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 열풍이 식을 줄을 모른다. ‘자존감(Self-esteem)’이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비일비재다. 그 지겨운 자존감 이야기 아닐 것 같아서 빼어 든 심리학책이었건만 몇 장 펼치다 보면 이내 깨닫게 되고 만다. ‘나를 사랑하자.’ 자존감이라는 말만 안썼다 뿐이지, 결국 하고자 하는 말은 여타 자존감 책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자존감 열풍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려는 것은 아니다. 대(大)를 위해 소(小)를 강요하던 것이 자연스럽게 여겨졌던 시대가 공식적으로 저문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최근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영화의 그 ‘1987년’의 풍경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독재는 종식되었고 이제는 공식적으로 국가가, 군대가 국민 위에 군림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지만, 그 당시를 처절히 겪어온 국민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그때의 그 어쩔 수 없던 익숙함’은 그리 쉽사리 가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제도가 바뀐다고 해서 긴긴 세월 살아온 습관이 어디 한순간에 바뀔 수 있으리오.
그렇기에 나는 이 시대의 자존감 열풍이 제법 반갑다. 아직 사회에는 낡은 조직, 낡은 습성이 가득하다. 다수를 위해 개인의 의견이 묵살되고, 희생이 강요되고, 내부고발자를 엄벌하는 폐쇄적인 문화는 아직 대한민국 곳곳에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러나 나는 감히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고 싶다. 예전에는 짓눌림이 두려워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다물었지만 이제는 그에 못지않게 스스로가 사랑받을 권리, 이해받을 권리, 존중받을 권리를 좇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을 테니 말이다. 다만 우려스러운 것은 자존감을 높이는 것이 개인을 향한 일이듯, 자존감이 하락되는 것 마저도 단지 개인 탓으로만 귀결되지 않을까 하는 점일 것이다.
자존감은 매우 심리학적이다. ‘개인’을 겨냥하여 만들어진 개념이라는 뉘앙스가 풀풀 넘친다. 심리학의 출발 역시 그랬다. 심리학은 매우 미시적인 분석 단위를 가진 학문으로, 심리학의 주된 관심사는 언제나 ‘개인’에 있었다. 거시 사회적 맥락에 대한 관심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리학은 대개 여전히 ‘개인’을 겨냥하고 있는 학문이다.
그래서일까. 자존감이 대중사회에 통용되는 방식 역시 지극히 ‘개인’적이다. 자존감에 대한 심리학 책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언제나 ‘개인’이다. 자존감이 ‘개인’에게 왜 중요한지, 자존감이 하락/상승하게 되는 ‘개인’내적 이유는 무엇인지, 자존감이 낮으면 ‘개인’에게 왜 안 좋은지, 반대로 높으면 왜 ‘개인’에게 좋은지 등등. 그리고 언제나 결론은 이거다. ‘나를 사랑하자’. 그럴듯한 비유를 갖다 붙이든, 길게 늘여 쓰든 결국 하고자 하는 말은 이 한 마디다.
하지만 자존감을 오롯이 ‘개인’ 관점에서만 볼 수는 없다. 단지 개인이 만들어내고, 개인이 관리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다소 나이브하다. 대개 우리가 자존감을 논할 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명제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회심리학(Social Psychology)이 응용 심리학이 아닌, 기초 심리학으로 분류되는 그 이유를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존감을 단지 개인의 문제로만 돌린다면 높은 자존감은 오롯이 내 덕이듯, 낮은 자존감 또한 오로지 내 잘못이 되고 말 것이다. 긍정적이지 않아서, 강박적이어서, 스트레스 관리가 잘 안되어서, 남을 시기하고 질투해서, 덜 참된 가치를 좇고 있어서 자존감이 낮다는 식으로 흐르게 되고 말 것이다. 그것이 곧 우리가 바라던 자존감의 모습이던가?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이러한 우려에 대답해주듯, 자존감의 사회적인 속성을 놓치지 않았던 심리학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자존감을 하락/상승을 결정하는 주체는 개인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주지하다시피 인간에게는 크게 두 종류의 정체성이 있다. 개인적 정체성(Personal Identity), 그리고 가족으로서의 나, 직업인으로서의 나, 조직 구성원으로서의 나 등으로 표현되는 사회적 정체성(Social Identity)이 바로 그것이다.
