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N포털 메인화면을 들여다보는데, 유독 내 시선을 사로잡는 기사가 한 가지 있었다. ‘첫인상의 비밀 풀렸다…비호감 지인 닮으면 불신’이라는 제목이었는데 아무래도 심리학 연구에 대한 내용일 것 같아 반가운 마음에 냉큼 기사를 클릭했다. 기사에 소개된 것은 낯선 사람을 처음 만나게 되었을 때, 즉 인상 형성(impression management)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에 관한 연구였다. 과거에 만났던 사람에 대한 신뢰/불신에 대한 기억이 처음 만난 상대를 향한 신뢰감 형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 요지였다.
과거 불신하던 사람과 닮았다는 이유만으로도, 사람들은 처음 만난 그 사람 또한 불신하려 한다. 반면 과거 내가 신뢰하던 사람과 닮았다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에 대한 인상 또한 신뢰 쪽으로 기울 가능성이 높다. 꽤나 흥미로운 연구 결과였다.
물론 기사의 제목처럼 첫인상의 비밀이 시원하게 풀린 그런 상황은 절대 아니었지만 우리가 평소 궁금해했던, ‘이유 없이 그냥 못 믿겠는 사람’, ‘이유 없이 그냥 신뢰가 가는 사람’이 존재하는 현상에 대한 하나의 실마리가 될 가능성이 무척 커 보였다. 한편 기사를 읽어 내려가면서 나는 독자들의 반응을 한 번 상상해봤다. 분명 ‘당연한 걸 뭐하려 연구까지 하냐’, ‘이걸 모르는 사람도 있나?’ 등의 반응이 있을 것이라 확신하며 댓글 목록으로 눈길을 돌렸고, 역시나 내 예상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심리학 연구 기사에 대한 매우 흔한 반응이다. N포털 ‘화제의 연구결과’ 섹션에는 종종 심리학 연구 결과를 소개하는 기사들이 실리는데 어느 기사를 보더라도 독자들의 반응은 크게 다르지 않다. ‘뻔한 걸 연구한다’, ‘연구자들은 분명 연구비를 다른 곳에 썼을 것이다’, ‘엄마, 나도 연구자 할래’ 등등. 물론 일부 인정한다.
사실 내가 보기에 기사에 소개된 이 연구의 함의(implication)는 무척 심오한 것이었지만 기자 분의 욕심이 지나쳤던 탓인지, 연구 제목으로 심한 ‘어그로’를 끌고 말았음을 부정하기가 어렵다. 가뜩이나 ‘당연한 걸 연구 한다’며 비아냥 받기 일쑤인데 제목마저 저렇게 자극적이었으니 이를 어찌하겠는가.
기사 제목이 갖는 문제점은 차치하고, 지금부터 이 연구가 정녕 그렇게 가치가 없는 것인지에 대해 한 번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당연하다, 뻔하다고 했지만 과연 그러한지, 만약 이 연구를 통해 우리가 인사이트(insight)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무엇에 대한 것이어야 할지 한 번 생각해보고자 한다.
1.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새삼스런 고찰
여러분 마음속에 신뢰/불신하는 대상을 한 번 떠올려보라. 그리고 그를 왜 신뢰/불신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라. 여러 가지 그럴듯한 이유들이 떠오를 것이다. 신뢰감을 주는/깨뜨리는 행위가 있었다든지, 나를 향한 태도가 어떠하다든지, 주위의 평판이 어떻다든지 등등. 여러 가지 납득 가능한 이유들을 떠올리려 애를 쓸 것이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아마 ‘그런 이유’까지는 차마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심리학 연구/이론들을 살펴보면 대개 인상 형성 과정은 눈 깜짝할 새에 이루어지는, 전의식적인 과정이다. 따라서 적극적으로 예측, 통제하는 것은 고사하고 어떠한 방향으로 인상 형성이 이미 일어나버렸음을 자각하는 것조차도 무척 버거운 일이다). 상기의 연구 결과가 말해주듯, 단지 내가 알던 누군가와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신뢰/불신하게 되었다고 하는것 말이다.
