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사퇴하라” – 당신 조국이 어디야?
“천안함은 좌초됐다” – 당신 조국이 어디야?
“국가보안법 폐지하라” – 당신 조국이 어디야?
“한미 FTA 반대한다” – 당신 조국이 어디야?
“반값등록금 실시하라” – 당신 조국이 어디야?
‘생각의 조국’을 묻는 것은 국가주의자들의 일관된 문법이다. 저들이 말하는 ‘조국’이 어디인지는 몰라도 아마 내 조국과는 다른 나라일 것이다. 적어도 나의 조국은 사상의 자유가 보장된 민주국가라고 믿고 있으니 말이다. 한국말을 쓰고 한국 땅에 사는 사람의 조국이 한국이라는 것을 저들도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저 궁금쟁이들은 왜 자꾸 남의 조국을 캐묻는 걸까? “당신 조국이 어디야?”라는 질문의 속내는 이렇다.
‘당신도 한국사람이면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어’
즉 ‘사람’이 아닌 ‘생각’의 국적을 묻는 것이다. 사람들의 관념에 국적이 존재한다고 믿는 국가주의적 상상력, 무엇에든 국적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저들의 신념은 주술과도 같다. 과격한 국가주의자들의 사고는 조국에서 시작돼 조국으로 귀결된다.
과연 정치적 견해에 국적이 존재하는 것일까? 나의 가치관은 조국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결정된 산물일까?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조국 타령에 궁금하여 친애하는 네이버에게 그 뜻을 물었다.
조국(祖國):
1. 조상 때부터 대대로 살던 나라
2. 자기의 국적이 속하여 있는 나라
어느 쪽으로 해석하더라도 정치적 견해에 ‘조국’이 끼어들 틈은 별로 없어 보인다. 물론 진공상태의 관념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개인의 사고체계에 나고 자란 조국의 이데올로기가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한 사람의 가치관은 국적 이외에도 학습수준과 소득수준, 부모의 영향, 선천적 특질, 영화, 음악, 우연 등 수많은 것들에 영향을 받아 형성된다. 이렇게 복합적으로 구성된 사람의 가치관을 국적을 물어 예단하려는 태도는 혈액형별 성격 맞추기 만큼이나 어리석다.
사람의 사고는 국적에 예속되지 않는다. 예컨대, 한미FTA에 대한 입장은 한국인인가 미국인인가보다는, 노동자인가 사용자인가에 따른 계급적 정체성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한 입장은 남북한 국적의 문제가 아닌, 자유주의와 국가주의의 갈등에 가깝다. 이런 이슈들에 대한 입장에 ‘조국’을 묻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당신 조국이 어디야’라는 퉁명스런 질문은 주로 대통령과 정부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향한다. 이렇게 사용되는 ‘조국’이란 폭력의 다른 말이다. 내국인이 아니라 해서 대통령과 정부정책을 비판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재외동포나 외국인, 외계인이라 한들 한국의 대통령을 비판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비판의 자격을 국적으로 제한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저 질문을 즐기는 사람들은 흔히 내국인과 외국인을 가르는 차이로 ‘애국심’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체주의와 ‘애국’을 혼동한 결과다. 저들의 조국 타령에는 ‘한국사람이라면 응당 ~~한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전체주의적 전제가 깔려있다. 사회 구성원의 생각을 일치단결시켜 사회(권력)의 안녕을 지키고자 하는 태도 – 이런 걸 파시즘이라고 부른다.
내가 자유주의자로서 저들의 조국 타령을 비판하는 이유다. 자유주의국가에서 통일된 ‘조국의 생각’이란 건 불가능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론을 통일하겠다’거나 ‘국론분열을 묵과하지 않겠다’는 파시스트의 언어를 거침없이 쏟아내고, 주류언론은 그에 대해 별다른 비판의식을 가지지 않는다.
국민의 생각은 대통령이 묵과하고 말고 할 대상이 아니다. 대통령은 국민의 생각을 다스리겠다는 중세기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조국의 이름으로 ‘다른 생각’을 억압하려 하는 대통령의 태도는 민주국가에서 수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가 발 딛고 사는 이 나라가 잘되길 바란다. 모든 사회 구성원이 차별없이 행복하게 살길 바란다. 어떤 이의 눈에는 만족스럽지 못할는지 몰라도 조국에 대한 나의 애정은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아마 조국을 ‘의심’받는 대부분 사람들이 그러할 것이다.
내 생각에 조국을 묻지 마라. 나의 생각은 조국의 것도 당신의 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