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예능PD가 대세다. MBC 〈무한도전〉에 김태호 PD가 있다면, KBS 〈1박2일〉에 나영석 PD가 있었다. 그는 2013년에 돌연 KBS에 사표를 던지고 CJ E&M으로 이직했다. 〈꽃보다 할배〉라는 프로그램을 시작으로 〈신혼일기〉 〈윤식당〉 〈알쓸신잡〉 등 프로그램을 연이어 흥행시키며 스타 PD가 됐다.
10월 30일, 쌀쌀한 날씨에도 혜화동 대학로에 있는 세명대 민송아트홀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나영석 PD의 특강을 듣기 위해 각지에서 PD 지망생들이 왔다. 나 PD는 “현업에서 어떻게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어떤 방식으로 제작하는지 또 그 과정에서 어떤 목표를 이뤘고 이루지 못했는지 프로그램 이면의 이야기를 들려 주겠다”며 강연을 시작했다.
제가 KBS에 있을 당시 PD들끼리 만나면 하는 이야기가 ‘방송국 곧 망한다’였어요. KBS와 MBC가 제일 빨리 망할 것이라는 게 PD들 생각이었죠. 무한경쟁 시대로 가고 있고, 시장이 인터넷 쪽으로 빠르게 넘어가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에요.
저도 흐름을 잘 읽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지상파에서 케이블TV로 옮겨갔지만 기술 발전이나 시대 흐름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빨리 진행되고 있었어요. 그때 이미 〈유튜브〉나 〈아프리카TV〉 같은 플랫폼이 나오고 〈네이버〉에서 처음으로 동영상 서비스를 시작할 때였어요.
TV의 시대는 끝났다
처음에 〈신서유기〉를 만들면서 몇 가지 목표가 있었어요. 첫째는 인터넷 플랫폼 실험, 둘째는 중국 시장 진출이었어요. 프로그램 제목이 〈신서유기〉인 이유가 거기 있죠.
나 PD는 “〈신서유기〉 프로그램의 꿈은 거창했지만 결과로 보면 목표는 이루지 못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인터넷 시장은 방송에 견주어 시장 규모가 작고, 한국 예능은 중국 시장에서 한국 드라마와 비교했을 때 영향력이 작았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그는 “실패한 것은 아니다”고 덧붙였다. 한국에서 〈신서유기〉의 B급 감성이 인터넷 세대인 젊은 사용자들의 공감을 얻어 흥행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프로그램의 가치는 시청자가 알아봐 주기 때문에 생겨난 거예요. 아무리 만드는 사람이 곧고 높은 이상을 가지고 있어도 그걸 시청자들이 알아봐 주지 못하면 그 프로그램은 사실상 의미 없는 프로그램이 돼버려요. 〈신서유기〉 또한 우리가 놓쳤던 가치를 시청자들이 알아봐 줬기에 시즌을 이어갈 수 있었어요.
나 PD는 “더 이상 토요일을 기다려서 〈무한도전〉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시청자가 보고 싶을 때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서 보는 시대가 됐다”며 “콘텐츠 소비가 TV 편성에 따라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수용자가 콘텐츠를 선택해 소비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 흐름이나 변화와 달리 아직 TV 방송국은 굳건하다. 나 PD는 “거대자본을 가진 방송국이 죽을 각오로 막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지상파나 케이블TV도 인터넷 플랫폼을 개척하고 있으며, 기존 플랫폼이 사라지는 시대에 대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뻔한 것을 뒤집고, 새로운 것끼리 충돌
시골에서 누군가 밥을 해 먹고 살아야 한다면 누가 가야 할까요? 농부? 아니면 김병만?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시골 생활을 전혀 즐기고 싶지 않는 사람이 어느 날 시골에 뚝 떨어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거기서 재미를 찾았죠.
나 PD는 자신만의 예능 형식을 ‘뻔한 것을 뒤집어 보고, 새로운 것끼리 충돌시켜 발생하는 에피소드를 재미로 승화시킨 것‘이라고 표현했다.
근데 이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거예요. 새로운 것끼리 부딪혀서 재미를 내는데 그 재미가 시청자가 받아들일 때 굉장히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어야 된다는 거예요.
