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촌 김성수의 건국훈장 박탈은 무의미하고 강박적이다. 그는 이미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한 인물이 건국의 차원에서도, 친일의 차원에서도 인정받는다는 것은 우리 근대사의 복잡함을 잘 보여준다.
역사란 일방향이 아니다. 좋기만 하거나 나쁘기만 한 인물은 드물다. 건국은 좋은 일이고 친일은 나쁜 일이다. 그건 알겠다. 헌데 국무회의에서 인촌 김성수의 건국훈장 서훈 박탈을 결의한 일은 인간은 모두 다 종이 캐릭터이며, 역사적 인물이 철저하게 한 방향으로만 규정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실망스럽다.
나는 인촌 김성수의 친일 행위가 진심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진심이기는커녕 그는 언론과 기업을 지키려는 선에서 최소한의 현실적 타협만 허용했다고 본다. 역사적 사실이 증언한다.
김성수는 영학숙(영어기숙학교)에서 만난 평생의 친우 송진우와 함께 민족 자강을 꿈꿨다. 송진우는 김성수가 세운 동아일보의 최초 논조를 만든 인물이자 우리 민족 최초의 양심적 언론인이다. 나라가 일본에 넘어가자 청년 송진우는 자결하려고 했다. 저명한 성리학자 기삼연의 수제자이자 선비로서 망국의 책임을 지려고 했던 것이다. 어떻게 자결하면 좋을지 자문을 구하러 스승을 찾았건만, 기삼연 선생은 이미 돌아가신 후였다.
자결했을까? 아니다. 기 선생은 독립무장투쟁을 이끌다가 전사하셨다. 송진우는 스승의 죽음으로 답을 받고도 어찌해야 할 줄을 몰랐다. 김성수는 그런 송진우를 교감으로 앉혔다. 중앙학회를 인수해 중앙학교로 만들어 놓은 후였다. 현재의 중앙고등학교다.
중앙학교는 민족정신 함양의 산실이었다. 1919년에는 경성방직을 설립했다. 경성방직은 이후 독립운동의 자금줄 역할을 했다. 이 해에 김성수와 송진우는 3.1운동을 기획하고 주도하는 운동의 일원이 되었다. 송진우는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지만 친구 김성수의 이름을 불지는 않았다.
다음 해 1920년, 김성수는 동아일보를 창간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몸져누운 송진우를 일으켜 세워 동아일보의 지면을 맡겼다. 창간 모토는 전율적이다.
“민족의 표현기관임을 자임함”
동아일보를 태생부터 친일 수구 신문으로 매도하려는 진보 일각의 사람들은 창간호에 조선 총독의 축사가 실렸다고 한다. 조선 총독의 축사를 싣고 싶지 않으면 신문 창간을 안 하면 된다. 민족의 표현기관임을 자임할 일도 없어진다. 물론 그런 사람도 있으리라. 하지만 김성수는 실용주의자였다.
인촌은 총독의 축사를 받아서 게재했다. 그리고 1면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6면에 게재해 조선의 엿 맛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실용적인 김성수는 경영을, 꼿꼿한 송진우는 펜을 맡으며 두 사람은 환상의 콜라보를 보여준다. 방식과 기질은 달라도 두 사람의 목표는 같았다. 민족의 자강과 독립이었다.
동아일보가 우리나라 여성 인권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사실은 가려져 있다. 동아는 처음부터 여성 인권해방을 기치로 삼았다. 그 유명한 브나로드 운동도 김성수와 송진우 듀오의 작품이다. 동아의 3대 기치가 민족, 민주, 문화였다.
김성수는 1932년에 보성학교를 인수했다. 이것이 보성전문학교가 되었다가 현재의 고려대학교가 되었다. 과거 고려대 운동권의 ‘민족고대’라는 타이틀은 거짓이 아니다. 보성전문은 당시 조선인이 교장을 맡은 유일한 대학이었다. 일부러 창문을 열어두고 바깥에서 들리도록 조선어로 수업을 진행하는 ‘깡’을 시전했다.
또한, 고려대학교의 건축 수준은 지금 기준에서도 매우 높다. 일제의 경성제국대학에 ‘꿇리지’ 않기 위해 일부러 웅장하고 화려하게 지었다. 동아시아에 지어진 최고 수준의 건축물을, 조선인이 조선인을 위해 지을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돈을 쏟아부었던 것이다.
김성수는 경영자이자 독립투쟁과 민족운동의 후원자로서 어쩔 수 없을 때에 한해 체제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지킨 동아일보와 경성방직을 통해 기꺼이 독립운동의 자금줄 역할을 했다. 인촌은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그들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독립운동을 지망하는 젋은이들의 장학금 셔틀이기도 했다.
그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돈 만지는 선수’로 규정했다. 누군가는 민족 독립을 위해 순수한 헌신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은 필요하면 겉으로는 현실과 타협할지라도 그들을 떠받치는 물질적 조건이 되어야 한다. 그건 인촌 김성수 자신이었다.
동아일보에서 손기정 옹의 가슴팍에 새겨진 일장기를 지우고 태극기를 그려넣은 사건은 우연이 아니다. 기자들은 독립운동과 민족주의를 지지했고 사주 김성수가 자신들의 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했다.
1937년 보천보 전투 호외는 김성수의 현실적 유연함과 독립이라는 거시적 목표를 동시에 보여준다. 김일성의 군사작전인 보천보 전투는 묻힐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일제가 완전히 장악한 한반도 내에서 독립군의 ‘승전’을 일부러 떠들썩하게 보도했다.
