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나무의 나이는 나이테를 통해 알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나이테는 단순히 나무의 연령 뿐 아니라 생각보다 더 많은 정보를 담는다. 기후가 좋은 봄과 여름에 자란 부분은 색이 옅은 반면 가을과 겨울에 자란 부분은 색이 짙고 단단하다. 나이테를 통해 기후와 환경이 얼마나 좋았고 나빴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이테는 환경이 나무에게 미친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이라고 다를까? 한때 우리는 인간이 모든 것을 해내고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던 시기가 있었다. 그 시기는 계몽주의의 시기였고 근대의 시기였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는 환경이 인간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수많은 연구를 통해 속속들이 밝혀졌다. 질병 또한 마찬가지다. 소득이 높을수록, 학력이 높을수록, 유해한 환경과 거리가 멀수록 평균 수명과 기대 여명이 더 높으며 더 건강하다는 건 연구를 통해 많이 밝혀진 바다.
질병은 부정적인 환경이 개인에게 미친 결과물이자 겉으로 드러난 부정적인 환경의 나이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이 우리를 병들게 하고 아프게 하는 환경일까? 문학책 같은 제목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은 질병이란 부정적 나이테를 통해 이 나이테를 만든 환경에 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이 책은 시작부터 도발적이다. 구직 과정에서 경험하는 차별과 건강은 어떠한 관계가 있을까? 해당 연구에서는 사람들에게 “구직 과정에서 차별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예’ ‘아니오’ ‘해당 없음’을 선택하게 했다. 원래는 이 ‘해당 없음’은 아직 구직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항목이었다. 그런데 정작 직장을 가진 노동자 중에서 ‘해당 없음’을 선택한 사람이 제법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응답자들을 성별로 나누고 차별 경험과 자가평가 건강의 연관성을 살펴보았다. 일단 남녀 노동자 모두 차별 경험이 있는 노동자들이 차별 경험이 없는 노동자들보다 더 건강 위험비가 높게 나왔다. 이를 통해 우리는 차별이 누구에게나 아픈 경험이고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건 누구나 어렴풋이 아는 사실이다.
재미있는 점은 ‘해당 없음’의 경우에서 남성 노동자들은 차별 경험이 없는 사람들과 거의 차이가 없는 반면 여성 노동자들은 차별 경험이 있다고 답한 사람들보다 더 건강 위험비가 나빴다. 이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여성 노동자들이 차별의 경험을 표현하기가 더 어려우며 이렇게 말하지 못하는 차별이 더 큰 고통으로 작용했다는 점이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은 비슷하지만 다른 사례를 뒤이어 제시한다. 다문화가정 청소년 성별에 따른 학교 폭력 대응 유형과 우울증상 유병률 차이라는 연구다. 이 연구에서 답변은 1) 학교 폭력 피해경험 없음, 2) 경험 후 주변에 알리고 도움을 청함, 3) 경험 후 주변에 도움을 청하지 않음, 4) 별다른 생각 없이 그냥 넘어갔음 이렇게 4가지가 있었다.
남녀 공통으로 학교 폭력 피해의 경험이 없을 때보다 있을 때 우울증 유병률이 높았고, 그중에서도 학교 폭력을 당했음에도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은 사람이 더 높은 유병률을 보였다. 여기까진 예상 가능한 결과다. 차이는 ‘4) 별다른 생각 없이 그냥 넘어갔음’에서 나왔다. 여학생의 유병률은 ‘학교 폭력 피해 없음’이라 답한 사람과 큰 차이가 없는 반면 남학생은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고 말한 사람보다 더 높은 유병률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는 역시 아픔을 호소할 수 있는 사람보다 그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하고 내재화하는 사람의 고통이 더 크다는 것이다. 무엇이 구직 여성들에게 차별에 대해 말하지 못하고 참게 만들었으며, 또 무엇이 남학생들이 학교 폭력에 대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참고 넘기게 만들었을까?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가부장제의 폐해였다.
남성은 더 중요하고 핵심적인 일을 맡아야 한다는 생각과 여성은 보조적이고 분위기를 밝혀줄 도구로 존재해야 한다는 생각이 구직 여성들에게 차별을 말하지 못하고 고통을 내재화하게 만들며, 우수한 남성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이 학교폭력의 경험을 체념하고 넘기게 만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구시대의 관습이 현대의 인간 양쪽에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아픔과 질병을 주는 셈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모두에게 가부장제의 폐지가 필요한 이유가 아닐까? 『아픔이 길이 되려면』이 일관되게 보여주는 것은 아픔을 아픔이라 말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은 우리의 사회가, 제도가, 때로는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편견 등으로 인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픔을 아픔이라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아픔을 삼키고 참아야 하는 상황과 제도와 사회를 바꾸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저자는 책을 통해 지난 세월호의 사례를 이야기한다. 세월호는 국가의 위기 관리 시스템이 멈춘 재난이자 국가가 국민의 안전을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을 무너뜨린 절망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사람들은 과거보다 더 각자도생을 생각하게 되었으며 사회의 신뢰도는 더욱 낮아졌다. 이로 인한 사회적인 비용과 그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이 사고는 단순히 국가의 실패만 드러낸 것이 아니다. 국민의 실패 또한 명백하게 드러났다. 누군가의 재난을 포르노처럼 중계하던 언론이 있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는 그것을 포르노로 소비해대던 국민이 있었다. 많은 사람이 기자와 언론을 ‘기레기’라 욕하지만 그 기레기가 밥 먹고 살고 설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은 그런 뉴스를 즐거이 소비하는 저열한 소비자들이다.
