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작가가 『칼의 노래』 첫 문장을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고 쓸지 ‘버려진 섬마다 꽃은 피었다’고 쓸지 몇 달을 고민했다고 말한 적이 있죠? 두 문장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는 자연적 사실을 얘기한 것이고, ‘버려진 섬마다 꽃은 피었다’는 ‘이 와중에 꽃이 피다니!’라는 감정적 판단을 넣은 표현이죠. 고민 끝에 한 문장을 쓰면 그 문장은 다른 문장으로 대체될 수 없습니다.”
문학평론가인 신형철 조선대 교수는 글쓰기의 근원적인 욕망 중 하나는 ‘정확해지고 싶다’는 욕망이라고 말했다. 훌륭한 작가들은 정확한 문장을 쓴다. 정확한 문장은 문법적으로 틀린 데가 없는 문장을 말하는 게 아니다. 말하고자 하는 바의 본질, 작가의 인식에 적중했기 때문에 대체될 수 없는 문장을 말한다.
신 교수는 “삶의 진실은 수학적 진리와 달라서 백 퍼센트 정확한 문장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문학은 ‘근사치’로만 존재한다. ‘근사(近似)’는 ‘꽤 비슷한 상태’를 가리킨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정확히 말하는 것. 이것이 바로 문학이 출발하는 지점이다. 말하자면 문학은, 작가의 생각과 감정을 정확하게 말하기 위한 노력이다.
정확하게 표현한 글은 어떤 글일까? 신 교수는 자신의 글쓰기 준칙 세 가지를 소개했다. 글을 정확하게 쓰려면 인식을 생산해내고, 대체할 수 없는 정확한 문장을 쓰고, 문장을 건축적으로 배치해야 한다고 신 교수는 전했다.
‘슬픔’을 인식하는 네 가지 해석
신 교수는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쓴 『역사』의 한 이야기와 독일 평론가 발터 벤야민이 『이야기꾼과 소설가』에서 소개한 이 이야기의 여러 해석을 들려줬다. 신 교수는 각각의 해석에 어떤 인식이 담겨 있는지 살펴봤다. 발터 벤야민이 해석한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이집트 왕이 페르시아에 패해서 붙잡혔을 때 페르시아 왕은 포로가 된 이집트 왕에게 모욕을 주고자 했다. 그는 승리한 페르시아의 개선행렬이 지나가는 거리에 이집트 왕을 세워둘 것을 명령했다. 그의 딸인 공주가 하녀가 되어 물동이를 지고 우물로 가는 모습을 지켜보게 했다. 모든 이집트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고 슬퍼했지만, 이집트 왕은 눈을 땅 위로 떨어뜨리고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서 있었다. 다음에는 그의 아들이 처형당하기 위해 행렬 속에서 끌려가는 것을 보게 했다. 이번에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나 뒤이어 왕의 하인인 늙고 불쌍한 남자가 포로 행렬에 섞여 있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이집트 왕은 손으로 머리를 치면서 가장 깊은 슬픔을 나타냈다.
벤야민은 이 이야기에 대한 프랑스 철학자 미셸 드 몽테뉴, 독일 출신 프랑스 작가 프란츠 헤셀, 벤야민의 연인인 아샤 라치스, 그리고 자신의 해석을 책에 제시했다. 몽테뉴는 ‘왕은 이미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조금만 그 양이 늘어도 댐이 무너질 판이었다’고 했다. 왕이 딸과 아들을 보고 슬프지 않았던 게 아니라, 슬픔을 꾹꾹 누르고 있었는데 하인을 보는 순간 감정이 툭 터져 나와버렸다는 것이다.
헤셀은 왕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그 왕에 속한 가족들의 운명이 아니라고 해석했다. 가족의 운명은 왕 자신의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가족 같은 공동운명체보다 자신의 책임을 상기하는 사람에게서 슬픔이라는 감정이 더 강화된다는 인식이 들어있다. 이집트 왕이 전쟁에서 졌으니 가족이 어려움을 겪는 것은 당연하지만, 하인은 왕으로서 무능을 보여주는 존재이므로 자괴감과 죄의식이 더 크게 다가온다는 의미다.
라치스는 ‘실제의 삶에서는 우리를 감동시키지 않는 것이 무대 위에서는 감동시키는 것이 많다’며 이 하인은 왕에게 단지 그러한 배우였을 뿐이라고 해석했다. 거리가 있는 사람에게 감정이 더 활성화한다. ‘슬픔은 거리가 있을 때 더 강화될 수 있다’는 인식이 담긴 해석이다.
