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는 단지 그 자리에 머물기 위해서 끊임없이 헤엄을 쳐야만 한다. 물이 흐르기 때문이다. 바람이 불기에 새들도 날갯짓을 해야 한다. 사람이 가만히 제 자리에 서 있는 것 같아도 매 순간 수많은 관절과 근육과 신경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궁금하면 한 번 가만히 서서 자기 다리를 만져보라.
가만히 앉아만 있는다고 주어지는 것은 없다. 이제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손을 놓는 순간 현실은 다시 자신과 상관없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노동자의 권익을 지키겠다고 노동운동이라는 것을 시작한 지도 벌써 한 세기가 지나고 있다. 그동안 많은 것들이 바뀌고 또 나아졌다. 그러나 여전히 노동자의 지위와 권리를 침해하려는 시도들은 여전하다.
노동자의 이익을 줄여야 기업과 국가의 이익이 늘어난다. 그렇다면 이미 많은 것들이 더 좋아지고 더 나아졌으니 이제는 더이상 전과 같은 노동운동은 필요 없는 것인가?
물론 불과 10년 전에 비해서 현재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권리는 눈부실 정도로 신장되어 있다. 오히려 남성들이 상대적인 박탈감마저 느낄 정도다. 여전히 남성이라는 이유로 신사이고 기사이기를 강요당하는데 정작 사회적으로 남성이기에 더 누리는 것들이 사실상 없다시피 하다.
위기의식을 느낀다. 여기서 더 여성들에게 양보했다가는 자신들이 누리던 것마저 지킬 수 없게 될지 모른다. 그러므로 여성운동도 이만하면 되었다. 많은 반여성주의자들이 점잖게 여성주의자들을 타이르며 하는 말이다.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세상이 그렇게 여성들에게 불리하지만은 않아.”
그러나 실제 그런가?
많은 남성들이 말한다. 성범죄로 인해 여성들이 고통받고 있을 때 여성주의자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냐고. 그러는 한편으로 성범죄 이슈에서 여성주의자들이 피해자를 위해 행동에 나서면 이익집단이 압력을 행사한다며 오히려 반발하고는 한다.
남성들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여성들은 강력한 사회적인 보호가 없이는 불이익을 당하기 쉽다는 것을. 일상적인 사회생활은 물론 범죄에도 더 취약하다. 취직도 어렵고, 승진도 어렵고, 결혼과 출산이라는 자연적인 행위마저도 실직의 사유가 된다.
남성들이야 그냥 기분 나쁘고 말 뿐인 밤늦게 혼자 길을 가는 일도 여성들은 누군가 자신의 뒤를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심장이 멎을 듯한 두려움을 느낀다. 그럼에도 그저 남성들은 모든 남성이 범죄자는 아니라 항변할 뿐이다. 그래서 누가 범죄를 저지를 것인가 알고 난 뒤에는 이미 늦다. 남자들처럼 밤늦게 아무 데서나 혼자 술을 먹고 들어간다는 자체만도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래서 여성들끼리 뭉친다. 당연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여성운동은 인권운동이 아니라 말하기도 한다. 노동운동과 같은 단순한 계급적 권익을 위한 행동이라 이야기하기도 한다.
노동운동이 인권운동인 이유는 그만큼 자연적인 노동자의 사회적 지위와 권리가 형편없이 낮았기 때문이다. 자연상태로는 노동자가 자본가와 대등해질 수 없기에 노동자를 위한 결사와 행동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그만큼 낮으니까. 자연상태에서 그만큼 여성이 불리한 조건에 놓여 있으니까. 그리고 이제는 충분하다 싶을 정도로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권리가 신장된 지금도 잠시라도 마음을 놓는 순간 모든 것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 사회의 사각에서, 진보된 법과 제도와 인식의 주변에서 여성들은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불리한 조건과 환경을 강요받고 있다. 일방적인 강요와 강제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 그나마 법에 호소하는 것만도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법과 제도의 도움을 받아 구제될 수 있다면 아주 운이 좋은 경우이기도 하다. 하긴 남성들이 여성들의 그같은 처지를 몸소 겪어 아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알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더 납득하지 못한다.