우리 중 누군가는 재난의 피해자들이 피해를 호소할 때 그것을 지겹다고 했으며, 누군가는 단식이란 극단적 방법으로 표현할 때 옆에서 폭식을 하며 조롱했다. 또 누군가는 돈 받았으면 됐지 뭘 그리 난리냐고 했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그 사람들이 얼마나 혜택을 누리고 있다며 차가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이런 행동들로 고통을 겪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말하지 못하게 하고 고통을 겪은 당사자들이 시선이 두려워서 숨게 만들고 움츠러들게 만든, 국민의 실패는 어떻게 할 것인가?
모두가 아픔을 토로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할 판에 다른 사고자들은 조용히 있는데 너네는 왜 난리냐고 비난하는 것은 모두가 다 같이 지옥으로 떨어지자는 것이나 다름없다. 참으로 저열한 사고방식이다. 누구나 아픔을 이야기하고 위로받을 수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다. 누군 말도 못 했는데 너는 왜 말하냐고 비난하는 사회가 아니라. 우리가 바꿔야 할 것은 이렇게 차별과 아픔과 고통을 이야기하지 못하게 만드는 제도와 분위기와 사회다. 이 모든 것이 우리가 바꿔나가야 할 것들이고 우리가 싸워야 할 것들이다.
책에서는 성 소수자의 사례 또한 다룬다. 이미 동성애는 의학계에서 논란이 끝난 문제다. 질병이 아니며, 질병이 아니기에 전환치료가 되는 것도 아니다. 많은 사람이 동성애를 혐오하는 이유 중 하나인 AIDS 또한 동성애가 주원인이 아니다. 성병 감염을 막기 위한 콘돔 같은 안전장치를 하지 않은 상태로 AIDS 보균자와 성관계를 맺었기에 걸리는 것일 뿐 동성애를 해서가 아니다. 또한 AIDS는 의학의 발달로 만성질환이 된 지 오래다. 즉 간염이나 당뇨병과 같은 것이다. 그 누구도 간염이나 당뇨병이 있다고 해서 그 보균자를 혐오의 눈길로 바라보거나 차별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이런 잣대를 동성애자에게 들이대는 것은 우리가 데이터와 현상을 통해 세상을 올바로 바라보기보다는 우리의 편견과 그릇된 믿음으로 세상을 내 마음대로 보기 원하기 때문이다. 이런 우리가 중요시 여기는 것은 현상이나 사회 문제의 해결 따위가 아니다. 나의 작은 세계관과 좁은 시야, 싸구려 신념과 알량한 도덕감을 얼마나 충족시킬 수 있느냐이다. 이것을 충족시키는데 바빠서 정작 그로 인해 희생되는 사람들과 그들의 고통은 쉬이 외면하는 것이다. 도대체 누굴 위한 것인가?
정부나 대기업의 ‘거악’을 경계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진정 경계해야 할 것은 우리의 소악이다. 이런 소악이 불합리와 차별과 편견을 낳고 그런 구조를 유지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고통을 말하지 못하게 만들며 병들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실질적인 해악은 거악보다 우리의 소악이 더 큰 셈이다.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은 바로 불합리와 차별과 편견을 만드는 사회다. 그리고 우리가 그 사회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우리 자신과도 싸워야 한다.
그 누구도 완벽무결하지 않다. 그렇기에 ‘나는 작은 개인이기에 선하고, 언제나 선한 의도를 가졌으므로 올바르고 틀림이 없을 것’이라 믿는 오만은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은 소악을 저지르게 하며 거기에 동조하고 묵인하게 만든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내려놓은 후에 든 생각과 느낌이 바로 이것이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싸워야 할 우리의 전선이 여기에 있다.
덧붙임
읽으며 든 감상 위주로 이 책에 대해 썼으나 이 책을 읽으며 든 아쉬운 부분도 있긴 했다. 역학의 관점에서 접근한 만큼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고용과 해고에 관한 부분이다. 책에서는 해고가 개인에게 있어서 큰 충격과 아픔으로 다가온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모두가 해고되지 않고 정년이 보장되는 정규직으로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런 일자리만 허용할 경우 만들 수 있는 일자리의 수는 비정규직 일자리를 허용할 때보다 매우 부족할 것이다. 실제로 1997년까지 치솟던 자영업자 비율은 1998년 이후로 감소하는데 정작 총자영업자 수는 2005년까지 증가한다. 그럼에도 자영업자 비율이 하락한 것은 1998년 이후에 임금직 일자리가 급격하게 늘어난 덕분이다. IMF 외환위기 이후 정리해고 개념이 탄생하고 종신고용 개념이 붕괴했음을 감안하면 정규직만 있을 때보다 비정규직이 허용될 때 더 많은 일자리가 생김을 알 수 있다.
물론 현재의 비정규직에 문제점이 많으나 그렇다고 비정규직을 아예 막아버리면 소수가 일자리를 독점하고 나머지는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환경이 된다. 이 또한 낙원과는 거리가 멀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할 최선의 방법은 해고가 큰 충격이 되지 않도록 국가가 버퍼를 만드는 것밖에 없다.
이 책에서 일관되게 이야기하는 ‘개인의 질병에 있어 사회가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점은 개인의 성공과 실패 또한 사회적 환경이 미치는 영향이 크단 사실과 연관 지어 생각해보게 된다. 상대적으로 우리는 선진국에 비해 저세금 국가에 해당한다. 재벌과 부자가 세금을 덜 내는 게 아니라 그냥 전 국민이 평균적으로 선진국들에 비해 덜 내는 편이다.
바로 이런 저비용 구조가 개개인들에게 필요한 충분한 사회적 버퍼를 제공하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이기도 하다. 시스템을 만드는 데는 비용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소득세 인상에 무조건 거부감을 가지기보다는 한번 생각해 볼 시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원문: Second Com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