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 자신은 이런 경우에 대해 ‘병’ 이라는 어휘를 사용하는 것을 극히 싫어하는 편입니다만, 본 포스팅 내에서는 이야기의 맥락 상 ‘장비병’ ‘사진병’ ‘예술병’ 이라는 어휘를 쓰게 되었습니다. 이 어휘들에 대해 거부반응이 있으신 분이라면 글을 닫아 주시기 바랍니다.
‘풀프’ 이야기, 렌즈 이야기 등등 게시판이나 커뮤니티, SNS등에서 사진 장비 이야기 좀 나오고 사람들이 갑론을박 재미있게 치고받고 하고 있노라면 중간에 꼭 그런 사람이 등장합니다. 우선 제법 그럴싸하게 잘 찍은 사진 몇 장 들이대고 짐짓 무게를 잡으며 이렇게 말하곤 하죠.
“장비질 고만 하고 사진이나 찍어라 ㅋ”
“사소한 장비에 목숨 걸지 말고 사진공부를 해라 ㅋ”
매번 등장하는 이런 분들. 이런 분들의 사고방식은 알고 보면 되게 간단합니다.
“사진에 집중하는 나는 장비질에 정신 팔린 니네들보다 우월하다”
“장비질은 천하고 사진질은 귀하다”
사고 기저에 이런 생각이 분명하게, 그리고 명확히 깔려있어요. 같은 아마추어로서 사진에 열중하든 장비에 열중하든, 사진으로 즐거움과 행복을 추구하는 건 똑같고 거기에 우열은 없는데 말이죠. 장비 가지고 취미 생활 잘 하는 사람들한테 기어이 사진 잘 찍은 컷 몇 장 들이대고는 “사진이 최고야! 장비는 하찮은 거야!”라고 외치지 않고는 견디질 못하는 그런 분들이죠. 그러면서 자기는 장비질이라는 천한 짓거리에서 졸업한 신선인 양 말하곤 합니다.
진짜 신선은 그런 짓 안 합니다. 그냥 다 옳다 미소짓고 아무 말 안 하고 지나가는 게 진짜 신선입니다(…) 사진질이 장비질보다 우월하다는 사고방식, 같은 아마추어끼리지만 사진 잘 찍는 사람일수록 더 대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굳이 굳이 우열을 가리려는 사고방식. 이제는 좀 그만 보고 싶네요.
얼마 전 건프라 찍고 행복하게 장비질 하며 사는 제 블로그에 뜬금없는 댓글이 달렸습니다. 바로 이런 댓글이죠.
“너는 왜 인물사진 거리 사진 안 찍냐? 나가서 아무나 막 좀 찍어봐라.”는 이 댓글을 앞에 두고 벙쪘습니다. 거리에서 아름다운 사람을 보면 촬영한 후 눈인사를 하라고? 자기 예술을 위해서라면 남의 인권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단계까지 온 겁니다.
카메라 비싼 거 가지고 있다 해서 꼭 예술 해야 하고 사진을 열라 공부해서 찍어야 하고… 그래야 한다고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그냥 갖고만 있어도 행복하면 훌륭한 취미입니다. 그걸 남에게 강요하는 게 오히려 병입니다.;;
무리하게 장비 지름 하는 분들을 일컬어 장비병이라 부르지만, 초상권을 무시하고 길거리에서 아무나 막 도촬하고 다니고 멋진 풍경을 찍겠다며 아무 데나 주차하고 쓰레기도 버리며 환경 오염을 잔뜩 하고 돌아오거나 집에 어린 아들딸과 부인이 눈물짓는데도 나 몰라라 내팽개친 채 주말마다 카메라 들고 돌아다니거나… 그러한 사진병, 예술병보다는 차라리 장비병이 나아 보입니다.
장비 때문에 이혼한 사례? 전 요 10년간 장비가 아니라 사진 그 자체 때문에 이혼한 가정을 더 많이 알고 있어요(…) 제 주변에서는 사진병, 예술병에 제대로 걸리면 약이 없다고들 합니다.
타인이 어떤 사진 생활을 하건 기어이 찾아가서 간섭할 필요는 없습니다. 장비질 하고 싶은 분은 장비질 하세요. 사진질 하고 싶은 분은 사진질 하세요. 프라질 하고 싶은 저는 프라질 하며 살고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저는 요즘 사진보다 건담 프라모델을 취미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쪽에도 비슷한 경우가 있어요.
통칭 ‘프라탑’이라고 부르는 건데, 만들고 싶어서 가지고 싶어서 등등 여러 가지 이유로 프라모델을 샀지만 바빠서, 귀찮아서 등등 여러 이유로 만들지 않은 상태로 내버려 두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새 그동안 구입한 프라모델 박스들이 쌓이고 쌓여 ‘프라탑’을 이룹니다. (저는 재력이 없어서 그것도 못 합니다. 그저 부러워할 뿐…) 그러면 꼭 생판 남인 선비나 오지라퍼들이 등장해서 말해요.
“만들지도 않을 프라모델 도대체 왜 사요? 당최 이해 불가네요. 지름병 환자세요?”
이들에게는 ‘소유’도 취미의 하나일 수 있다는 폭넓은 사고방식이 존재하질 않습니다. ‘프라모델=만드는 것’이라는 하나의 정답에만 연연해요. 사둔 프라모델 박스만 봐도 마음이 든든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남의 취미와 나의 취미를 비교하며 우열을 가리지 않고는 못 견디는 겁니다.
물론, 정말 꽉 막힌 사고방식의 소유자라면 여태까지 설명한 일들이 이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 좋은 카메라 = 사진 안 찍을 거면 사면 안 되는 기계
- 프라모델 = 까서 만들 거 아니면 사면 안 되는 장난감
- 음악CD = 열어서 음악 틀지 않으면 의미 없는 원반
이런 식으로 사고방식이 굳은 채 자랐다면 이해 안 갈 수도 있어요.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죠.
“장비 위에 사진 있지, 어떻게 사진 위에 장비가 있습니까?”
… 물론 굳어버린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겠지만, 그런 사고방식도 있을 수 있답니다.
설령 이해가 가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이것은 사진을 넘어선 존중의 차원입니다. 꼭 이해하려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사람 대 사람으로 상호 존중만 해 주면 되는 건데, “내 생각이 무조건 옳다!”라는 꼰대 기질이 합쳐지면서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려 들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듣는 거예요. 꼰대소리를. 그래서 듣는 겁니다. 예술병 소리를. 제발 부탁이니 취향이니까 존중해주세요. 네?
원문: 마루토스의 사진과 행복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