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지 몬비엇(George Monbiot)의 「Stepping Back from the Brink」을 번역한 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안다. 여러 해 동안 과학자들은 우리가 지구의 생태적 한계를 돌파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우리는 우리가 기후 파괴와 생태적 붕괴의 와중에 있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우리는 체질적으로 이 지식에 따라 행동할 수 없는 듯 보인다.
합중국은 거대한 생태적 울화의 속박을 풀겠다고 약속한 인간이 선출되었고, 불행하게도 배출해버렸다. 영국 정부가 제작한 150쪽의 환경 친화책 『25년 환경 계획(25 Year Environment Plan)』은 지난 25년과 똑같이 무기력하고 실없는 정부가 발표했다. 항상 그렇듯 그것은 몇몇 진영에서 ‘좋은 시작’이라 서술했다. 어쨌든 어떤 정책도 우리가 직면하는 난제들의 규모에 부합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의 대응을 차단하는가? 수년 동안 그 원인이 대기업의 권력과 경제 성장에 대한 공식적 강박(이 힘이 강력하더라도)보다 훨씬 더 깊다고 추측했다. 그런데 내가 지금까지 읽은 가장 심오하고 광범위한 책 덕분에 그것이 무엇일지 이해하기 시작한다고 느낀다.
제레미 렌트(Jeremy Lent)의 『패턴 형성 본능(The Patterning Instinct)』은 몇 달 전에 출판되었지만 정리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거의 매 페이지가 내가 참이라고 간주한 것을 재고하게 만들었다. 문화사를 신경과학과 결합함으로써 렌트는 그가 인지적 역사(cognitive history)라고 부르는 새로운 분과학문을 전개한다.
유아기부터 우리 마음은 성장하는 문화에 의해 형성된다. 그것은 긴 풀의 들판을 가로지르는 통로처럼 우리가 따라갈 오솔길을 만든다. 이런 의미 패턴을 구성하는 데 도움 되는 것은 우리 언어에 묻어 들어간 강력한 뿌리 은유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깨닫지 못한 채 그것들은 우리의 선택을 인도한다.
렌트는 나머지 세계를 지배한 서양 종교 및 과학 사상의 고유한 특징이 인간 문명과 나머지 생명 세계를 붕괴 직전까지 밀어붙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또한 그는 그것의 은유와 패턴을 파악함으로써 우리가 우리 행로에서 벗어나서 벼랑 끝에서 멀어지도록 이끌, 풀밭을 관통하는 새로운 오솔길을 개발할 방법을 보여준다.
많은 시작점이 있지만 아마 중요한 것은 플라톤의 사상이 초기 기독교 신학에 미친 영향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는 육체가 경험하는 물질적 세계와 분리된 권역에서 존재하며 영혼이 지각하는 관념적 세계를 제시했다. 물질적 세계에 존재하는 순수한 지식에 이르기 위해 영혼은 육체의 감각과 욕망으로부터 격리되어야 한다.
플라톤은 서양 인지의 깊은 프레임을 확립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 프레임은 추상적 사유 능력을 영혼에 관련시키고, 영혼을 진리에 관련시키며, 진리를 불멸성에 관련시킨다. 몇몇 초기 기독교 사상가,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은유를 더 발전시켰다. 인간 육체뿐 아니라 자연 세계 전체가 영혼을 일탈시키고 타락시키는 저주로 여겨졌다. 우리는 내세의 생을 보장하기 위해 현세의 삶을 증오해야 한다.
결국 기독교는 근대 과학적 인지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전의 사유 패턴들과 단절하기는커녕 자신이 “그것의 전체 본질 또는 본성은 생각하는 것이고 그것의 존재는 어떤 장소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어떤 물질적인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실체”로 이루어져 있다는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의 유명한 믿음은 플라톤적 우주론과 기독교적 우주론의 연장이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데카르트는 영혼을 마음으로 대체했다.
우리의 동일성이 마음에서만 확립된다면 기독교도들이 단언하듯 이성 능력이 없는 우리 육체와 나머지 자연은 어떤 내재적 가치도 없다. 데카르트는 이 점에 관해 명시적이었다. 그는 “장인에 의해 제작된 기계와 자연만이 구성하는 다양한 육체 사이에” 아무 차이도 없다고 단언했다. 마음 또는 영혼은 신성한 것이었던 반면에 자연 세계는 본유적 가치도 의미도 없었다. 그것은 무자비하게 해부되고 착취당하기 위해 존재했다.
이런 세계관이 우리 생을 전환시킨 놀라운 경이와 편익 들을 가져다준 과학 혁명의 기반을 이루었다. 또한 우리가 현재 생명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는 몇 가지 파국적인 뿌리 은유를 우리 마음속에 심었다. 그것들에 속하는 것은 인간과 자연의 격리, 인간의 자연 지배, 기계로서의 자연 그리고 더 최근에 소프트웨어로서의 마음과 하드웨어로서의 육체라는 관념들이다.
이런 뿌리 은유가 여전히 공적 담론을 특징짓는다.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박쥐는 내부 전자공학이 배선되어 있어서 날개 근육이 벌레로 곧장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기계다”라고 주장했다. 박쥐의 복잡성, 자기조직화, 자기지속성을 갖춘 기계가 개발된 적 있다면 도킨스 교수는 어디에서 그것을 찾아낼 수 있는지 말해주어야 한다.
내재적 가치를 결여해야 하는 세계. 그런데 많은 사람이 불멸의 영혼 또는 순수한 이성의 신성함에 대한 믿음을 상실해버린 세계에서 우리는 의미의 진공을 직면하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소비주의의 광란으로 채우려 한다. 우리 행동을 바꾸기 위해서는 우리의 뿌리 은유를 바꿀 필요가 있다.
이것은 과학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복잡계에 관한 연구는 구성 성분들이 최근까지 거의 상상할 수 없던 방식으로 서로 연결된, 일련의 자기조직화된 자기재생적 체계로서의 자연을 드러낸다. 그것은 위대한 보존주의자 존 뮤어(John Muir)가 주장했듯 “무언가를 따로 집어 들려고 할 때 우리는 그것이 우주의 다른 모든 것에 매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우리는 자연과 별개로 서 있거나 그것을 지배할 수 있기는커녕 자연 속에 묻어 들어가 있다. 결코 전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과정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잠재적으로 우주 자체를 의미의 그물로 간주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바꿀 새롭고도 강력한 뿌리 은유다.
이런 통찰을 실제 정치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할 일이 많다. 그러나 렌트는 우리 지식과 심지어 우리 의도에도, 우리가 여전히 벼랑으로 가는 행로를 따라가는 까닭을 설명한 듯 보인다.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좋은 시작”의 모습이다. 우리는 행로를 바꾸고 나서야 도착지를 바꿀 수 있다.
원문: 사물의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