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는 물질이 ‘범람’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더 이상 당장 한 끼 굶을 걱정을 하지 않는다. ‘먹을 수 있을까’에서, ‘무엇을 먹을까’로 주된 고민거리가 옮겨간 지 오래다. 의식주의 나머지 영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당장 입을 옷이 없어 벌거벗고 다녀야 하는 사람 없고, 매일 텐트 치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은 없다. 단지 더 좋은 옷이냐, 아니냐, 혹은 더 좋은 집이냐, 아니냐의 문제일 뿐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대개 다 아는 불편한 진실이 한 가지 있다. 바로 ‘한국인은 행복하지 않다’는 점이다. 우리 주변의 인식도 그렇고, 각종 정신건강에 관한 국제 통계들이 말하는 바도 그렇다. WHO, OECD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인의 자살률은 여전히 세계 최상위권이다. OECD에서 발표하는 회원국가별 행복지수에서도 최하위를 달리는 것이 곧 우리나라다.
이게 비단 어제오늘의 문제일까. 한국인이 정신적으로 빈곤하고, 별로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무려 십수 년 전부터 계속해서 지적되어 왔던 일이다. 언론에 행복하지 않은 한국인의 자화상이 조명되는 것은 이제 정기 행사와도 같은 일이 되어버렸다.
한국인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뭘까? 그동안 많은 이유들이 제시되었다. 빈부격차, 교육 불평등, 권위주의 문화, 야근 문화, 잦은 회식, 패배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 다수를 위해 소수의 희생을 감수하는 집단이기주의 문화 등등. 심리학자들은 상기 문제들과 더불어, 지극히 심리학자다운 한 가지 중요한 원인을 제시하였다. 바로 한국인들이 지닌 물질주의(Materialism) 가치관이 그것이다.
물질주의란, 단지 물질 그 자체를 적게 소유하고 있느냐, 많이 소유하고 있느냐와는 별개의 문제다. 물질을 인생 중요 가치로 여기고, 물질 추구를 곧 인생의 최대 목표이자 행복으로 여기는 성향이 곧 물질주의다. 따라서 부유하더라도 돈 욕심을 멈출 수 없어 불행한 사람도 있는 반면, 가난하더라도 물질에 욕심이 없어 비교적 행복한 삶을 사는 것도 가능하다.
물질주의 가치관에 물든 사람들은 ‘나는 비싼 집, 차, 옷을 소유한 사람들은 존경한다’, ‘무언가를 구매하는 행위는 내게 많은 행복을 가져다준다’, ‘더 많이 살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 나는 행복해질 것이다’ 등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Richins & Dawson, 1992).
그리고 심리학자들은 그동안 물질주의가 정신건강(mental health)에 미치는 해악에 관한 놀라우리만치 방대한 연구 결과들을 쌓아 왔다. 대표적으로 몇 가지 나열하자면 물질주의는 낮은 주관적 안녕감, 높은 우울감, 높은 불안감과 신경증, 낮은 자존감, 낮은 긍정 정서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물질주의 가치관을 보유한 사람들은 어째서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것인가? 심리학자들은 목표 도달의 문제, 그리고 내적 가치(intrinsic value) 충족의 문제로 대표되는 두 개의 관점을 제시하였다.
첫 번째, 목표 도달의 문제에 입각하면 물질주의가 높은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물질 확보에 대한 목표치를 지나치게 높게 잡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소위 물질주의자들은 그들의 현재 능력과 형편에 맞지 않는 이상적 목표를 가지고 있다.
억만장자가 되어야 한다든지, 빌딩 몇 채는 기본으로 소유해야 한다든지, 평소의 일상은 어느 정도로 호화로워야 한다든지 등등. 그러나 목표를 높게 잡으면 잡을수록, 현실과 목표 사이의 괴리는 커질 수밖에 없고 그로부터 오는 박탈감은 더더욱 심화된다. 그래서 물질주의는 결국 낮은 정신건강 수준을 초래하고 만다.
물질주의를 내적 가치 충족의 문제로 보자면, 그들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물질 추구에만 지나치게 삶을 낭비하느라 정작 행복을 주는 다른 활동들을 할 여유가 남아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물질 추구, 예를 들어 소득 창출은 행복에 긍정적인 기여를 한다.