심리학자 타즈펠(Tajfel)은 그의 사회 정체성 이론(Social Identity Theory)을 통해, 인간은 내집단을 비호하거나 타 집단을 배척하기 위한 ‘집단적 이유’로도 움직일 수 있음을 설명했다. 그리고 이 사회 정체성 이론을 자존감 개념에 접목시켜 탄생한 것이 바로 집단적 자존감(Collective Self-esteem)이라는 개념이다.
자존감은 개인적 자존감과 집단적 자존감으로 구분된다. 개인적 자존감이란 우리가 그동안 익히 들어왔던, 바로 그 자존감이다. 나 개인을 얼마나 존중하고 가치롭게 보는가에 대한 인지적/정서적 평가. 그리고 집단적 자존감이란 내가 속한 집단에 대한 존중, 가치판단을 일컫는 말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집단적 자존감에는 ‘내가 속한 집단에 대한 나 개인의 긍정적 인식의 정도’, ‘남들이 내가 속한 집단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인식’, ‘집단 내 나의 역할에 대한 긍정적 인식의 정도’, ‘집단의 가치와 개인의 가치 간 관련성에 대한 나의 인식’ 등이 포함되어 있다.
집단적 자존감의 함의는 무엇일까? 그것은 나, 바깥에 존재하는 집단의 속성을 고려하지 않고는 내가 가지고 있는 자존감이 어떤지를 쉽게 판단할 수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한 개인이 가진 자존감의 종류는 하나가 아니며, 집단적 자존감을 일부 결정하는 집단의 속성이 개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존감 안정성(Stability of Self-esteem) 담론에서도 으레 등장하는 이야기이지만 한 개인이 가진 자존감의 수준은 단일하지도, 일정하지도 않다. 자존감은 개인 내외적 사건에 따라 변한다. 그리고 지금 현재, 내가 어떤 정체성의 틀을 쓰고 있느냐에 따라 자존감의 기저선과 변동이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여기, 자존감이 낮은 한 사람이 있다. 이때 우리가 잊지 않고 물어야 할 것은, 그가 내비치는 낮은 자존감이 과연 어떤 집단적 속성으로부터 기인하느냐에 대한 것이다. 한 개인이 표출시키는 자존감인가, 아니면 특정 집단 구성원으로서 표출시키는 자존감인가?
만약 그가 드러내는 낮은 자존감이 개인적 자존감이 아닌, 집단적 자존감에 따른 것이라면 우리는 집단에 속한 개인을 보면서 동시에, 그가 속한 집단이 과연 어떤 속성을 지닌 집단인지를 반드시 눈여겨보아야 한다. 혹시라도 자존감 하락을 ‘당했을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그래서 지금의 자존감 열풍이 약간은 불안하고, 우려스럽다.
내가 속한 집단이 글러먹었다면, 집단적 자존감이 높을 수가 없다. 스스로 내집단(ingroup)을 긍정적으로 볼 수 없다면, 남들도 내집단을 좋게 봐줄 수 없다면, 당연히 그 집단에 몸을 담고 있는 나의 처지 역시 한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집단적 자존감의 하락이 개인적 자존감의 하락을 유발하는 상황이다.
개인적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해 부조리하고, 개인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비전이 없는 그런 집단을 내집단(ingroup)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면 그것은 무척 고역이다. 이 상황에서 사회 정체성 이론가들이 주장하듯 내집단 편향, 외집단 배척을 통해 집단적 자존감을 긍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마 무시 못할 수준의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를 감당해야만 할지 모를 일이다.
낮은 자존감의 책임은 개인에게만 있는가? 맥락을 무시한 채 자존감 문제를 단지 개인에게로만 환원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자존감은 개인이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집단이, 사회가 만들기도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개개인이 취급해야 했을 자존감을 ‘자존감 열풍’으로 끌어올리고, 그것을 사회적인 범주에서 바라보고자 한다면 잊지 않아야 할 관점일 것이다.
정리
- 당신이 믿는 자존감 속에는 ‘집단적 자존감’이 포함되어 있다.
- 개인적 자존감과 집단적 자존감은 상호 연관된다. ‘하나만 봐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 자존감 하락의 책임을 스스로에게만 묻지 말라. 그 낮은 자존감의 일부 책임은 분명 외부에 있다.
- 타인의 자존감을 판단할 때, 대응 추리 이론(correspondent inference theory)의 우를 범하지 말 것. 그의 낮은 자존감은 그 사람의 성향 탓이 아닐 수 있다. 맥락(context)의 중요성을 잊지 말 것.
원문: 허용회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