여성운동이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것은 전적으로 남성의 시각이다. 여성운동도 이만하면 충분하니 이제부터 남성의 입장도 고려해달라는 것 역시 오로지 남성의 입장만을 반영한 것이다. 하지만 과연 여성들이 여성운동을 그만두더라도 사회는 지금처럼 진보된 법과 제도, 윤리, 의식을 지키고 발전시켜나갈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주장하는 자신들은 그럼에도 여전히 여성들을 존중하며 사회적으로 대등한 존재로서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끝까지 협력할 것인가.
당장 여성주의자들의 여성운동에 반감을 느끼는 자체가 여성운동이 자신들의 이익을 침해하기 때문인 것이다. 여성의 채용이 늘면 반대로 남성의 채용은 줄어든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면 거꾸로 남성의 사회적 지위는 상대적으로 낮아지는 것처럼 보인다. 역차별이라 부르는 이유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여성운동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그 주장에 동의한다면 과연 여성의 지위와 권리는 지금까지 이룬 것들이나마 과연 계속 지켜질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당연히 여성이 여성주의를 추구하고 여성운동을 지속해야만 하는 절대적인 이유인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여성들이 겪는 문제에 대해 잘 아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나는 전체 가운데서도 아주 일부만을, 그것도 간접적으로 전해 듣고 보는 것들로 아는 척할 뿐이다. 내가 아는 것은 아주 일부 가운데서도 또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분노한다. 왜? 내 어머니가 여성이기 때문이다. 내 여동생들도 여성이기 때문이다. 내가 우연히 혹은 필연적으로 알았고 어울렸던 많은 이들이 또한 여성들이었다. 그리고 인간이었다.
내가 흑인이라서 흑인들이 처한 열악한 처지를 동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연대라는 것이다. 내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마치 내 일처럼 여기고 행동한다. 그렇게 적극적이지는 않다. 그저 인터넷에서나 조금 끄적이고 말 뿐.
이제는 충분하다는 것은 그들이 가진 절박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다. 반여성주의자들은 여성의 지위와 권리가 그저 억지로 주어진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여긴다. 수 만년의 인류의 역사에서 아주 최근에서야 여성들 자신의 투쟁을 통해 겨우 쟁취해 얻은 것이 지금 그들이 누리고 있는 것들이다.
그들이 싸움을 멈추는 순간 인간은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만다. 그 대표적인 경우를 이미 현실에서 겪었지 않은가. 군사독재는 이미 끝났고 민주주의도 상당 부분 이루어졌다 자신한 순간 모든 것이 다시 거꾸로 돌아가는데 단지 몇 년의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미국에서도 그동안의 여성과 인종에 대한 진보적인 성취에 대한 반발이 트럼프라는 괴물을 불러오고 있었다. 하긴 여성주의에 반발하는 이들이 흔히 들먹이는 이름이 바로 트럼프이기도 하다. 자신들에게도 트럼프가 필요하다. 여성주의가 트럼프를 불러온다. 하지만 트럼프가 괴물인 게 문제가 아니다. 사실은 자신들이 그것을 바라고 있을 뿐이다.
정도를 넘어선 여성주의에 대해서는 나 역시 반감을 갖는다. 아니 그보다 먼저 배타적이고 과격한 여성주의자들 자체를 개인적으로 아예 싫어하는 편이다. 말을 섞기도 싫어한다. 그래서 대부분 관심을 끊고 지낸다. 그것은 여성운동과 전혀 별개의 것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 여성주의는 필요한가? 내가 불편해할 정도로 과격한 여성주의가 여성들을 위해서도 필요한가? 라고 물으면 나는 대답할 수 있다. 사회 전체를 위해서가 아니다. 여성을 위해서다.
사실 정도를 넘어선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은 어떠한 사상을 가지고 있든 늘 존재해왔고, 그 이유를 막론하고 과격한 말을 쓰며 해를 끼치는 사람은 원래 모두가 싫어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이 ‘여성주의자’로 분류될 때 자신이 유독 화가 난다면, 과연 그 분노가 어떤 부분에서 오는 것인지 자신을 돌아보자.
나는 과격파 여성주의자와 만나면 싸움을 한다. 그러나 정작 반여성주의자들과 만나면 또 그들과도 싸운다. 내가 중도라고 해서 딱히 모두와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즉 여성주의는 동의의 문제가 아니다. 필요의 문제이다.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역사가 이어지는 한 결코 멈춰서는 안 되는 투쟁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원문: 가난한 생활 가난한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