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2일 오후 1시 30분쯤 서울 용산구 서울역 앞 광장. 유모차를 끌거나 유치원생, 초등학생 아이 손을 잡고 온 30~40대 여성 등 60여 명이 돗자리를 펴고 삼삼오오 모여 앉았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20대 남녀 대여섯과 가족을 따라 나온 30~40대 아빠들도 몇 명 섞여 있다.
손에 손에 ‘미세먼지 측정과 예보의 정확성을 개선하라’, ‘교육기관 공조시스템 설치’, ‘국내 화력발전소 추가건설 철회하라’ 등이 적힌 파란 손팻말을 들었다. 회원 수 6만 7천여 명인 네이버 카페 ‘미세먼지 대책을 촉구합니다(미대촉)’의 5차 집회가 열리는 현장이었다.
파란색 대신 회색 하늘 그리는 유치원생
“그저 아이들이 파란 하늘을 보며 뛰어 놀 수 있게 되면 좋겠습니다.”
토요일이라 남편과 함께 나왔다는 주부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발언을 마치자 공감과 격려의 박수가 터졌다. 춘천에서 왔다는 여성 회원은 발언을 끝내며 “중국발 미세먼지를 해결하라” 등의 구호를 선창했다.
참석자들은 주먹 쥔 손, 혹은 손팻말을 들어 올리며 구호를 따라 외쳤다. 초등학생 몇몇도 목청을 보탰다. 지난해 9월 열린 2차 집회부터 매번 미대촉 행사에 참여해왔다는 주부 김선주(35·서울 마포구 망원동)씨는 이날 8살 아들과 함께 왔다.
김 씨는 지난해 아이가 갑자기 앓게 되면서 미세먼지의 위험성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가족 중에 담배 피우는 사람도 없고 공해가 특별히 심하지 않은 지역에 사는데도, 건강하던 아이가 어느 날 심한 기침과 함께 가래를 뱉어내기 시작했다. 특히 집 밖에 나갔다 들어왔을 때 가래를 뱉고 토하는 증세가 심해졌다.
“폐렴으로 병원에 일주일간 입원했어요. 항생제도 두 달이나 먹을 정도로 심했어요. 기침이 너무 심했고, 가래 뱉고 토하느라 밤에 잠을 못 잘 정도였어요. 그때는 맞벌이를 했는데, 다음날 회사 출근해야 하는데도 서서 아이를 안고 재워야 할 만큼 심했어요.”
김씨가 집안에 공기청정기를 설치하고, 아들이 외출할 땐 꼭 마스크를 씌우는 등의 주의를 기울이자 기침과 폐렴 증상이 사라졌다. 그래서 김씨는 미세먼지가 아이의 건강에 직접적인 위협이 된다고 믿고 있다.
유치원 교사 유은혜(34・여)씨는 아이들을 가르치다 걱정이 늘어 이날 처음 집회에 나왔다고 했다. 유 씨는 “아이들이 블록놀이를 할 때면 꼭 공기청정기를 만들고, 그림을 그릴 때 하늘을 푸른색이 아니라 어두운 색상으로 표현한다”고 말했다.
한국 ‘초미세먼지 노출도’ OECD 회원국 1위
미국 예일대학교와 콜롬비아대학교가 매 2년마다 각국 환경오염 현황 등을 평가해 작성하는 EPI (환경성과지수)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대기 질 수준은 180개국 중 173등이었다. 중국이 179위였고, 방글라데시가 꼴찌였다. 우리나라는 지름 2.5마이크로미터(㎛) 이하의 입자상물질인 피엠(PM)2.5, 즉 초미세먼지 농도가 세계보건기구(WHO)의 대기 질 기준을 초과한 날이 많은 것으로 지적됐다.
입자상물질이란 공중에 떠 있을 만큼 작고 가벼운 고체와 액체가 합쳐진 것인데, 각국은 이 중 인체에 흡입될 수 있는 지름 10마이크로미터(㎛) 이하 입자상물질(PM10)부터 주요 대기오염 물질로 분류해 관리한다.
환경부에 따르면 2015년 우리나라 주요 도시의 연평균 미세먼지(PM10) 농도는 서울이 46입방미터당마이크로그램(㎍/m³), 부산 49㎍/m³, 인천52㎍/m³ 등으로 선진국 주요 도시에 비해 5~30㎍/m³가까이 높다. 같은 해 연평균 초미세먼지(PM2.5) 농도는 서울 23㎍/m³, 인천 29㎍/m³, 대전 28㎍/m³ 등으로 WHO 권고기준치인 10㎍/m³를 두 배 이상 웃돌았다.
