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야나미를 돌려줘어!”
투명 신지가 울부짖었고,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보며 중2병 수요를 충족시키며 나름 건실한 청년으로 성장한 이 땅의 여러 팬들이 하나가 되어 감동했다. 2009년 극장가,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파]가 상영하던 공간의 풍경이다.
시계를 돌려, 때는 2012년 12월. 그 팬들은 고스란히, 일본에서 새로 개봉한 다음편인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Q]가 과연 한국에서 개봉할 수 있을지 노심초사하고 있다. 물론 이와 똑같은 일이 3년전에 그대로 있었는데, ‘파’가 과연 개봉할 수 있을지 걱정했던 것이다. 걱정의 이유는 사실 간단하다. 속편을 수입해서 개봉할 만큼 상업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음을 널리 알고 있기 때문이다.
07년 9월 일본에서 신극장판의 첫 작품 ‘서’가 개봉해서 놀라운 성공을 거두고 한국 팬들도 국내 개봉을 외친 결과, 태원에서 수입하여 08년 1월 실제로 개봉을 했다. 그러나 결국 KOFIC기준 전국 7.4만여명을 찍고 내려왔다. 비야동, 아니… 비아동 애니메이션으로서 절망할 성적은 아니지만, 성원과는 거리가 살짝 있는 성적이었다. 하지만 개봉관도 많지 않았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리고 절치부심, 2009년 11월에 후속편인 ‘파’가 두 배 가량 늘어난 개봉관에서 상영되었다. 그런데 관객은 전국 6.6만명. 그냥 원래 딱 그 정도의 숫자가 ‘에반게리온 이야기를 새로 해석한 작품을 극장에서 보고 싶을 정도로 좋아한’ 한국의 팬층이었다.
다시금 말하지만, 6.5~7만여명 언저리라면 (한국에서 마이너한 장르치고는) 나쁜 숫자는 아니다. 다만 그들을 위해 얼마나 수입과 개봉관 확보에 투자를 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그나마 한국의 무척 미미한 홈비디오 판매 시장 규모상, 2차 판권 시장이 활발해서 수익을 몇 배로 늘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수입사는 수입시기를 싸질 때까지 늦추거나 아예 포기하는 결정도 가능하고, 그것이 바로 팬들이 걱정하는 바다.
이번 건만 특수한 사례인 것도 아니다. 기억을 한 20년만 돌려보자. 아직 고속 인터넷으로 다시보기가 보편화되지 않고, 무언가를 다시 보려면 비디오‘테이프’(!)를 시간 맞춰 버튼 눌러야했던 1992년에 [이상한 바다의 나디아]라는 공전의 명작이 MBC에서 방영했는데, 아뿔싸… 초딩들이 피구공으로 사람 죽이는 공전의 대중적 히트 [피구왕 통키]가 SBS에서 동시간대에 방영하고 있었다. 그 결과 나디아는 큰 관심을 받지 못하고, 더불어 비아동 취향 고퀄리티 애니는 한국에서 승산이 없다는 편견이 강화되었다고 팬들은 믿었다.
그래서 무관심 속에 방영이 끝난 이후 하이텔과 나우누리 등지에서, 3년 동안 대단히 열성적으로 목소리를 모으고 존재감을 과시하고 청원해서 결국 96년에 MBC가 재방송을 하기에 이른다. 이번에는 시간대도 좀 더 황금시간대로 늦추고, 인지도도 예전보다 상당히 갖추어져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여전히, 시청률 9%대였다.
반면 옆 채널의 [슈퍼소년 마이티맥스](제목에서 풀풀 드러나듯, 별로 유명하지 않은 아동취향 애니)는 20%대였다. 아직 DVD를 통한 홈비디오 셀스루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리기 전인 시기라서, 당연히 부가시장은 의미 없었다. 결국 열성적 팬이라는 시장층이 권리 회복은커녕 아주 실증적으로 부정당해버린 사건이 되어버렸다.
소비자의 힘은 ‘머리 숫자 * 구매의향(“이쪽에 돈을 쓸 생각이 있는가”) * 구매력(“쓸 돈이 있는가”)’이다. 혹은 열광적 소수가 다수를 여하튼 견인할 가능성이 높아서 결국 앞의 공식에서 승리를 가져올 때, 일종의 얼리어댑터 역할로서 시장가치가 생기기도 한다. 단순히 목소리가 간절하고 크다는 것은 아무런 고려사항이 될 수 없다.
그런데 특정 개인이 아닌 하나의 소비 집단으로서 볼 때 한국의 열성적 애니메이션 팬층은 우선 머리 숫자가 부족하고, 나머지 두 개에서도 종종 한계를 보인다. 웹하드에서 불법 다운로드 하면 되는데, 굳이 DVD를 사기 아깝다? 구매의향이 낮다. 사고는 싶은데 도저히 문화에 쓸 여유 용돈이 없다? 구매력이 낮다.
열광적인 소수의 지지란, 구매의향과 구매력을 그 이상으로 행사할 수 있을 때에만 힘을 발휘한다. 일본에서 00년대 내내 만화/애니업계에서 거의 주류처럼 커버린 ‘오타쿠 시장’이 그렇다(구매의향은 하늘을 찌르고, 구매력은 삶의 다른 영역들을 등한시함으로써 확보한다). 그런데 시장력도, 확대력도 없는데 그들을 대상으로 사업을 벌인다면… 어딘가 속았거나, 아니면 스스로도 그쪽 팬이라 좋아서 밑 빠진 독에 물 붓고 있거나.
결국 열성 팬으로서 자신들이 좋아하는 작품이 널리 향유되는 판을 만들고 싶다면, 방법은 뻔하다. 미친 듯 소비를 키우거나, 배타적 열정의 커다란 목소리로 다른 이들을 못난 놈들 취급하고 질리게 만들기 보다는(“나의 아스카짱은 그렇지 않아!”) 자연스레 함께 즐길 수 있도록 원활하게 그들의 경험 속에 녹아들어갈 수 있는 장점을 호소하거나 하는 것이다(“에바 극장판을 보고 연인이 생기고 영어가 유창해지고 키가 5센치 컸어요”).
그리고 어쨌든 자신들의 확장력의 한계를 늘 성찰하는 인내심도 중요하고, 내 취향 소중한 만큼 다른 영역의 수요들도 분명히 있음을 인정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돕는 공감대와 연대도 필요하다. 그런 귀찮은 짓 하기 싫으면, 다음 에바 극장판은 일본여행을 계획해야지 뭐.
아, 그런데 ㅍㅍㅅㅅ 이번 호 특집은 대선이니까 뭔가 연결은 시켜야겠다. 그냥, 앞의 문단에 열성 팬을 정치 지지성향의 “O빠”로 바꿔 넣어 보자. 1인1표제니까 선거국면에서 소비를 키우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만 전제하고.
(12.15.주: 첫 글에서 극장 관람객 수치의 단위수를 잘못 기재하여,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