당 홍준표와 김성태는 몰론이고 유승민까지 이들에 가세한다. 안팎으로 후안무치 얼굴을 내민 무식하고 지질하며 비겁한 자들에 둘러싸인 문재인 대통령이 품격을 유지하며 평화와 통일의 기틀을 마련하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문통은 끝까지 품격을 잃으면 안 된다. 문재인은 촛불의 화신이기 때문이다. 촛불 시민의 품격은 트럼프와 김정은, 그리고 홍준표 지지자들과 그 높이와 결이 다르다. 그리고 촛불 시민의 수는 트럼프 콘크리트와 홍준표, 유승민의 지지자들보다 훨씬 많다.
원문: 한성안 교수의 경제학 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