지난 9월 17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2015년 초미세먼지 노출도 조사에서도 한국은 32㎍/m³으로 35개 회원국 가운데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초미세먼지 노출도는 각국의 연평균 PM2.5 농도에 인구분포를 가중 계산한 값이다. OECD 국가 평균 초미세먼지 노출도는 14.5㎍/m³로 우리나라의 절반 수준이었다. 1998년부터 17번 실시된 이 조사에서 한국은 12차례나 1위를 차지했다.
대기오염 주범은 석유•석탄 등 화석연료
전문가들에 따르면 입자가 큰 미세먼지는 주로 공장, 자동차, 비행기, 선박, 건설기계 등의 연료를 태우는 과정에서 공기 중으로 직접 배출된다. 석탄화력발전소도 주요 배출원이다. 반면 초미세먼지는 공기 중으로 배출된 특정 화학물질들이 서로 화학작용을 일으켜 만들어지는 2차 생성 비중이 높다.
대기 중 화학작용으로 초미세먼지를 만들어 내는 물질은 석탄, 경유, 중유 등을 태울 때 발생하는 이산화황(SO2)과 질소산화물(NOx), 각종 유기용제와 석유정제 및 석유화학제품 제조시설에서 배출되는 휘발성유기화합물(VOCs) 등이 있다.
자동차, 조선, 석유화학, 건설 등 주력산업에서 석유 소비가 많고, 발전소 중 아직도 석탄을 태우는 곳이 많으며, 값싼 산업용 전기료 탓에 에너지 낭비가 심한 우리 현실이 세계 최고수준의 미세먼지, 대기오염이라는 ‘부메랑’을 낳은 셈이다.
이런 대기오염물질이 정확히 어디서 가장 많이 나오는지 측정하는 문제는 쉽지 않다. 한미공동의 대기 질 연구에 참여했던 민경은(39) 광주과학기술원 환경공학부 교수는 초미세먼지의 재료가 되는 휘발성유기화합물질(VOCs)이 특정오염원에서 얼마나 배출되는지 항공기에서 관측한 결과가 우리 정부의 대기오염물질 배출량 집계(CAPSS)보다 훨씬 높게 나왔다고 말했다.
민 교수는 “굴뚝에 대기오염물질 측정기가 설치되어 있어도 어느 파이프에 구멍이라도 뚫리면 다 새기 때문에 이런 누출을 잡아내려면 규칙적으로 에어크래프트 미션(항공측정)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임영욱(58) 연세대학교 환경공해연구소 부소장도 우리나라는 정부가 측정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정확히 되어 있는, 쓸 수 있는 자료’가 없다고 토로했다.
대기오염물질배출량을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다 보니 국내 요인과 국외 요인을 구분하는 일도 쉽지 않다. 환경부는 지난 9월 발표한 미세먼지대책 등을 통해 국내 미세먼지, 초미세먼지 중 30~50%(평상시), 혹은 60~80%(고농도시)가 국외에서 온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중국발 미세먼지가 한국으로 날아와 대기에 악영향을 주고 있다고 봤다.
그러나 민경은 교수는 우리나라 대기가 어느 만큼 주변국의 영향을 받는지 정량화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측정상의 문제 외에도 기상 상황이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민 교수는 “서해상에 중국발 오염원이 있다고 생각될 때도 그 이전 움직임을 보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오염물질이 서해로 돌아 나갔다가 중국 것과 섞여 들어오는 상황도 있다”고 지적했다.
미세먼지는 1군 발암물질, 노약자 특히 위험
WHO 산하 국제암연구소(IARC)는 2013년부터 미세먼지를 1군 발암물질로 분류하고 있다. 이는 미세먼지가 IARC의 발암물질 분류 기준 4개 군 중 암과의 인과관계가 가장 확실한 그룹에 속한다는 의미다.
숨을 쉴 때 코로 들어온 공기 중 먼지는 대개 코털과 기도의 섬모(미세한 털)에서 걸러지는데, 미세먼지는 입자가 작아 폐 속까지 그대로 들어간다. 체내에 침투한 미세먼지는 호흡기 계통에 염증을 일으키며 기관지염, 천식, 폐렴을 악화시키고 심할 경우 폐암으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
WHO 보고서는 “미세먼지에 노출되는 시간이 길수록 폐암 발병률이 높아진다는 것은 유럽과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아시아 지역 수천 건의 연구를 검토한 결과”라고 밝혔다. 또 미세먼지 속 독성이 혈액 속에 녹아 들면 피가 끈적해지고, 혈관을 수축시켜 심근경색 등 심혈관계 질환을 초래할 수 있다. 면역력이 떨어지는 노약자나 호흡계, 심혈관계 질환을 이미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미세먼지가 더욱 위협적이다.
