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12월 28일 파리 그랑카페에서 뤼미에르 형제는 50초짜리 활동사진 하나를 공개한다. 시오타 역에 도착하는 기차 한 대의 모습을 담은 기록영화 ‘열차의 도착’(1895)이다. 인간이 현실을 영상으로 필사하기 시작한 순간이자, 구텐베르크의 견고한 은하계에 균열이 생긴 순간이기도 하다.
그로부터 7년 뒤, 전직 마술사 조르주 멜리에스는 ‘달나라 여행’(1902)을 완성한다. 영화에서 대포는 우주선을 궤도 위로 쏘아 올리는 발사대고, 우주인은 달이라는 미지의 영역을 탐사한다. 영화는 현실을 복사하는 인쇄기이자 환상을 찍어내는 거푸집이 됐다.
이후 영화 역사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사실을 기록하는 뤼미에르의 영화와 환상을 파고드는 멜리에스의 영화다. 하지만 둘 사이의 경계가 언제나 분명하지는 않다. ‘열차의 도착’이 처음 상영될 때 관객들은 스크린으로 질주하는 기차에 겁을 먹고 비명을 질러댔다. 실제와 환상은 뒤죽박죽 섞였다. 발명가 뤼미에르의 직업은 마술사나 다름없었다. 한편 ‘달나라 여행’을 본 사람들은 자신이 실제 달이라도 다녀온 듯 이 영화를 생생한 현실로 받아들였다.
영화에서 현실은 체험할 수 없는 환상이며, 환상은 재현할 수 있는 현실이다.
‘아바타’의 실패와 ‘그래비티’의 성공
‘그래비티’(2013)는 뤼미에르의 열차와 멜리에스의 달나라를 재발명하고 영속화하려는 영화다. 이야기는 3D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간략하게 압축됐다. 배경은 광활한 우주지만 서사를 이끄는 등장인물은 단 두 명이다. 반면 형식은 고도로 정교하며 미학적 야심으로 가득하다.
시작하자마자 17분에 달하는 롱테이크가 길게 이어지며, 카메라는 과시하듯 드넓은 우주를 활강하거나 부유한다. 그 너머로 주인공을 위협하는 우주파편이 맹렬하게 질주한다. 압도적인 시청각적 체험을 통해 누군가는 이 영화를 조금 비싼 BBC 다큐멘터리로, 다른 누군가는 덜 짜릿한 테마파크 놀이기구로 받아들일지 모른다.
감독 알폰소 쿠아론은 3D기술의 효과와 한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3D영화에서 입체효과의 물리적 양은 패럴랙스(Parallax)라는 용어로 부른다. 패럴랙스가 클수록 관객이 받아들여야 할 정보량도 함께 커진다. 이차원에서 삼차원으로 정보가 담기는 공간이 확장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사가 복잡해질수록 관객이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위험이 있다.
쿠아론은 이 문제를 피하기 위해 영리하게도 서사를 단순화한다. 3D영화 열풍에 선구자적 역할을 한 ‘아바타’(2009)가 실패한 지점이 여기다. 제임스 케머런 감독은 ‘아바타’를 만들며 첨단테크놀로지에 천착했을 뿐 서사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았다. 유치한 이야기에 매력 없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신파 멜로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케머런은 2억6천만 달러를 쏟아 부었다.
디지털 기술로 아날로그 시대와 작별하기
‘그래비티’는 ‘아바타’가 가진 장점을 늘리고 단점은 줄이는 데 성공한 영화다. 쿠아론은 입체기술이 가져다주는 효과에 의존하는 대신, 디지털 2D영화의 기술적 가능성을 시험한다. 무중량 상태에서 함께 유영하듯 인물 동선을 따라가는 카메라는 디지털이 아닌 필름이었다면 촬영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영화의 80%는 컴퓨터 그래픽으로 미리 완성한 뒤 배우는 거기에 맞춰 연기를 했다. 디지털 기술과 모션 캡처, CGI가 없었다면 애초부터 만들어 질 수 없었다는 뜻이다.
이 작품의 가장 큰 성취는 3D기술이 아닌 고전적 영화 제작 기법에 있다. ‘그래비티’는 마틴 스코시즈가 감독한 ‘휴고’(2011) 이후 3D기술로 기성 영화의 제작 방식을 되돌아보는 첫 번째 영화다.
쿠아론은 이 영화로 아날로그 영상제작의 소멸을 애도하는 듯 보인다. 그래서일까. 영화는 기존 고전 작품에 대한 인용과 오마쥬로 가득하다. 많은 장면에서 다른 영화를 차용하거나 패러디한다. 산드라 블록이 우주복을 벗는 장면은 섹슈얼리티가 생략된 ‘바바렐라’(1968) 오프닝 시퀀스다. 우주선을 자궁의 은유로 활용하거나 익스트림 클로즈업을 빈번히 사용하는 촬영 방식은 ‘2001스페이스 오디세이’(1968)를 연상케 한다. 두 주인공이 우주에서 표류하는 모습이나 특정 공간(지구 궤도)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친다는 이야기 틀은 실험영화 ‘오후의 그물’(1943)에서 가져왔다.
