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테인먼트를 필두로 멀티미디어 콘텐츠는 텔레비전에서 스마트폰으로 매스미디어를 탈출하지만 학교 안 교실 풍경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수십 명의 아이가 절대적으로 옳거나 최선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선생님 한 분을 임의로 배정받고 학생들은 이 결정에 선택권이 없다.
학습 주제와 학생 개개인의 특성과 역량을 고려한 학습 지도 시스템은 찾아보기 힘들고 모든 학생이 동일한 내용을 동일한 속도로 배워야 한다. 말 그대로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 다행인 것은 이러한 불합리의 개선을 위해 교실 밖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련의 노력이 있다는 점이다.
칸 아카데미(Khan Academy)는 그런 노력이 어떻게 아이들의 학습 문제를, 더 나아가 보수적이고 정체된 교실 현장을 실질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우선 아래 칸 아카데미의 영상을 보자.
하지만 이런 주장이 학생 개개인의 학습 능력을 최대화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다른 시도를 원천적으로 거부하거나 그로 인해 얻을 다른 정치적 편익을 위해 사용되어서는 곤란하다. 이런 제도적 노력은 기성세대를 살고 있는 어른들의 몫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코웰이홀딩스(Cowell E Holdings) 곽정환 회장은 ‘사람은 각자의 주가를 가진다’고 했다. 학습 역시 마찬가지 경향을 보인다. 아래는 TED 영상의 일부다. 초기 점수가 낮고 개념 이해에 어려움을 겪었던 아이가 나중에는, 그러니까 동영상 설명상으로 6주후에 는 더 빠르고 가파른 학습 곡선을 보였다.
개념을 이해하는 속도와 깊이, 응용 방법 등은 개인마다 모두 다른 역량을 가졌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는 살만 칸(Sal Khan)의 이야기처럼 초기의 성적만을 기준으로 영재와 둔재, 혹은 문제아를 나눈 후 영재에겐 더 많은 혜택과 높은 수준의 교육을, 둔재에겐 “넌 안 돼” “넌 타고나지 않았어” “넌 열심히 해 봤자야” “머리가 안 좋아”와 같은 사회적 시선을 던져왔다.
어쩌면, 만약에 그러지 않았다면, 아이들이 개념을 더 이해하는 데나 개념을 응용하는 데 시간을 썼다면, 그렇게 각자 부족한 부분을 보충받을 기회를 누렸다면 많은 아이의 인생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어떤 아이가 어느 부분이 부족한지 본인 스스로 알아채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수십 명의 학생을 맡은 선생님이 학생 한 명 한 명을 제대로 알긴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지만 데이터는 다르다. 다양한 시각에서 개개인에게 필요한 학습 가이드를 제공할 수 있으며 맞춤형 반복 학습이 가능하다. 이런 초기 단계의 효과는 인터넷 강의를 통해 익히 경험한 적 있다. 칸 아카데미는 이런 효과와 노력의 진보된 모습이다.
내년부터 초등학교 1-2학년은 방과 후 영어 수업이 금지된다. 이 수요를 대체할 사교육 시장은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인 1997년에는 초등학교 영어 과외를 금지했다. 인간의 욕망을 제도나 법으로 컨트롤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페이스북의 뉴스피드나 자주 가는 쇼핑몰을 봐도, 검색엔진에 보이는 광고만 봐도 어느 하나 다른 사람과 같은 것이 없다. 기술은 많은 것을 바꿔 간다. 교육이라고 해서 다를 것 없다. 언제까지 학생 개개인은 뒷전으로 두고 공평함이란 이름으로 무능을 포장할 것인가. 광범위한 대상을 기준으로 같은 서비스를 공급하려면 하향 평준화는 당연한 수순이다.
공교육은 제도를 통해 행위를 금지할 것이 아니라 학생 개개인에게 근접하여 누구나 의지와 노력만 있다면 스스로의 역량을 끌어내고 재발견할 교육 환경을 제공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교육은 신성한 것이다. 하지만 그 신성함을 교육 그 자체의 목적이 아닌 주변의 무언가와 동일시하여 성역으로 만들진 않았는지 돌아봐야 한다.
30~40명의 학생에게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 동안, 선택권 없이 무작위로 배정된 선생님의 수업을 일방향으로 듣게 만드는 현재의 시스템을 적어도 한 번은 의심해 볼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면 너무 건방질까. 칸의 시도는 꽉 막힌 현실의 교육에 내는 작은 구멍이다.