호외 기사에서 김일성은 ‘폭도’로, 보천보 전투는 ‘난동’으로 표현된다. 그런 표현을 쓰지 않으면 호외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동아일보의 목표가 독립군을 폭도로 규정하는 게 아니었음은 독자도, 김일성도 모두 안다.
김일성은 동아일보의 보도로 스타가 되었다. 해방 직후 여론조사에 따르면 군무장관(국방부장관) 적임자로 김일성이 압도적인 1위를 달리고 있다. 김일성 띄워주기가 6.25의 비극으로 연결되기는 하지만, 그건 김성수의 잘못도 의도도 아니잖은가.
김성수의 친일행위라는 게 이런 맥락이다. 중일전쟁 발발 후 일제는 광기에 휩싸였고 본토와 식민지 조선의 백성들에게 보다 노골적인 충성을 요구하게 된다. 김성수의 친일 발언과 전쟁지원 기부는 개인의 안녕과 치부를 위한 굴종이라기보다는 그야말로 최소한의 실용적 행위였다.
해방 후 반민특위를 구성한 사람들은 투철한 독립투사들이었다. 그들은 김성수 일가를 존경과 호의로 대했다. 그럼에도 그는 변절자인가? 일제의 폭력이 두렵고 부귀영화가 아까워 한 번 변절했고, 변절자가 흔히 그렇듯 그의 영혼은 회복할 수 없을 만치 타락했을까? 현실은 판타지가 아니다. 김성수의 정신은 건강했다.
해방 후의 인촌 김성수는 두 가지 결정으로 기억된다
첫째, 농지개혁. 대한민국의 농지개혁은 지주의 땅을 논밭을 경작하는 소작동들에게 분배하는 혁명적 정책이었다. 너무나 혁명적이고 좌파적이었기에 이 일은 공산주의자인 죽산 조봉암 선생의 주도로 설계되었다.
인존 김성수는 전라도 만석꾼의 아들로 광활한 땅을 물려받은 대지주였다. 실제로 그의 별명이 ‘전라도 만석꾼’이었다. 농지개혁은 그의 부의 원천을 뿌리부터 붕괴시킬 정책이다. 그런데 김성수는 농지개혁에 찬성했다. 그는 죽산 조봉암 선생의 든든한 우군이기도 했다. 왜일까? 농지개혁이 민족의 앞날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인촌 김성수가 사업체를 지키기 위해 현실과 타협했었던들 그것은 모두 독립운동과 민족자강의 과정이었고,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언제나 사익보다 민족을 앞에 놓았다. 김성수의 농지개혁 찬성으로 다른 대지주들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김성수는 당시 민족 자본가를 대표하는 수장이었다.
두 번째는 김성수의 정치활동이다. 김성수는 대한민국의 2대 부통령이다. 그런데 그를 부통령으로 기억하는 이들은 별로 없다. 1년을 조금 넘기고 사임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독재에 반대하는 차원이었다.
이후 김성수는 이승만의 장기 독재에 대항하기 위해 현재 여당 더불어민주당의 전신인 민주당 창당에 관여했다. 그는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것처럼 이땅의 민주화에도 재산을 아낌없이 쏟아붓다가 사망했다.
인촌 김성수는 해방 후에도 여전히 치열한 독립투사들로부터 존경받았다. 그는 친일파이자 수구이며, 이기적인 보신주의자인가? 역사가 그리 단순치 않으며, 인간의 생이 그렇게 간단명료하지 않다. 현재 동아일보의 논조와는 상관 없는 이야기다. 건국훈장 서훈이 박탈된 건 동아일보가 아니라 김성수다.
나는 인촌 김성수가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반민족행위자 목록에 올라가 있는 것도 불편했다. 하지만 그것까지는 인정했다. 친일행위의 기준이란 것을 정했다면, 기준을 충족한 인물은 기계적으로 명단에 올리는 것이 어쨌거나 공정할 것이니 말이다.
아무리 민족자본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할지라도, 겉으로만 형식적으로 굴복한 것이고 당대를 산 모두가 그걸 인정한다 할지라도, 예외를 두어선 안 될 수 있다. 불공정함을 방지하기 위해 인촌 김성수 같은 인물일지라도 전후 맥락을 삭제하고 비정하게 명단에 올릴 수도 있다고 본다.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 친일 언행이라도 친일 언행으로 못 박을 수 있다. 그래야 ‘나도 인촌처럼 연기에 불과했다’는 어깃장의 싹을 자를 수 있을 테니. 비록 연기였어도, 연기임을 모두가 알아도 친일은 친일이니 그렇게 기록될 수 있다.
그런데 건국훈장 서훈 박탈은 대체 뭔가. 최소한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였어야지. 어쨌거나 친일 행위가 기록되어서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올라가 있다면, 그렇다면, 어쨌거나 김성수가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하나인 것도 사실이란 말이다.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인가. 이걸 지금 정치라고 하는가? 정부에 묻고 싶다. 다음의 이야기는 어떻게 들리는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생전에 남긴 말이다.
“인촌은 비록 감옥에 가고 독립투쟁은 하지 않았지만 어떠한 독립투쟁 못지않게 우리 민족에 공헌을 했다고 나는 믿는다. 인촌은 동아일보를 창간해 우리 민족을 계몽하여 갈 방향을 제시해 주었고 큰 힘을 주었다 그 공로는 아무리 강조해도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었다.
인촌은 오늘의 중앙고와 고려대를 운영해서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여 일제 치하에서 이 나라를 이끌 고급 인력을 배출, 우리 민족의 내실 역량을 키웠다 인촌은 또한 근대적 산업 규모의 경성방직을 만들어서 우리 민족도 능히 근대적 사업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과시했다.”
원문: 홍대선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