게임과 영화의 이종교배
‘그래비티’에서 눈에 띄는 특징 하나는 영화가 마침내 게임을 흡수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문화 생태계에서 영화는 피식자보다 포식자에 가깝다. 다른 예술이나 미디어가 지닌 속성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제공하는 몰입과 생동감은 게임에서 이미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특징이기도 하다. 1인칭 시점숏을 서사 진행에 적극 반영하거나, 디지털 액터(Digital Actor)를 영화 전반에 사용한 점은 명백히 FPS(1인칭 슈팅 게임)나 MMORPG(대규모 다중 사용자 온라인 롤 플레잉 게임)의 특성이다. 한국에서 게임을 ‘4대 중독물질’이라며 규제 대상으로 삼는데 여념이 없을 때, 디지털 기술의 종주국은 새로운 매체를 산업 전반에 적용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놀라운 기술 발전을 경유한 ‘그래비티’는 영화사적 맥락에서 ‘완전영화(Total Cinema)’에 가까운 작품이다. ‘완전영화’라는 개념은 프랑스인 영화평론가 앙드레 바쟁이 주창했다. 바쟁에 따르면 현실 재현은 예술 활동의 기초이자 궁극적 목표다. 마찬가지로 영화도 현실을 완벽히 재현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 그 재현은 음향, 색깔, 입체감으로 외부세계를 재구성할 때 가능하다. 무성에서 유성으로, 흑백에서 컬러로 영화가 걸어온 길은 현실 재현을 위한 변증법적 행보라는 게 바쟁의 주장이다. 3D아이맥스와 돌비 애트모스(Dolby Atmos) 사운드 시스템이 주는 효과를 극대화한 ‘그래비티’는 그런 의미에서 동시대 영화 산업의 최전선에 있다.
하지만 ‘그래비티’가 감동적인 진짜 이유는 이 영화가 첨단테크놀로지로 무장하고도 끝내 고전적 서사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쿠아론은 스탠리 큐브릭처럼 우주에서 ‘철학’을 하거나(‘2001스페이스 오디세이’) 스티븐 스필버그처럼 장르 영화를 재해석하지[‘우주전쟁’(2005)]않는다. 등장인물들은 철저히 세속적이며 줄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귀향 모티브’의 원형을 고스란히 가져왔다.
신 없는 지구궤도에서 인간이 살아남는 방식
플라톤은 이데아에서 쫓겨난 인간이 본질적으로 자기를 잃어버린 상태에 있다고 말한다. 이런 자기상실 상태는 존재의 근원인 고향을 다시 찾는 과정에서 극복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귀향 모티브’는 서구 문화에서 끊임없이 변주됐다. ‘그래비티’도 이 연장선에 있다. 지구로 귀환하기 위해 갖은 시련을 겪는 라이언 스톤(산드라 블록)과 그녀를 옆에서 돕는 맷 코왈스키(조지 클루니)는 베들레헴으로 향하는 롯과 나오미처럼, 혹은 아테카로 돌아가는 오디세우스와 아테네처럼 보이기도 한다.
잃어버린 고향을 되찾는 과정에서 나오미는 야훼의 계시를, 오디세우스는 아테네의 인도를 받는다. 안타깝게도 두 우주인 곁에는 신이 없다. 쿠아론은 신적 존재 없이 우주를 헤매는 두 주인공을 위해 상식과 물리 법칙을 과감하게 건너뛰는 장면을 집어넣는다. 그래서 라이언 박사는 중국어를 할 수 없으면서 톈궁을 조작해 지구로 멋지게 착륙하고, 소화기를 추진장치로 사용해 다른 우주선으로 이동한다. 첨단 기술조차 통제할 수 없는 적대적 환경에서 등장인물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이 작품은 우주영화보다 재난영화나 호러영화에 더 가깝다. 우주는 이해할 수 없으며 압도적인 힘을 가진 공간이다. 첨단기술조차 무중량 공간에서는 별 쓸모가 없다. 우주에서 인간은 한없이 무력한 존재다. 박사가 두 발로 땅을 딛고 일어서는 엔딩에서 관객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 절망적인 환경을 극복하고 기어이 살아남는 한 인간의 생존 드라마에 서스펜스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래비티’는 디지털이 빚어내는 심연에서 나약한 인간이 내뱉는 긴 한숨과 짧은 탄식이 교차하는 영화다.
단비뉴스 박정헌 기자 (기사 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