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스마란 여러 해석이 있지만 결국 기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소설 삼국지에서도 사람들이 조조와 유비를 따르는 이유가 각각 달랐었다. 조조의 심복들에게도 조조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듯이 유비의 측근들에게도 유비가 아니면 안 되는 이유가 있었다. 그를 위해서 두 사람의 신하들은 때로 목숨을 바쳤고 위험과 고난을 무릅썼다. 무엇이겠는가. 내가 지금 충성을 바침으로써 내가 바란 결과가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감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돈일 수 있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권력일 수도 있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혈통이기도 하다. 하지만 항상 모든 경우에 그 기대란 것이 뚜렷한 실체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때로 어떤 사람들은 형체도 없는 막연한 그 기대를 쫓아 무작정 한 사람을 따라나서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은 그마저도 자신이 가진 어떤 불안과 불만에 의한 것이기 쉽다. 자신도 자각하지 못하는 결핍과 요구가 그것을 대신 이루어줄 수 있을 것 같은 대상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 경우 원래 막연했던 만큼 그 불안과 불만의 형태 역시 그 대상이 결정하기도 한다.
세상이 혼란스럽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난다. 해서는 안 되는 행동들을 저지르고 있다. 아니 구체적으로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정상을 벗어난 것은 분명하다. 머리가 아닌 본능이 그것을 느끼고 있다. 그러니까 자신은 지금 무엇을 하면 되는 것인가.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은 것인가?
아예 이전의 질서를 뒤집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거나, 아니면 다시 모든 부정과 일탈을 바로잡아서 원래의 정상으로 되돌리거나. 중요한 것은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와 함께함으로써 답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하는 것이 옳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명장이란 싸워서 이길 것 같은 사람을 일컫는 것이다. 아무리 싸움이라고는 처음이라 해도 어찌 되었든 함께 싸우면 이길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가지게 만드는 것이 명장인 것이다.
바로 그것이 빠를 만든다. 광적인 추종자를 만든다. 심지어 자기 자신은 물론 소중한 가족까지도 그를 위해 기꺼이 내던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본능이다. 아니 무리를 짓고 사는 모든 존재가 가지는 본능이다. 누군가는 의지하려 하고 누군가는 이끌려 간다.
대부분은 누군가 자신을 이끌어주기를 바라고 그 대상을 찾는다. 당연히 그 대상은 자신들을 잘 이끌어줄 수 있는 존재다. 이끌어줄 수 있을 것 같은 존재, 그 존재가 자신들을 잘 이끈다는 것은 자신이 가진 불안과 불만을 해결해 줄 수 있음을 뜻한다.
어째서 문재인이었는가 돌이켜보자. 무엇보다 어째서 노무현과 문재인을 대하는 지지자들의 태도가 다른가도 헤아려보자. 김대중에게는 김영삼이라는 대안이 있었다. 그리고 1997년 대선에서 경쟁자였던 이회창 역시 썩 그렇게 몹쓸 선택은 아니었었다.
노무현은 바로 그 김대중을 계승했다. 그리고 어찌 되었거나 김영삼 이후 무려 15년간 이루어져 온 민주주의의 발전과 성장에 대한 자신감도 있었을 것이다. 노무현이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유시민 자신도 그리 말하고 있었다. 새누리당이 정권 잡는다고 나라 망하는 것 아니라는 말들이 오갔었다. 그러나 결과는 어땠는가.
2012년 대선 직전 불었던 안철수 바람 역시 바로 거기서 비롯되었다. 심지어 안철수의 경우는 김대중과 노무현에 대한 부정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이놈도 저놈도 다 마음에 안 드는데 안철수라면 뭔가 다르지 않을까? 안철수라면 지금까지의 대통령들과는 다른 정치를 보여주지 않을까? 그것을 구체화한 것이 바로 안철수가 내건 ‘새 정치’라는 구호였었다. 그리고 그것은 2017년 대선까지도 여전히 유효했었다.