마지막으로 벤야민은 ‘거대한 고통은 정체되어 있다가 이완의 순간에 터져 나오는데 하인을 본 순간이 바로 그 이완의 순간’이라고 말한다. 긴장이 강할 때는 눈물이 나올 겨를이 없다. 긴장이 풀어질 때 감정이 터져 나온다. 왕이 하인을 보는 순간 긴장이 풀어졌고 그래서 슬픔을 드러냈다는 해석이다.
신 교수는 벤야민의 책이 인식의 생산 과정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말했다. 각각의 해석에 슬픔이라는 감정의 본질은 무엇인가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작가가 고민 끝에 자신만의 인식을 생산해냈을 때야 비로소 글을 쓸 수 있다고 신 교수는 전했다.
어떤 말로도 교체될 수 없는 ‘정확한 문장’
아포리즘(aphorism)은 진리를 간결하고 압축적으로 나타낸 짧은 글이다.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통찰과 인식을 적중시키는 것을 뜻하는 이 말은 ‘촌철살인’이라고도 불린다. 신 교수는 아포리즘의 대가 오스카 와일드를 소개하며 정확한 문장의 여러 사례를 제시했다.
“‘삶에는 두 가지 비극이 있다. 첫째는 내가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는 것이고, 둘째는 내가 원하는 것을 갖는 것이다’라고 했어요. 첫 번째는 아주 공감할 수 있죠. 그런데 오스카 와일드는 내가 원하는 걸 갖는 것도 비극이라고 해요. 갖지 못한 상태가 그것에 대한 욕망이 가장 큰 상태기 때문이죠. 가지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내 욕망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외에도 그는 ‘항상 적을 용서해라. 그것만큼 적을 짜증 나게 하는 것은 없다’, ‘유혹을 제거하는 방법은 유혹에 굴복하는 것이다’, ‘사람이 철저히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는 것은 예외 없이 가장 고결한 목적이 있을 때다’ 등 오스카 와일드의 아포리즘을 해석했다.
신 교수는 “이 문장 속에 담긴 생각은 이 문장으로만 표현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글쓴이의 생각을 온전히 담고 있는 문장을 다른 말로 바꿔 쓴다면 이 뜻이 희석된다고 보는 것이다.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가장 정확하게 실어 나르는 문장은 하나뿐이다. 그런 문장은 한 번 쓰이면 어떤 문장으로도 대체될 수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러나 문장은 짧을수록 좋은 것만은 아니다. 정확해지기 위해 긴 문장이 필요할 때가 있다. 자신의 감정을 정확한 언어로 전달하기 위해서다. 신 교수는 그 예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과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예로 들었다.
그는 “시와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는 동기는 정확하게 말하고 싶어서”라고 짚는다. 우리가 평소에 하는 말들은 늘 어딘가 넘치거나 모자라는, 정확하지 않은 말이다. 말해놓고 뒤돌아서 ‘아, 이게 아닌데’라고 생각하는 건 흔한 일이다. 신 교수는 “그때 ‘차라리 글을 쓰자, 정확한 내 마음을 표현해 보자’라고 쓰는 것이 문학의 출발”이라고 강조한다.
“시나 소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죠. 자기감정을 표현하는 것도 중요하고, 타인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싶다는 것도 중요한 문장의 표현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정확하다’는 것은 ‘삶의 문제’이기도
사람이 정말 말을 잘 하고 싶다고 생각할 때는 언제일까? 신 교수는 ‘위로’를 답으로 꼽는다. 잘못 나온 말은 실수를 낳아 의도와는 달리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다. 그는 위로의 가장 좋은 방법은 ‘말없이 안아주는 것’이라며 2001년 미국 뉴욕에서 일어난 911테러의 사망자 유가족을 뉴욕양키스 야구팀이 위로한 일화를 사례로 들었다.
“뉴욕에서 쌍둥이 빌딩이 (테러로) 무너졌잖아요. 그때 뉴욕 양키스 야구팀이 경기가 끝나고 유족이 모여 있는 장소에 가서 위로해주기로 했어요. 뉴욕 연고지 팀이니까. 그래서 유가족들이 쭉 있고 야구선수들이 서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거죠. 그중 한 명이 앞으로 걸어가서 유족 한 명을 마주 보며 ‘저는 솔직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만 당신을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며 그냥 안아요. 더 이상의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어요. 그래서 유가족은 야구선수의 품에 안겨서 울기 시작했죠. 옆에 있던 선수들이 자기 앞에 있던 유족들을 걸어가서 안아줬어요. 이런 경우는 말이 필요 없죠. 근데 항상 이럴 수는 없어요. (위로의) 말이 필요할 때가 있어요.”