직선적인 관계냐,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을 따르느냐, 최적의 지점이 존재하느냐의 문제는 여전히 심리학자들 사이에서 논쟁거리이지만 그래도 적어도 일정 소득 구간에 도달하기까지는, 소득 수준과 행복이 정비례함은 비교적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행복을 주는 다른 활동들에 비해 소득 구간을 높이는 행위가 얼마나 투자 대비 효율이 좋은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양질의 책을 읽으며 생각에 잠기거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추억을 쌓거나, 평소 좋아하던 여가 활동을 즐기는 등 개인의 행복 창출에 기여하는 다른 방법들보다 ‘소득 수준 높이기’가 더 우월한 방법이라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정리하자면 물질주의자들은 비효율적인 행복 추구 수단에 매달려 있느라 그들이 원하는 만큼의 행복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물질주의가 정신건강에 끼치는 해악을 막는 방법은 없을까? 물론 가장 근원적인 방법은 물질주의 가치관이 정말 합리적이고 합당한 지에 대해 새삼 되묻는 일이 될 것이다. 물질이 우리 삶에 현재 차지하고 있는 지분은 과연 적정한 수준인지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다.
기왕이면 혼자서 하기보다는 여럿이 하는 것이 더 좋다. 물질주의 가치관에 대한 성토가 늘어나고, 그것이 공론화될 수 있다면 그것만큼 더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해결책도 없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전 사회가 물질에 대한 가치관을 다시 정립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인식의 변화는 항상 더딘 법이다. 인식 변화의 속도는 보통 물질문명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 개인의 인식 수준 변화가 아닌, 국민적인 수준에서의 인식 변화를 노린다면 그 격차는 더더욱 벌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풍족 물질문명을 성숙하게 다스릴 수 있을 만한 인식 수준에의 도달을 위해 우리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시간’이다. 당장 물질주의 가치관의 팽배를 틀어막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물질주의 가치관이 정신건강에 미치는 해악을 최대한 막을 수 있도록 시간을 버는 것은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자, 우리는 지금 현재 물질주의가 정신건강을 낮추도록 만드는 두 가지 이유를 손에 쥐고 있다. 목표와 현실 간의 괴리 때문에, 그리고 내적 가치를 추구할만한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물질주의 가치관에 찌들어 있는 한국인들은 괴롭다. 그렇다면 어떨까. 목표와 현실 간의 괴리를 줄여주면서 내적 가치를 추구의 기회를 늘려 간다면. 그렇다면 물질주의자들의 불행이 지금보다는 더 해소될 수 있지 않을까?
돈을 벌되, 그것을 내적 가치 구입에 써라.
당장 물질주의를 버릴 수 없다면, 일단 하던 대로 열심히 물질을 좇자. 능력을 키우고 기회를 노려 열심히 돈을 벌자. 자신의 평판과 가치를 높이고 경력을 높이자. 물질주의자로서, 높은 물질적 목표를 잡고 있다면 어쨌든 돈을 벌어 현실과 목표 간의 간극을 줄여나가는 것이 곧 정신건강을 덜 해롭게 만들 수 있는 길이다.
한편, 각고의 노력으로 돈을 더 벌 수 있었다면 그것을 쌓아두거나, 또 다른 물질을 사들이는 데 쓰지 말라. 돈을 벌었다면 그것을 차라리 내적 가치를 사는 데 써라. 돈을 벌었다면 좀 휴식 기간도 늘리고, 여가 기간도 늘려라.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시간도 좀 늘리고, 평소 하고 싶었던 취미를 누리는 데에도 돈을 써라.
물질주의자들이 겪는 불행이 내적 가치의 상실로 말미암아 찾아오는 것이라면, 우리는 벌어들인 돈을 곧 내적 가치 충족을 위한 활동에 소비함으로써 물질주의로 말미암은 정신건강의 손실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우리는 물질주의로 말미암은 해악을 막는 일만을 궁리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왜 인간은 물질주의에 취약한가?’, ‘한국인이 드러내는 물질주의 숭배의 본질은 무엇인가?’ 등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경주해야 할 일이다.
물질, 외적 가치(extrinsic value) 대신 다른 어떤 것. 물질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살면서 충분히 누릴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차분히 고민하기 위한 노력들이 필요하다. 심리학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개인적/사회적 물질주의 수준에 영향을 미치는 변인들을 찾으려는 시도들이 꾸준히 제기되어야 할 것이다.
원문: 허용회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