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조 위기 상황에서 고통스럽게 넋두리를 합니다. 80년대에는 절규의 방향은 한 방향이었고, 그것들을 모아서 싸우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절규의 방향이 양방향입니다. 이 상황에서 분열을 극복하고 일단 하나가 되어야 할까요? 아니면 이참에 그동안 꺼내지 못했던 난제들을 털어낼 계기로 삼아야 할까요? 고민이 깊어갑니다.
문득 1989년 가을, 이맘때가 생각납니다. 늙은 좌빨의 무용담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때 저는 이 수줍음 많고 사람들 많은 것 싫어하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범대 학생회장 후보로 나서야 했습니다. 힘겹게 원고를 썼고, 며칠 밤을 새워가며 대중 연설을 연습했습니다.
그당시 정세는 아주 나빴습니다. 노태우는 물태우에서 갑자기 각을 잡으면서 ‘범죄와의 전쟁’을 선언하면서 공안정국을 조성했고(그 원인 제공자가 지금 국회의원이죠. 저는 아직도 이를 갈고 있습니다. 그 몰정세적이고 무책임한 돌출행동에 대해), 노동운동의 상승기라고 생각하고 출범했던 전교조는 갑자기 조성된 공안정국의 집중 타격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범대 학생회장이 되겠다고 나서는 것은 바로 공안당국의 표적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안 그래도 저는 당시 한창 재개발로 시끄럽던 사당동, 신림7동에서 빈민들과 연대해서 철거용역과 치고받고 싸우느라 잔뜩 찍혀 있었고, 구로 공단 노조들과 이른바 노학연대 투쟁을 조직하는 일에도 가담하여 또 찍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출마했고, 불행히도 낙선했습니다. 낙선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안기부(국정원)가 조만간 잡아가려 한다는 첩보가 들어왔고, 관악경찰서에서는 소환장을 보냈습니다. 수배자 신세가 된 겁니다.
도망을 쳤습니다. 경상북도 경산까지 가서 도피생활을 했습니다. 당시 경북 경산에는 양돈장이 많이 있었는데, 그 양돈장 중 하나에 취직했습니다. 꼭두새벽에 일어나서 돼지 밥 주고, 돼지 똥 치우는게 일이었습니다. 날마다 손수레로 몇 개씩 돼지 똥을 삽으로 퍼다 날랐습니다. 그리고 나서 씻고 점심을 먹으면 오후는 대체로 한가한 편이었는데, 양돈장 주인아저씨(형님?)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그 댁 아이들을 데리고 산책을 다녔습니다.
그런데 양돈장 주인이 알고 봤더니 농민운동가였습니다. 말을 더듬었는데, 유신 시절 고문 후유증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 지역 농민회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타자를 칠 줄 아는 젊은이가 왔다고 다들 좋아했습니다. 당시 태동하던 진보 진영 정당 설립 준비 지역 모임에도 나갔습니다.
그렇게 한 달 반쯤 지났는데, 그분이 그 더듬거리는 말로 “너, 학생운동하다 도망 다니는 거지?” 이렇게 묻는 거였습니다. 물론 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분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남은 평생 돼지 치면서 농촌생활을 하고, 여기에 투신 할 거냐, 아니면 나름의 학문과 전문지식을 활용해서 뭔가 해 볼 생각이냐?”
저는 “교사가 되어 학생들이 진리를 사랑하고 올바름을 가치 있게 여기는 그런 사람으로 자라게 할 것입니다.” 라고 포부를 밝혔습니다.
그러자 그분이 뜻밖에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서울에 가서 자수해라. 그럼 초범이고 자수니까 정상참작도 되고 해서 큰 탈 나지는 않을 거다. 그런데 누구한테 쫓기는 거냐?”
“안기부하고 관악서입니다.”
“그럼 관악서에 자수해라. 일단 경찰 유치장에 들어가면 더 이상 안기부 소관이 아니다. 관악서에서는 기껏 집시법 위반이지만, 안기부에서는 무슨 괴물 같은 조직사건이 될지 모른다. 잘 판단 해라.”
나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기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불만스러운 얼굴로 그분을 보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리석게 굴지 마라. 네가 정말 교사가 되어서 올바른 교육을 하고 싶다면, 교사가 될 수 있는 길을 걸어라. 어차피 농촌에서 농민운동가가 되지 않을 거라면 여기서 하루라도 더 있는 건 낭비다. 도망 다니지 말고 털 수 있는 건 빨리 털어라. 교사가 되는 것이 농민 운동가가 되는 것 보다 덜 민중적이라고는 생각하지 마라.
그러니 빨리 교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라. 비록 그러기 위해서 조금은 비굴해지고 조금은 나약해질지 몰라도 그건 치러야 할 비용이다. 네가 적에게 굽히기 싫어서 끝내 출두하지 않고 여기서 버틴다면 결국 네가 들어갈 교단의 한 자리가 아깝게 되는 거다. 세상은 의로운 교사 한 명을 잃어버리는 거다. 내 생각에 그건 이 시골의 농민활동가 한 사람을 얻는 것으로 보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아까운 일이다. 잘 판단하기 바란다. 때로는 타협에 더 큰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순간 나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농촌에 완전히 뿌리박고 농민활동가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교사가 되어 교육운동을 할 결심을 이미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저는 교사가 되는 길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코스를 밟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교사가 되는 길로 다시 들어서려면 자수를 해야 했고, 저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굴욕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이 현실을 민중 속에서 오랫동안 활동해온 운동가는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학생운동 한답시고 결기를 세웠던 나는 사실은 천지분간 못 하던 병정놀이꾼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날로 짐을 쌌습니다. 정들었던 양돈장을 떠나던 날, 그분이 아주 무거운 짐을 불쑥 건네주었습니다. 그리고 민망한지 지금 말고 고속버스 안에서 열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경상도 남자 특유의 무뚝뚝한 모습으로 “돌아보지 마라.” 하고는 휑하니 가버렸습니다.
고속버스가 출발하고 나서야 난 그 무거운 짐의 포장을 열어 보았습니다. 그것은 모두 여섯 권으로 구성된 김수행 교수의 <자본론> 번역서였습니다. 당시 서울에서 대구까지 고속버스가 4,800원이었는데 한 권당 6,500원씩 하는 이 책을 여섯 권 산다는 것은 학생에게는 엄청난 지출이라 그동안 침만 삼키고 있었던 바로 그 책이었습니다.
이 책은 지금도 내 책장에서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비록 활자판이라 가독성이 떨어지고, 심지어 한문이 한글보다 더 많아서 쉽게 눈에 들어오지도 않지만 마음이 무겁고 답답해질 때마다 이 책을 꺼내어서 읽어 봅니다. 이미 외우다시피한 자본론이지만, 이 책에 얽힌 스토리를 다시 회상하기 위해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