연구 결과를 보고 ‘당연하다’라고 내린 평가는, 먼저 그 연구에 대한 기사를 읽고 그 가능성을 의식적으로 자각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막상 들으면 ‘당연하다’라고 말하지만, 평소에는 그것을 충분히 의식한다거나 ‘합리적인 행동’을 위한 경계로 삼는 등의 노력을 할 수 없었다는 의미다. 그러나 예전에는 자각되지 않아서 그럴 수 없었을지 몰라도 이제부터는 누군가를 처음 만나고, 그에 대한 신뢰/불신감을 만들며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혹시 내가 저 사람을 신뢰/불신하는 이유가, 단지 저 사람이 내가 과거에 봤던 누군가와 닮았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과연 그것은 그것대로 좋은 일일까?’ 자아 성찰, 자기반성, 합리적 인간관에 대한 고민을 해보게 된다면, 그것이 곧 이 연구 결과가 우리에게 제공할 수 있는 하나의 이점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성중심주의의 합리적 인간관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특히 최근 심리학이나 행동경제학 등의 분야에서는 실증적인 연구 결과들을 토대로, 합리성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가차 없이 깨부수고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들은, 인간이 합리적이지 않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의 종래 ‘합리성’에 대한 가정들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려는 것으로 보는 편이다.
예를 들어, 과거 합리적인 인간을 상정할 때 감정(emotion)에 대한 고려는 턱없이 부족했다. 지표상의 이익/손해와 관계없이, 단지 감정적인 이유들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 ‘비합리적’인 결정들을 하는 인간들은 단지 계몽의 대상이 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이익/손해의 범주는 단지 물질적인 것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행복하거나, 자존감을 지키는 등 심리적인 것도 자원(resource)이며, 겉보기에 물질적으로 비합리적인 행동이 사실은, 심리적 자원을 위한 합리적인 선택이었음을 밝혀주는 많은 연구들이 존재한다. 합리성의 신화는 깨어지지 않았다. 단지 예전보다는 더 인간적인 합리성으로 거듭나고 있을 따름이다.
내 감상은 그랬다.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로 저런 이유 때문에 누군가를 믿고, 안 믿을 수 있다니. 다른 객관적인 이유들을 놔두고 단지 누군가와 닮았다는 이유로 내가 사랑/미움을 받을 수도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 그리고 ‘당연하다’며 인간의 비합리성에 관한 믿음을 재확인하는 것에 머물 것이 아니라 그렇다면 왜, 어째서 저것이 신뢰/불신 판단의 근거로 작동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그 관심사를 옮겨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왜 그럴까? 진화 과정에서 어쩌다 보니 생겨난 부작용일까? 아니면 나름의 논리와 이유를 갖춘, 그럴듯한 생존 방략일까? 닮았다는 것이 신뢰/불신 판단의 근거가 된다면, 그 인식의 타당성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관련 증거들도 찾을 수 있을까? 즉, 외모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진정성을 드러내는 지표로 기능할 수 있는가? 아니면 단지 인지적 관점에서 볼 때, 머리 속 남아 있던 과거의 기억들이 현재 자극 수용에 간섭을 일으키는 것일까? 상기의 연구 결과를 어떻게 하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합리성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을까?
2. 결과론의 함정
사람들은 ‘당연하다’라고 했다. 하지만 연구 결과가 이미 나와버렸기 때문에 그런 평가가 가능했던 것일 뿐, 막상 연구 결과가 아닌, 가설만이 존재하던 시점이었다면 그런 단정적인 반응이 과연 그렇게 쉽게 나올 수 있었을까? 심리학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용어 가운데에는 후견 편파(hindsight bias)라고 하는 것이 있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그 사건의 발생 가능성에 대한 예측을 하지 못했음에도, 막상 사건이 일어나고 나니 ‘거봐, 내가 뭐랬어. 그럴 것 같았다니까’, ‘어쩐지 예감이 들더라니’, ‘내 저럴 줄 알았다’ 등과 같이 반응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그리고 상기 소개된 연구의 결과 역시 비교적 후견 편파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으리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미 벌어진 결과를 두고, 원인들을 짜 맞추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 그러나 그 반대, 일어나지 않은 결과를 예측하는 것은 어렵다. 하나의 사건이 하나의 원인에 의해 귀결되는 것도 아니거니와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변수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높은 우선순위를 차지하고자 서로 다투고 있기 때문이다.