지난 3월에는 서울대학교 보건대학 김호 교수 팀이 초미세먼지가 1㎥당 10㎍씩 늘어날 때마다 파킨슨병(신경계 퇴행성 질환) 환자의 증상이 심해져 입원하는 사례가 1.6배로 많아졌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신체발달이 진행 중인 아이들이 미세먼지에 노출되면 폐가 정상 크기로 발달하지 않거나, 심한 경우 되돌릴 수 없는 폐기능 손상을 입을 수도 있다.
OECD가 지난해 발표한 ‘대기오염으로 인한 경제적 영향에 대한 보고서’는 한국의 대기오염으로 인한 조기사망률이 2060년 OECD 국가 중 유일하게 100만 명당 1000명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했다. 그런데도 국내에서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가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포괄적으로 살펴보기 위한 역학연구가 진행되고 있지 않다.
임영욱 부소장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미세먼지가 전반적으로 공중보건에 미치는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 들여다보는 연구는 아예 없다고 보면 된다”며 “미세먼지 저감장치 등 기술개발에 쓸데없이 힘을 쓸 게 아니라, 어디서 어떤 먼지가 얼만큼 나오는지 원인 파악부터 제대로 하는 게 급선무”라고 말했다.
오염 관리 못한 정부에 피해보상 요구
국가 차원의 환경관리가 미흡해 미세먼지 피해가 커졌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지난 4월에는 시민 91명이 한국과 중국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을 주도한 최열(68) 환경재단 이사장과 안경재(47) 변호사는 “정부가 국민의 안전과 행복추구권을 보호할 의무를 게을리했다”며 한국과 중국 정부 공동으로 원고들에게 각각 300만원씩 배상할 것을 요구했다. 서울중앙지법에 따르면 내년 8월 중 본격심리가 시작돼 12월 중 1심 결과가 나올 예정이다.
이에 앞서 약 10년 전에도 시민들이 국가를 상대로 대기오염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을 낸 일이 있다. 호흡기 질환을 앓던 시민 23명이 정부와 서울시, 그리고 국내 7개 경유차 제조사를 상대로 3천만원의 손해배상과 과다 대기오염물질 배출금지를 요구하는 소송을 낸 것이다.
‘서울대기오염소송’이라 불렸던 이 재판은 대법까지 갔지만, 2014년 원고 패소로 끝났다. 대기오염과 호흡기질환 사이에 인과관계가 충분히 증명되지 않았고 자동차 제조사가 법령상 배출가스 규제기준을 위반했다고 볼 증거가 없다는 이유였다.
환경전문 로펌인 법률사무소 엘프스의 이소영(32) 변호사는 “법적 인과관계는 과학적 인과관계보다 낮은 수준의 개연성을 요구하지만 환경오염피해는 피해자가 입증하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나라 법원은 환경오염과 피해의 인과관계를 인정할 때 엄격한 편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덧붙였다.
반면 영국은 환경단체 클라이언트어쓰(ClientEarth)가 2015년과 2016년 두 차례나 영국 정부를 제소해 승리했다. 클라이언트어쓰는 영국 정부가 대기 질 개선 노력을 소홀히 해 많은 시민들이 이산화질소 등의 대기오염물질에 노출됐다고 주장했다. 고등법원은 2015년 이들의 주장을 수용해 정부에 강력한 대기오염물질관리정책을 시행토록 명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 대응이 미진하자 클라이언트어쓰는 2016년 다시 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에서도 클라이언트어쓰가 승리하면서 영국 정부는 지난 5월 개선안을 내놓았지만, 이 역시 환경단체 요구를 조건부 수용하는 데 그친 것으로 평가됐다. 클라이언트어쓰는 곧바로 세 번째 소송을 냈지만 지난 7월 5일 기각됐다. 법원은 정부의 개정 초안이 불법적이지 않다고 판단했다.
우리나라 법원이 환경오염 피해배상에 대해 전향적이지 않고, 중국 측의 압력도 걸림돌이 될 조짐이 있어 원고측이 미세먼지 소송의 결과를 낙관하긴 어렵다. 당초 중국정부에 대한 소송에서 원고 측 법률대리인을 맡았던 법무법인 바른의 손흥수(52) 변호사는 <단비뉴스>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법무법인이) 중국 측 고객과의 문제로 사임을 요청하여 사임했다”고 밝혔다.
소병천(50)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국제법전공)는 이번 재판에 대해 “소송은 최후의 수단이기 때문에 한중 양국 전문가와 이해당사자들이 논의를 통해 (미세먼지 감축을 위한)국가 간 협력 토대를 만드는 게 우선적인 일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이런 제안을 했다.
“소송을 한다면 중국발 미세먼지로 인한 피해자들을 찾아서, 중국 정부가 아닌 중국의 낙후된 오염배출시설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하는 게 더 고려할 만하다”
원문: 단비뉴스 / 글: 남지현,나혜인 / 편집: 안윤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