그래도 안철수라면 기존의 정치인들과는 무언가 다르지 않겠는가. 2016년 총선과 2017년 대선에서 보여준 안철수의 선전은 그같은 막연한 대중의 기대에 힘입은 바가 컸었다. 그러나 2017년 대선을 치르며 안철수라는 인간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자 안철수에 대한 기대와 바람은 비로소 끝나고 만다. 안철수의 정치에는 전혀 자신들이 바라는 새로운 무엇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안철수 자신의 힘으로만 안철수 바람을 끝냈던 것은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비교되는 것이다.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는 그저 막연한 기대였지만 대통령이 되고 난 뒤 보이는 모습을 통해 저절로 보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처음 안철수에게 대중들이 기대했던 그 모든 것이 대통령에 당선된 문재인에게 있었음을.
그러므로 안철수가 아닌 문재인이 자신들이 바라는 정치를 이루어낼 것이라 모두가 생각하게 된 것이다. 지지율이 꺼져도 너무 한 번에 꺼져 버렸다. 그래도 유력대선후보로서 본전이란 게 있었을 텐데, 아예 남은 것이라고는 없이 모두 한 번에 털어먹고 말았다.
노빠들이 문재인을 지지한 이유는 하나다. 노무현의 후계자다. 노무현 정신의 계승자다. 하지만 노빠가 아닌 사람들이 문재인을 지지한 이유는 다른 것이었다. 아마 그런 사람들에게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주었던 것은 민주당의 분당 과정에서 문재인이 지켜낸 혁신안이었을 것이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라 여겼었다. 또 지금까지처럼 적당히 타협하며 만신창이가 될 것이라 예단했었다. 하지만 집요한 흔들기에도 문재인은 고집스럽도록 우직하게 혁신안을 지키고 오히려 흔들던 이들이 제 발로 뛰쳐나가도록 만들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단 한 번도 인상을 쓰거나 험한 소리를 내뱉는 법 없이 완벽하게 자신을 다스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진짜 이 사람은 다르구나. 정치인으로서 이 사람이라면 다른 기대를 가져봐도 괜찮겠구나. 그 전까지 막연하게 그래도 다른 사람들보다 낫겠거니 여기던 것에서 이 사람밖에 없다는 확신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문재인 말고 지금 누가 있다는 것인가. 홍준표? 유승민? 안철수? 아니면 심상정?
과거 노빠들도 이유는 다르지만 결국은 같은 맥락이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대통령으로서 문재인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 문재인이 흔들리거나 무너지면 그다음에는 희망이 없다. 그러니까 문재인의 잘못을 비판하더라도 그로 인해서 문재인 정부의 힘이 꺾이면 누가 그 대안이 될 것인가 말이다.
노무현에게는 심지어 열린우리당조차 없었다. 노무현 한 사람도 불만스러운데 하물며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그보다 더 형편없는 지경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문재인이 바꾸어 놓은 민주당이 또한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든든히 버티고 있다. 열린우리당이나 한나라당이나에서 이렇게 변한 것이다.
열린우리당보다는 그래도 민주노동당이 아닐까. 그러나 이제 어느 정당도 정치인도 민주당과 문재인을 대신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 자신이 가진 당연한 권리로써 나의 기대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문재인과 민주당을 지켜야 한다. 물론 그것은 지금 나 자신이 동의하고 있는 지금의 문재인과 민주당일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카리스마를 신뢰라고도 말한다. 어떤 이들은 정직이라고도 말한다. 그래서 기대인 것이다. 내가 바란 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내가 기대한 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이 깨진다면 다시 노무현 때처럼 나는 문재인에게서 등 돌릴지 모른다. 노무현과는 달리 문재인은 이명박과 박근혜의 9년을 견디고 만난 대안이다. 유일한 희망이다.
김대중과도 김영삼과도 이회창과도 비교될 수 있었던 노무현과는 달리 그 가면이 벗겨진 이명박과 박근혜, 그리고 홍준표, 안철수 등이 그 비교 대상이 되고 있다. 기대치도 다르고 그에 따른 만족도도 다르다. 어찌 되었거나 아무리 그래도 다른 야당이나, 설사 같은 민주당이라도 안희정보다는 훨씬 나은 대안이다. 어떤 경우에도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은 피할 수 있다.