프로그램을 만들 때 시청자가 어떤 식으로 받아들일지 고민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시청자가 선한 마음으로 받아들일지, 비판적인 마음으로 받아들일지는 PD의 역할에 달렸기 때문이다.
그는 “시청자가 방송을 보면서 마음이 정화되길 원하지, 마음이 나빠지길 원하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다만 “목적이 수단을 넘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예능으로서 재미와 프로파간다(선전)는 한 끝 차이라는 것이다.
시청자들이 삼시세끼를 볼 때 재밌어서 보는가, 마음이 따뜻해져서 보는가를 따져보면 재밌어서가 1번이에요. 따뜻해서가 2번이고요. 이런 충돌을 통해서 이끌어낸 콘텐츠 자체, 그 결과치가 재밌어야 비로소 선한 마음이 생겨요.
재미가 없으면 일단 보지 않기 때문에 선한 메시지를 전달할 여력도 없어요.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여러분이 생각해야 할 것은 과연 사람들이 볼 것인가, 재미를 느낄 것인가 고민하는 것이 1번이고, 그렇게 해서 기획한 프로가 결과적으로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하는 건 2번, 여러분 몫인 거예요.
기획 의도와 목표에 얽매이지 않아야
저는 스튜디오 촬영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건 PD들만의 스타일이기도 한데 저는 주로 야외에서 촬영해요. 여기서 일어나는 변수는 제 방송에서 굉장히 중요한 소재가 돼요.
그동안 제가 생각한 대로 흘러간 녹화가 잘된 경우는 한 번도 없었어요. 시청자가 늘 사랑했던 건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었어요.
나 PD는 〈1박2일〉을 기획하던 시절, 작가들과 제일 많이 나눈 얘기가 ‘절반만 기획하자’였다. 나머지 절반은 여백을 두고 출연자가 채우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는 “어떤 대본보다 재밌는 건 현장에서 일어나는 돌발 상황”이라며 “아무리 뛰어난 PD와 작가도 쓸 수 없는 내용“이라고 말했다. 스튜디오 촬영은 갑자기 비가 내릴 일도, 어디서 소가 뛰어올 일도 없다. 새롭거나 특별한 일이 나타날 여지가 없다는 것이 나 PD 주장이다. 그러나 “촬영방식에 진리는 없다”고 조언하며 “PD들의 스타일에 따라 그 결과는 다르다“고 덧붙였다.
프로그램이란 게 오늘 촬영을 시작하면 그때부터 PD나 작가의 손을 반은 떠난 거예요. 자기가 생명을 얻어서 어디론가 굴러가요. 우리는 그것에 방향을 살짝살짝 틀어줄 뿐 어딘가로 끌고 갈 수는 없어요.
나 PD는 “기획 의도와 목표에 얽매이지 않아야 최선의 결과를 낼 수 있다”며 유연한 태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프로그램이 내 기획대로 안 됐다고 그게 실패라고 단정 지어서는 안 돼요. 처음 의도는 그랬을지언정 촬영하면 생각했던 것과 또 다르고, 편집하면 또 다르다는 거죠. 그때그때 늘 제로 세팅의 마인드로 바라봐야 해요. 과연 지금 상태에서 어느 부분이 방송에 내기 좋은 것인가, 사람들이 좋아할 부분인가를 고민해야 해요. 목표는 늘 시도 때도 없이 실패하고, 시도 때도 없이 수정되는 게 맞아요. 수정하는 이유는 늘 더 나은 결과를 만들기 위해서죠.
“방송 트렌드는 1~2년 늦다”
사람들이 ‘트렌드’라는 말을 해요. 지금 어느 게 트렌드니깐 이걸 해야 해. 근데 과연 트렌드인 소재를 사용하면 그건 성공하는가? 사실 실패할 가능성이 높아요. 제가 ‘팟캐스트’라는 장르를 처음 들었을 때가 2년 전이에요. 근데 그때 (팟캐스트에서 영향을 받은) 프로그램을 만들지 않고 지금 〈알쓸신잡〉을 만든 게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예요.
〈알쓸신잡〉은 팟캐스트 프로그램 중 하나인 ‘지대넓얇’(지적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에서 영향을 받았다. 2년 전 처음 나온 팟캐스트는 트렌드를 앞서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실명 비판과 거리낌 없는 뒷얘기로 회자됐다.
