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다
저녁 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피곤한 얼굴로 창밖을 무심히 바라보거나 고개를 숙이고 잠에 빠져든 이들. 가득가득 들어찬 틈바구니에서 우리는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것만 같다. 요동치는 차 안에서 그저 덜컹덜컹 흔들릴 뿐인 우리들.
고된 일과 끝에 퇴근하면서 무심코 전화를 걸어 목소리를 듣고 싶다. 그 사람은 연인이 될 수도 있고 엄마 그리고 아빠가 될 수도 있다. 나를 소중하게 생각해주고,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 말이다. 우리가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낄 때, 다가와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비로소 우리는 웃을 수 있지 않던가.
누구든지 살아가면서 특별한 사람을 필요로 한다.
단순히 나만 좋고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특별하게 여기는 예외적인 존재들이 필요하다. 그런 관계들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그리고 외롭지 않을 수 있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관계가 좋지만은 않다.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서로의 특별함을 의심한다. 우리는 항상 상대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기대하길 마련이고, 서로 천착하여 감정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기대는 너무도 쉽게 부서지고 만다. 덕분에 우리는 아주 사소한 부분부터 자주 배반 당한다. 생각해보면 웃긴 일이다. 결국 나의 애착이 배신감을 만든 것이지 않던가.
망가진 애정은 웃어 넘기기엔 너무 뼈아프다. 그리고 이런 일은 우리 삶의 전반에 걸쳐 일어난다. 지금까지 잘 견뎌왔다고 해서 앞으로도 전혀 그런 아픔을 겪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자신도 없다. 그럼 우리는 언제까지 항상 상처 받고 상처 입히며 살게 되는걸까.
사랑도 받아 본 사람이 베푼다
영화 <굿 윌 헌팅>에 나오는 맷 데이먼이 맡은 주인공 윌 헌팅은 굉장히 비상한 지능을 가진 천재다. 하지만 불우한 환경으로 인해 제대로 된 교육과정을 거치지도 못했고, 괴팍한 성격을 가지게 된다.
자신이 가진 재능은 수학이지만, 실제로는 청소부와 같은 영 다른 길을 걷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대학교 게시판에 걸린 수학 문제를 몰래 풀어내는 등, 여전히 인정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
월 헌팅은 어릴 적 충분히 보답받지 못한 자신의 심정적 기대, 애정 어린 관계들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있지만, 그걸 제대로 풀어내지 못하는 전형적인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구원이 되어주는 사람이 바로 숀 맥과이어(로빈 윌리엄스 분)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방어기제에 질려 포기한 윌 헌팅의 재능을 피우기 위해 숀이 선택한 방법은, 윌이 계속해서 가지고 있는 애착에 대한 공포를 해소해주는 것이었다.
자기를 위해주는 주변인들과 그들의 기대를 밀쳐내고 또 밀쳐내는 윌에게 숀은 자신이 그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으며, 또 어떻게 그게 가능하다고 믿는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그의 주변에서 계속해서 그 믿음을 각인시킨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숀 맥과이어가 없다. 대신 강요와 협상으로 아이와 위태로운 관계를 이어나가는 부모들, 그리고 그 부모들에게서 상처받아 벽을 쌓아 올리는 아이들이 있을 뿐이다. 이런 과정에서의 애착 손상은 일종의 트라우마가 되었다. 그리고 이 상처는 우리가 나이가 들고 닳아서 연마되어 겪는 일들보다 더 치명적이고, 길게 남는다.
똑똑한 애정결핍자들이 겪는 흔한 고민들
한동안 우리 사회는 정서적인 부분을 등한시하고 물질만을 추구했다. 부모들은 그들의 자식들이 정서적으로 건강한 사람으로 자라는 것을 추구하기보다, 오직 얼마나 부유해질 수 있는가를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해왔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똑똑한 애정 결핍자’로 자라났다.
나 역시 그렇게 자라왔다. 이런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를 곁에서 지켜보며 성장의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면, 과연 나는 잘 해낼 수 있을까? 부모세대와는 달리 내 아이는 부디 나보다 조금 더 일찍, 그리고 조금 더 건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지만 그런 것을 경험하지 못한 나는 언제나 주춤거릴 뿐이다.
그런 막연함의 가운데에서, 책에서 마음에 드는 문구를 발견했다. “애착의 핵심은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 달려 와주고 내 편이 되어 줄 거라는 믿음과 기대”라는 그 말은 막연함 속에서 하나의 등불과도 같았다. 이 문장이야말로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고 특별하게 여기는 원리이지 않던가.
책 『정서적 흙수저와 정서적 금수저』는 그 밖에도 내가 한동안 고민하고 있던 것들을 조용히 위로한다. 특히 이 책은 현재 부모 세대의 ‘아이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좋은 부모’ 로서의 인식이 경제적인 부분에 치중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결국, 불균형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만의 안전 기지이다. 정말로 물리적인 장소 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니라, 언제든 그 품 안으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나를 사랑하고, 나에게 애착을 가져주고,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사람 말이다.
용기를 가지고, 서로를 사랑하며 위안하라
어린아이에게는 오직 가족만이 유일한 세계이다. 역으로 말해 우리가 아이였을 때, 누군가에게 애착을 갖고, 나 또한 애착을 받으며 서로의 애정에 기대어 살아왔다면, 지금의 우리는 보다 건강한 애정 관계를 가지고 행복해질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 시기를 놓쳐버린 우리는 어쩌면 좋을까? 뒤늦지만, 때로는 상처 입히고 때로는 상처 입으며, 그렇게 건강한 애착이란 무엇인가를 배워 나가야만 한다. 물론 그 상처가 건강한 애착 관계를 부여하기 전에 당신을 끝장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계속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과 조언을 구하자. 그런 것들이 모여야만 결과 지상주의의 이 사회도 ‘애착 사회’로 비로소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나 또한 누군가의 부모가 될 것이며, 그 이전에 누군가의 배우자가 될 것이다. 종종 그런 관계들을 내가 잘 해나갈 수 있을지, 특히나 내 아이가 나를 보면서 어떻게 성장해나갈지 덜컥 겁부터 나는 게 사실이다.
때가 되면, 이 책에서 읽은 것들이 조금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애착이란 비록 겁이 나고 잘못되기 쉬워만 보이지만, 조금씩 우리가 노력하고 서로의 경험을 곱씹어 본다면 조금이나마 능숙하게 흉내를 낼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소설가 김영하의 단편 소설 『당신의 나무』에서는 관계를 앙코르와트 사원의 부서져 돌무더기가 된 불상과 이를 무너지지 않게 붙들고 있는 거대한 나무에 비유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조금씩 부수어 가더라도 붙들어 무너지지 않게 해줄 존재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조금 늦었을지 몰라도, 용기를 가지고서 그 존재를 찾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