이른바 진보언론이나 지식인들과 문빠들이 갈리는 지점일지 모르겠다. 그들에게는 절박감이 없다. 문재인이 아니면 안 된다는 위기감 같은 것이 없다. 그러니까 반드시 문재인이어야 한다는 당위같은 것은 느끼지 못한다. 이해한다. 나도 노무현 때 그랬으니까.
그래도 설마 민주화가 이루어진 지 몇 년인데 한순간에 그렇게 모든 것이 무너질 거라고는 감히 상상조차 못 했으니까. 어차피 자신들이 원한 정권이 아니었으니 김대중이나 노무현이나 이명박이나 박근혜나 그나마 욕하기 좋다는 점에서 노무현과 문재인이 더 좋은 점이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 누가 되었든 자신들이 바라는 정권이 아니었으니 그에 대한 강한 집착을 이해하지 못할것이다.
‘자기들이 지지하는 후보가 당선되지 못할 것 같으니 그냥 투표를 포기하는 것이 낫다.’ 지금은 다른 이유로 매장되다시피 한 어느 유력 진보 논객이 수년 전 선거에서 주장한 내용이기도 하다. 바로 그것이 정치라는 것이다. 정치에 참여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물론 개인이 아닌 정당이면 더 좋다. 개인이 아닌 이념이라면 더 좋을 것이다. 솔직히 문재인과 나와는 이념적으로 상당한 거리가 있다. 민주당과도 과연 이념적으로 통하는가 의문스러운 부분이 상당히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지금 당장이 위급한 비상상황인데.
그래서 카리스마란 대개 혼란 속에서 나타난다. 그래서 때로 카리스마는 개인의 힘으로 사회의 인습과 통념, 가치, 질서, 체계, 구조마저 뒤바꾸는 파천황을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오로지 개인이 가진 역량에, 그보다 그에 대한 기대에만 기댈 수밖에 없으니 그 밖의 모든 것이 의미를 잃게 된 결과다.
솔직히 나도 문빠들이 싫다. 노빠들도 원래 싫어했다. 하지만 언젠가 진중권이 진보당 지지자들에게 일갈하던 말을 기억한다. 너희들은 왜 노빠처럼 하지 못하는가. 저렇게 적극적으로. 저렇게 극성맞게. 저렇게 단합된 행동으로 자신들의 의지를 증명하려 하지 않는가. 말 그대로다. 가만히 앉아 옳은 말이나 늘어놓는 정의로운 사람보다 틀렸더라도 직접 몸으로 부딪히며 행동하려 하는 이들에게 더 신뢰가 간다. 차라리 틀렸거나 잘못된 것은 반성하게도 하고 고치도록 만들수도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무엇을 더 낫게 만들 수 있을까.
싫으면 싫은 대로 부딪힌다. 마음에 안 들면 마음에 안드는대로 싸우기도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결국 사회는 더 다양해지고 그 다양성 속에서 새로운 대안도 나타나는 것이다. 주장하는 그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그마저 부정하는 정의라는 것은 무슨 가치가 있다는 것인가. 문빠가 민주주의의 적이 아니라 그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적인 것이다.
어째서 문빠들이 나타났는가를 이해해야 한다. 어째서 그들이 그렇게까지 과격한 행동을 보이는가를 알아야만 한다. 더욱이 지식인이라면 그것은 의무이자 당위이기도 하다. 언론 역시 마찬가지다. 문빠 몇몇이 이런 눈쌀찌푸려지는 짓을 하고 있으니 ‘그들은 나쁘다.’ ‘배제해야 한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만들었는가에만 집중해서는 안 된다. 그 주범들이 그러고 있으면 지켜보는 사람은 그저 웃고만 싶어진다. 어이가 없다.
원문: 가난한 생활 가난한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