신 교수는 “상처를 받거나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은 세상에 대한 불신이 가득한 사람이다”고 지적한다. 선의로 건넨 말이라도 그들에게는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을 수 있다. 그 때문에 “위로의 말은 무책임해선 안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신 교수는 “여러분 주변의 유족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해보자”며 론 마라스코와 브라이언 셔프의 책 『슬픔의 위안』에 나온 질문을 학생들에게 던졌다.
“(1번처럼) ‘걱정 말아요. 괜찮을 거예요’는 무책임한 말이죠. 어떻게 알아요, 괜찮아질지. ‘시간이 약이야. 토닥토닥.’ 이것도 마찬가집니다. ‘그녀는 더 좋은 곳으로 갔을 거예요.’ 이것도 말하는 사람은 좋은 뜻으로 하는 말이지만, 책의 저자들이 보기는 그리 좋은 말은 아니라고 합니다. 근데 2번은 무책임한 말이 아닙니다. 공감해주는 말이죠. 이런 말은 위로가 됩니다. 4번은 지킬 수 있는 약속이죠. 잘 때 휴대폰 들고 있을 수 있잖아요.”
그는 “살면서 이런 게(말하는 게) 잘 안되니까 글을 쓰는 것”이라고 말한다. 글은 수 없는 퇴고를 거치며 내용을 수정할 수 있다. 실수를 주워 담아 정확한 문장으로 글쓴이의 감정과 생각을 오해 없이 분명하게 전달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신 교수는 “그래서 글쓰기가 사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덧붙였다.
“글 속에서는 내가 무책임하고 부정확하고 예의 없고 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남모르게 드러내고, 이런 경우가 있더라도 고칠 수 있어서 괜찮아요. 근데 삶을 다시 살 수는 없잖아요. 말은 그렇지 않잖아요. 그래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보기 좋은 글이 논리도 좋다
마지막으로 신 교수는 글의 건축적 배치에 대해 강조했다. 그가 학생들에게 나눠준 글에는 단락의 분량이 같은 공통점이 있다. 처음에는 보기 좋아서 시작된 단락 길이를 맞추는 버릇은 글의 완성도를 높이는 의외의 효과를 낸다. 글의 양을 조절하면서 형식적 아름다움뿐 아니라 논리적 완성도도 갖출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첫 단락에서 열 줄을 썼는데 두 번째 단락에서 열한 줄이면 한 줄을 줄이기 위해서 퇴고를 합니다. 다시 보면 꼭 쓸데없이 늘여 쓴 말들이 있어요. 마찬가지로 어떤 단락은 여덟 줄밖에 안 된다면 설명에 부족한 부분이 없는지 들여다봅니다. 기사 역시 이런 식으로 나름대로 건축적 배치를 갖춰나가면 완성도를 높일 수 있을 겁니다.”
성숙한 글을 만드는 ‘3R’ 습관
글을 잘 쓰기 위해 다른 사람의 책이나 영화를 보고 영향을 받고 자신만의 인식으로 소화하는 게 어렵다는 한 학생의 질문에 신 교수는 ‘3R’ 방식을 추천했다. ‘3R’은 ‘Rereading, Reference, Reflection’으로 반복해 읽고, 참고해 읽고, 성찰하며 읽는 것을 뜻한다.
한 번 읽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복해 읽는 것(Rereading)이 3R의 기본이다. 다음으로 해야 할 것은 하나만 읽지 않고 한 가지 글에서 출발해 다른 참고문헌(Reference)으로 확장해 읽는 것이다. 남들이 읽은 만큼만 읽으면, 똑같은 생각에 머무를 수 있다. 끝으로 성숙한 인식을 생산하는 결정타는 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으로 가져와 자기 체험과 만나는 성찰(Reflection)이다.
마지막으로 언론인을 지망하는 학생들에게 신 교수는 저널리스트 역시 자신의 성격이 드러나는 글을 쓸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기자 지망생에게도 글쓰기는 집짓기와 같다. 인식의 생산, 정확한 문장, 건축적 배치가 이뤄져야 한다. 신 교수는 고종석, 김훈의 기사와 같은 기자 개인의 정체성이 담긴 글을 보고 많이 배웠다며 사례로 들었다.
원문: 단비뉴스 / 필자: 민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