바퀴 달린 물체를 평행으로 굴려야 하는 실험을 가정해보자. 인위적인 실험실이나 레일 등 보조장치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라면, 물체의 움직임을 평행 상태로 올곧게 유지한다는 것이 극도로 어렵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지면의 마찰이나 요철도 고려해야 하고 바람의 세기, 방향 등도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처음 물체를 밀어 힘을 실을 때, 힘이 작용하는 방향에 대한 세심함이 필요하다. 미세한 뒤틀림으로도, 물체의 궤적은 평행 상태를 유지할 수 없게 될 테니 말이다.
주어진 원인(변수)들을 가지고 하나의 심리 현상을 예측한다는 것도, 저 평행하게 물체 굴리는 일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인간의 심리는 섬세하고 예민하기 짝이 없으며, 언제 어디서 무슨 이유로 바뀔지 알 수 없다. 따라서 연구 가설을 세우는 과정에서 개연성에 관한 섣부른 가정은 지양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소위 연구자들이 대안적 설명(alternative explanation)에 늘 촉각을 곤두세우는 이유다. 초기 예상과는 다른 결과가 나타날 가능성은 없을까? 예측되는 결과가 나타났다 하더라도, 그것이 내가 생각한 원인에 의한 것이 맞을까? 아니면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다른 변수에 의한 결과는 아니었을까? 등과 같은 질문들이다.
위의 연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과가 나온 시점에서야 ‘당연하다’라고 말하기 쉽지만, 직접 데이터를 모으고 분석을 진행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런 판단을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과거 내가 알던 사람과 닮았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신뢰/불신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가령, 과거에 불신하던 사람과는 좋지 않은 관계로 마무리되어 찝찝함을 남겼지만 이번에는 그런 일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과거에 알던 사람과 닮은 그를 외려 신뢰롭게 보고자 노력할 수도 있다.
혹은 인간의 합리성, 이성의 힘이 그렇게까지 형편없지는 않은지라 단지 과거에 내가 알던 사람과 닮았다는 이유로, 신뢰/불신 여부를 판단하려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도 아니라면, 신뢰/불신에 대한 연구 결과가 과거 만난 사람과의 유사성 때문이 아닌, 실험 상황에서 미처 통제되지 못한 가외 변수 때문일 수도 있다. 아직 실험 전 단계라고 본다면, 여러 가지 대안적 설명의 가능성이 난무하는 상황 속에서 과연 데이터는 누구의 손을 들어줄지 그 누구도 ‘당연한 결과’가 있으리라는 말은 못 했을 것이다.
정리해보자. 우리는 과거의 신뢰/불신하던 사람과 닮았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신뢰/불신하는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최종적인 신뢰/불신 결정에 어느 정도나 비중을 차지하는지 아직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듯,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만은 분명한 듯하다(적어도 저 연구 결과가 타당하고 신뢰롭다는 가정 하에).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 연구 결과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뻔한 내용이다, 별 의미가 없다 등 원색적인 비난이 이어진다. 그러나 일축하고 넘겨버리기에는 좀 아까운 감이 없지 않다. 다음의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그리고 이 질문들은 당신이 그동안 봐 왔던, 그리고 앞으로도 보게 될 ‘당연해 보이는 연구’들에도 마찬가지로 적용 가능함을 덧붙여 둔다).
- 당신이 저 연구 결과에 대해 ‘당연하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 정말 ‘당연한’ 연구 결과였을까? 결과를 모르고 문제만 알던 상황이었다면 어땠을까?
원문: 허용회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