그러나 나 PD는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경험적으로 시기가 이르다고 판단했다. 방송국에서 트렌드는 1~2년 정도 늦게 오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집회와 대선으로 정치의 계절이 오자 팟캐스트를 듣는 청취자가 대폭 늘었다.
우연히 〈어쩌다 어른〉의 설민석 편을 봤어요. 그 당시 1%도 안 되는 시청률이 설민석 강사의 등장으로 8%가 됐어요. 제가 크게 느꼈던 것 중 하나는 좋은 콘텐츠는 시청자가 알아서 찾아본다는 것, 또 하나는 정보를 즐겁게 전달해주면 사람들이 예능 보듯이 즐겁게 소비한다는 거였어요. 정보가 더 이상 예전처럼 딱딱한 콘텐츠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죠.
현재 〈알쓸신잡〉은 인기 프로그램이 됐지만 한편에서는 소위 ‘40, 50대 서울대 출신 남성만이 인문학을 얘기할 수 있나’라는 출연진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나 PD는 “〈신서유기〉나 다른 프로그램을 만들 때 여성 출연진이 없는 것처럼 〈알쓸신잡〉도 똑같은 기준에서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여성을 일부러 배제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토로했다. 또한 “여성을 출연시켜야 한다면 여성 출연자만으로 이뤄진 시리즈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한 우물만 파는 PD가 대세
옛날에는 지금보다 장르 안에서 이동이 쉬웠어요. 뛰어난 PD는 이 장르도 했다가 저 장르도 했다가 하는 분들도 있었어요. 제가 KBS에 있을 때 김석윤 PD라는 분이 계셨는데 〈해피 선데이〉 〈개그 콘서트〉 〈뮤직뱅크〉를 잇달아 연출하면서 최고의 위치에 올려놓더니, 좀 있다가는 드라마를 최고의 위치에 올려놓고, 지금은 영화도 만드세요. 대단하죠. 다재다능하고. 근데 지금은 이렇게 장르를 종횡무진하는 PD가 나올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에요. 아마 그분이 제가 볼 때 마지막 세대가 아닌가 싶어요.
요즘 방송업계에서 PD는 한 장르의 전문가가 되는 것이 추세다. 공개코미디, 음악방송, 리얼리티쇼, 서바이벌 경연 프로그램 등 다양한 장르 중에서 자신이 잘하는 분야 프로그램을 계속 연출하는 것이다.
나 PD는 “저도 〈쇼미더머니〉를 즐겨 봤지만 감히 ‘다음에는 저런 프로그램을 만들어 봐야지’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며 “요즘 장르는 마치 한 대학의 전공처럼 장르별로 특화되고 축적된 노하우가 깊어서 아무나 진입해 성공시킬 만큼 호락호락한 상황이 아니다”라고 털어놓았다.
“비장의 무기는 아껴둬라”
그는 PD를 지망하는 이들을 향해 현실적인 조언을 건넸다. 자신이 신입사원이거나 방송사 시험을 보는 PD 지망생이라면 〈삼시세끼〉같은 아이디어는 내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나 PD는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프로그램이 있다면 그 기획안을 적절한 때가 올 때까지 아껴두라“고 일렀다. 일단 좋은 선배들을 보며 그 발자취를 밟아 나가고, 동료와 선배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게 열심히 일해 기회를 엿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가 비로소 자신이 아껴둔 기획안을 펼쳐 보일 때다.
나 PD는 자신도 그런 기회를 기다렸고, 〈1박2일〉이 바로 그 기회를 잡아 선보인 프로그램이었다고 말했다.
한번 세상 밖으로 나온 아이템은 주워 담을 수 없어요. 내가 어떤 걸 냈는데 회사에서 반대하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별로인데’라는 반응을 얻으면 두 번은 못 내요. 끝난 거예요. 한번 세상에 나온 아이디어는 이미 그걸로 생기를 잃기 때문에 되느냐, 안 되느냐 둘 중 하나예요.
여러분은 각자 하고 싶은 게 있다면 가슴 속에 잘 두었다가 그것을 꺼내서 할 수 있는 시기가 언제인지 잘 보도록 하세요.
원문: 단비뉴스 / 필자: 김미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